<검신재생 242화>
242. 세 얼간이
“교문척이라고 하오.”
제법 외모가 출중한 사내였다. 적어도 지나가다 보면 흘깃 시선을 줄 만한 외모다.
허리춤에는 커다란 대도를 찼다. 교문세가가 뇌섬도(雷閃刀)라는 절기가 유명하다는 걸 반증하듯 기세가 남달랐다.
이어 교문척과 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던 다른 사내가 말했다.
“황보세가의 황보숭이오.”
외공에 능하다는 세간의 평처럼 황보숭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거구였다.
다만 얼핏 보면 일견 순수하게 느껴지는 얼굴이 다소 험한 인상을 지워 줬다. 그렇다고 한들 체격에서 나오는 위엄과 기세가 남달랐다.
“……당수군.”
이어서 마지못해 인사하는 당수군은 비교적 왜소한 체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반적인 무인보단 왜소한데 하필이면 황보숭의 곁에 있던지라 더 두드러졌다.
세 명을 본 천무백의 평가는 간단했다.
‘각양각색이고 개성이 넘치지만, 공통점이 몇가지 보이는군.’
일단 첫 번째 공통점은…….
“오랜만이오, 제갈소저. 외유는 즐거우셨소? 소저께서 임무를 맡아 홀로 떠난다고 했을 때, 같이 가지 못한 게 한이 되었다오.”
교문척이 은근한 목소리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순간 옆에 있던 황보숭과 당수군이 흠칫하며 째려보는 모습이 천무백의 시야에 잡혔다.
그러자 황보숭이 질세라 급히 말을 덧붙였다.
“소저께서 척마대의 부대주가 됐다기에, 내 도와드리기 위해 듣자마자 달려왔소이다. 내 소저 곁에 서서 마도 잡졸들의 머리에 칼을 먹이겠소!”
당수군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도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오물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전에 독으로 다 녹이겠다.”
셋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천무백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한참 젊은 이십대의 무인이라 그럴까.
제갈설아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한데.
“외람되지만 저는 부대주예요. 척마대의 모든 권한은 제가 아닌 대주님께 있습니다. 이건 총군사께서도 확약한 내용이며, 지금 척마대에 들고자 찾아오신 거라면, 제가 아니라 대주님께 말씀드리시지요.”
뼈가 시릴 만큼 단호한 어조에 천무백도 솔직히 놀랐다.
말투부터 눈빛과 표정까지 모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차갑기 짝이 없는 태도와 분위기는 천무백이 처음 보는 면모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천무백에게 보여 준 모습과는 괴리가 컸으니까.
하지만 세 명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저 안타까운 짧은 탄식만 토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살기등등한 눈빛이 천무백에게 일제히 향했다.
“그대가 천룡검협이오?”
“당신이?”
“…….”
별안간 세 명의 살기 어린 시선을 감당하게 된 천무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투부터 태도까지 확연하게 변했다. 제갈설아를 대하는 태도하고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이런 얼간이들을 봤나…….’
젊은 무인들이 천무백을 추종한다지만, 저 셋은 추종이 아니라 천무백에게 큰 경쟁심을 느꼈다. 천무백은 저 이글거리는 시선 속에서 시기와 질투, 강렬한 경쟁의식을 느꼈다.
“그런데?”
“인정할 수 없소.”
교문척이 포문을 열었고.
“강호의 소문만 믿고 어찌 우리의 생살여탈권을 맡기는가?”
황보숭이 말을 보탰으며.
“……맞다.”
당수군이 동조했다.
“……하아.”
천무백은 오랜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어린애들하고 무슨 말싸움인지.
천무백은 정색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너희들이 인정하든 말든, 이미 정해진 것이다. 들고 싶으면 들어오고, 싫으면 꺼져.”
천무백의 냉담한 반응은 생각 못 했는지 셋이 흠칫했다.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천무백의 기세에 심한 압박감이 느껴진 것이다.
‘이건…….’
‘내공을 끌어올렸나? 아닌데? 내기의 흐름은 전혀 없는데.’
‘단순히 눈빛과 목소리만으로 위엄을 살리고 기세를 압박한다고?’
순간 셋의 눈동자가 일제히 흔들렸다.
모두 절대로 하수가 아니다.
적어도 곽천후에 버금가는 후기지수들인 만큼, 기감이 예민한 건 당연했다.
예민하면 예민할수록, 천무백의 기세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누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룡검협이 그저 과장된 헛소문만은 아니었구나!’
그제야 세 명의 머릿속엔 그간 천무백의 엄청난 행적이 떠올랐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기만 할 뿐, 섣불리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무작정 고개를 숙이고 밑으로 들어간다?
그게 다른 무사들에게 어떻게 비치겠는가.
물론 천무백이 바라는 건 그들이 스스로 굴복해서, 그들을 따르는 이들까지 확실하게 휘어잡는 것이지만.
끝내 황보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흥, 천하의 유현덕도 와룡을 얻기 위해 세 번이나 몸을 낮춰 찾았다지. 그대가 척마대를 제대로 이끌려면,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것이오.”
비단 교문척과 당수군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밖으로 나갔다.
그 셋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천무백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었다.
* * *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셋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 특별한 방법을 궁리하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호승심 강한 무인일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아요. 호승심보단 야망에 찬 사내들이죠.”
제갈설아의 부연에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갈설아가 넌지시 알려 줬던 사항이다.
다만 야망을 너무 좁게 생각했다.
더 강한 무공, 더 높은 경지를 향한 야망으로만 여겼다.
적어도 어린 나이에 그만한 무공 실력을 갖춘 것만 봐도, 가진 재능과 노력을 도저히 경시할 수 없으니까. 치열한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치열한 노력이 무슨 목표를 향했는가?
천무백은 바로 더 높은 경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은 간단하다.
곽천후가 천무백의 뜻에 움직인 것도, 바로 무(武)의 길을 열어 준 덕분이다.
비무를 겨루며 수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내렸다.
지나가는 말로 툭툭 내뱉었지만, 곽천후 같은 후기지수에겐 천금같은 조언.
곽천후도 그걸 잘 알기에 천무백의 사람이 됐다.
하여 천무백도 저 셋을 무(武)로써 감복시키고, 따르게 할 요량이었다.
“본래 용인(用人:사람을 다루는 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오. 마음을 얻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은 상대가 원하는 걸 챙겨 주는 법이지.”
천무백은 큰 조직을 이끌지는 않지만, 그래도 엄청난 경험을 쌓아왔다.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직간접적으로 느낀 바가 많았다.
“저들이 원하는 것 말이죠?”
“저들의 야망이 단지 더 높은 무의 경지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과는 다르더군.”
“으, 맞아요. 꽤 복잡하죠.”
“아니, 복잡하진 않소, 단순하지.”
“단순하다고요?”
제갈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명은 공통점이 많소.”
“공통점이라구요?”
저 세 명에게 공통점이 많다고? 척 봐도 너무 확연하게 다른데.
제갈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봐도 확연하게 다른 개성을 지닌 사내들이었다.
천무백이 그들의 신상이 적힌 서류를 짚었다.
“우선 셋 모두 가문에서 차남이지.”
“어, 그렇죠. 모두 둘째죠.”
“그런데 후기지수 중, 손에 꼽힐 무공 실력을 갖췄소.”
“맞아요. 정의맹 내에서 가장 강한 후기지수들이죠.”
“그게 문제요. 실력이 출중한데, 장자는 아니란 말이지.”
“……아!”
“가문의 후계자를 두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사이요. 차라리 무공이 부족하면 모르면 일찍이 포기하겠지만, 실력이 있으니 포기하지도 않겠지.”
“그러면 모두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소.”
천무백은 저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정의맹에 투신한 걸 봤을 때, 처음엔 항마의 기치에 이끌린 의협심 넘치는 사내들로만 알았지만, 아니었소. 그들은 정의맹에서 활약하여 공적을 세우고 입지를 다질 생각인 거였지.”
“아……! 그래서 정의맹의 수뇌부들에게 계속해서 혈귀곡에 대한 타격을 요구했던 거였어요.”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멍청하진 않소. 젊고 미숙하더라도, 무식한 건 아니란 말이지. 위험하다는 건 다 알지. 그런데도 혈귀곡과 싸우겠다고 요구한 건, 조금이라도 빨리 공을 세우고 명성을 떨치기 위함이오. 나처럼.”
좋은 예가 있다. 바로 천무백이다.
혈귀곡과의 싸움으로 크게 명성을 떨친 천무백의 이름 석 자와 별호를 모르는 강호인사는 이제 없다.
혈귀곡과 싸워 명성을 떨치면, 가문의 후계 자리를 노릴 수 있다는 판단이리라.
그런 판단으로 정의맹에 몸을 던졌고, 혈귀곡과의 싸움을 주장했으며, 끝내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파벌까지 만든 것이 틀림없다.
거기에 제갈설아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확신을 굳혔다.
“절 대하는 태도요?”
“누가 봐도 소저에게 호감을 품고 있잖소.”
제갈설아가 고운 미간을 좁혔다.
사실 단순한 호감이라기엔 노골적이었다. 특히 교문척과 황보숭은 대놓고 추파를 던졌으니까.
때문에 제갈설아는 시종일관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이미 제갈설아의 심중에 누가 자리 잡았는지 확실한 상황에서, 그들의 추파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하지만 셋은 포기하지 않고 끈덕졌다.
“저한테 호감을 품은 것도 야망을 품은 거란 뜻인가요?”
“소저의 마음을 얻는다면 제갈세가의 배경 역시 얻는 것이니까.”
오대세가에 정의맹의 총군사를 담당하는 제갈세가의 배경.
제갈설아와 연을 맺는다는 건, 그만한 배경이 뒤따라온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제갈설아의 예민한 감은 말했다.
“……그 셋 눈빛 보면 진짠데요.”
“맞소. 연정을 품은 건 확실해 보이더군. 그러니 더 열성적일 것이오. 단순히 제갈세가의 배경뿐 아니라 아름다운 연자를 얻는 것이니까.”
순간 제갈설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아름답다는 칭찬을 스쳐 가듯이 말하다니.
저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때때로 말하지만, 정작 받아들이는 제갈설아는 머리가 아찔했다.
“영악하군.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으. 제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요. 공자님이 그 셋보다, 그리고 저보다도 어린걸요.”
“소저가 동안이라서 간혹 깜빡하오.”
“윽. 너무 대수롭지 않게 훅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여하튼 세 명 모두 영악하기 짝이 없지. 오히려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교차할 거요. 나를 따르기보단, 나를 대신해서 무인들을 이끌고 활약하는 것도 고려하겠지.”
“설마요.”
“약간의 무공 격차라면, 오히려 상대가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소. 하지만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다면,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는 법이지.”
제갈설아가 입을 떡 벌렸다. 차이가 워낙 커서, 저들은 오히려 자신의 강함을 못 알아보고 헛된 야망을 품는다고 지적하는 뜻이 아닌가.
하나 곰곰이 생각하던 제갈설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미 후기지수가 아니니까.’
후기지수로 묶기는커녕, 강호의 명숙들로 범위를 넓혀도 천무백은 압도적이다.
천무백의 진실한 힘을 못 알아보고 헛된 야망을 품는다는 가정은 그럴듯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그만한 야망을 품고 혈귀곡과의 싸움에 몸을 던지는 이들이에요. 굳게 결의한 마음만큼은 지지 않을 이들인데.”
제갈설아의 말이 맞았다. 단순히 무력으로 굴복시킨다고 해도, 결과는 좋지 않으리라.
어찌 됐든 천무백이 이끌고 같이 싸우면서 등을 내줄 수 있는 동료가 되어야 하는데, 신뢰가 없으면 그럴 수가 없으니까.
천무백은 확실하게 셋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걸 내가 줄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지.”
“원하는 거라면, 가문의 후계 자리를요?”
남의 가문의 후계 자리를 어떻게 얻게 해 준단 말인가?
“나를 따르면 공을 세울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줘야지.”
천무백의 말에 제갈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을 세우려면 적을 만나 싸워야 하는데…….
“때마침 알맞은 적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지.”
알맞은 적?
혈귀곡과의 전면전은 아직 이르다는 게 정의맹 수뇌부들의 판단인데…….
순간 제갈설아의 머리에 스쳐 가는 일단의 조직이 있었다.
“월야방!”
“그들을 치면 명성과 공적은 확실하지 않겠소?”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