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40화>
240. 그게 가장 쉬우니까
천무백이 정의맹에 도착했단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맹내의 모든 인물이 알게 됐다.
“그럴 수밖에 없죠. 아빠가 다짜고짜 강기를 날렸으니까요!”
“으음…….”
제갈설아의 치켜든 눈초리에 제갈여강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귀여운 딸아이가 자기편도 안 드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명백히 잘못 했는데.
‘아니, 내가 잘못 한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데?
워낙 분위기가 묘했어야지.
솔직히 제갈여강뿐 아니라, 딸아이를 가진 아비 입장이라면 오해를 할 수밖에 없다.
한 방에 있는 젊은 남녀, 무언가 조용히 내려앉은 정적 가운데 묘한 분위기.
그걸 보고 뒷목 잡지 않을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제갈여강은 내심 억울했지만, 허리춤에 팔을 올린 제갈설아를 보고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쨌든 한바탕 난리가 났으니 정의맹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는 건 당연했다.
“내가 설마 천룡검협을 공격할 생각으로 강기를 날렸겠느냐?”
“그럼 왜 날렸는데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패륜이라도 저지르겠다는 듯한 눈초리에 제갈여강은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딸아이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새삼 천무백에 대한 적개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만, 어쩌겠는가.
이러다가 방에도 또 못 들어오게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한동안 말도 섞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제갈여강은 필사적으로 머릴 굴렸다.
제갈세가의 가주이자, 정의맹의 제일두뇌인 그가 딸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맹렬하게 머리를 굴린 만큼, 답이 나왔다.
“당연히 천 공자를 도와주기 위함이다!”
“도와주려고 강기를 날렸다고요? 진짜로요?”
“지, 진짜지.”
제갈설아의 얼굴이 미심쩍게 변했다.
무슨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이지. 도와주려고 공격을 해?
그나마 제갈설아가 당장 반박하지 않는 것도, 아버지의 명석함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넓고, 멀리 본 것일지도 모르니까.
미심쩍은 눈초리에 제갈여강이 필사적으로 부연했다.
“설아야, 생각해 보거라. 나는 지금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 어떤 존재겠느냐?”
“정의맹의 총군사…… 아!”
순간 제갈설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꼰대죠!”
……틀린 말은 아닌데 기분이 묘해지네.
“크흠……. 뭐 그렇지. 젊은 애들은 당장이라도 혈귀곡을 타격하자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을 모조리 거둬 낸 게 나니까 말이다.”
정의맹은 무인 개개인이 모여 형성된 연합체다.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뜻을 관철한다면, 아무리 지휘층이라도 거부하기 어렵다.
더구나 의견도 그럴듯하다.
이미 전쟁은 시작했으니, 혈귀곡에 대한 선제타격을 주장하는 건 전술전략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걸 논리적으로 파훼한 사람이 바로 제갈여강이다.
젊은 무인들이 혈기와 의기는 드높다 한들, 정의맹의 제일 두뇌인 제갈여강의 논리를 어찌 파훼하랴.
그러니 그저 꼰대라며 속을 삭일 수밖에.
그쯤 되자 제갈설아는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가 천룡검협과 큰 갈등을 빚었다. 접빈당의 일부가 파괴될 정도로. 하면 젊은 무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겠느냐?”
“아하. 대놓고 현 정의맹의 지휘층과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였으니…… 단숨에 구심점이 되겠네요.”
“그렇다. 물론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천룡검협의 명성과 행적은 젊은 무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지만, 정의맹의 지휘층과 부딪치는 모습까지 보이면 확실히 천 공자 중심으로 뭉치지 않겠느냐.”
제갈설아는 짧게 감탄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었다.
물론 굳이 갈등을 안 빚어도 천무백의 중심으로 무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의 행적은 피 끓는 무언가를 자극하게 했으니까.
한데 지금 상황이 좀 묘하지 않은가.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도 파벌이 갈리기 시작했으니, 아무리 천무백이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해도 그 모든 걸 아우르려면 쉽지 않은 일.
한데 젊은 무인들의 대척점에 선 제갈여강과 대놓고 부딪치는 모습이 보이고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으니, 천무백의 중심으로 모여드는 힘이 더 강해지리라.
제갈설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언제 그렇게 노려봤냐는 듯이, 예의 딸아이의 예쁜 눈매에 제갈여강은 마음이 적잖이 놓였다.
“역시. 그랬던 거였네요! 그래서 강기의 강도도 조절하신 거였어요.”
“으응?”
“천 공자가 아무렇지 않게 강기를 흘려보냈잖아요. 정말 아빠가 천 공자님을 어떻게 해 보실 생각이었다면, 전력으로 쏟았겠죠.”
그랬다. 천무백은 갑작스러운 강기다발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몇 번 휘둘러 무위로 되돌렸다.
제갈여강이 두뇌로 유명하지만, 엄연히 한 문파의 수장.
제갈세가의 수좌인 만큼 무력 역시 출중하다.
그의 강기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 낸 건 확실히 이상했다.
제갈여강의 무공은 딸인 제갈설아가 잘 아니까.
“흠흠. 그, 그렇지.”
하나 제갈여강의 얼굴은 묘했다.
‘진짜로 전력을 다해서 쏟아 냈는데…….’
진짜, 이 악물고 한 건데…….
솔직히 눈이 뒤집혔다.
이 미친놈이 딸아이를 어떻게 해보려는 줄 알고 말이다.
그런데 가볍게 흘려 내다니.
순간 제갈여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지?’
보통 천재는 오만하다.
그래서 천재의 약점은 뚜렷하다.
자신이 믿고,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의 계획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그것 중 무언가가 도저히 가늠하기 힘들어질 때.
가장 강한 충격과 두려움을 느낀다.
천재적인 두뇌로도 파악하지 못하고 가늠하지 못하는 넓고 깊은 그릇을 보게 되면.
도저히 바라보기 힘든 높은 산을 올려다보게 된다면.
그리고 지금, 제갈여강은 미약한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렸다.
* * *
“한판 붙자.”
“정의맹이 무슨 마교입니까?”
“뭐?”
“총군사도 그렇고, 맹주도 그렇고 환영인사로 싸우자는 게, 제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기류가 생겼습니까.”
“허허허…….”
곽용은 천무백의 퉁명스러운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첫인사로 한판 붙자고 말하는 사람이 정상일 리가 있겠는가.
곽용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투신이라는 별호처럼, 그는 강렬한 호승심을 느꼈다.
몇 년 만에 마주치는 천무백이었지만, 과거와는 궤를 달리하는 기세와 분위기에 온몸이 뜨거워진 것이다.
“미안하군. 네놈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 나도 모르게 단전이 뜨거워지더군.”
“그거 병입니다.”
“으응?”
“단전의 그릇이 미약해졌다는 걸 뜻하니, 영약 챙겨 드시고 몸 관리하십시오.”
“어, 어 그런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지한 천무백의 표정에 곽용이 퍽 당황스러워했다.
“내공이 꼭 몸에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본래 사람이 담을 수 없는 강력한 자연의 기운을 담는 것인데, 젊을 때야 상관없지만 육체가 노쇠하면서 신체가 버텨 낼 수 있는 내공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요.”
“그 말은……?”
“내공을 천천히 비우시면서 외공에 더 힘을 쓰십시오.”
“…….”
곽용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느새 그는 귀를 활짝 열어 천무백의 조언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한번 들었던 조언이 아닌가.
‘창천검신 어르신께서도 저런 말을 하셨지.’
틀림없다.
아득한 기억 저편, 창천검신이 해 줬던 조언이 틀림없다.
‘이걸 이제야 기억하다니…….’
하긴, 그때의 곽용은 한창 젊을 때였다.
아직 육체의 노쇠화 같은 건 상상도 못 하던 강철 같은 육체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천무백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곽용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척.
벌떡 일어난 곽용이 허릴 숙이며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차렸다.
“고맙네, 네놈, 아니 자네의 금과옥조 같은 조언은 뼈에 새기겠네.”
“뼈에 새길 것까지야……”
“하면 언제 대련 한판 붙을 텐가?”
“우선 상황부터 파악하고 하시죠.”
“그래, 좋구나. 일단 기본적인 상황은 알고 있지 않으냐?”
“예. 다만 맹 지휘부에서도 계획이 있을 것 아닙니까?”
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마대(斥魔隊)를 조직할 생각이다.”
“젊은 무인들로 이뤄진 타격대로군요.”
“그들의 혈기와 의기를 생각하면 후방에 놓으면 반발이 크겠지. 가장 빨리, 가장 먼저, 가장 위험한 곳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로 만들 생각이다.”
천무백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하긴, 저 무인들을 후방에 놓겠다고 하면 반발이 크리란 건 자명하다.
그러나 젊은 무인들은 분명 미숙하다. 이런 이들을 날카로운 비수로 쓴다는 건, 그들에게 쏟아질 위험성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네놈이 대주를 맡으면 감수할 만하다고 여긴다.”
곽용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실제로 우려의 목소리가 몇 있긴 했지만, 천무백이 척마대의 대주를 맡아 이끈다면, 가장 강력한 비수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실제로 지금 목격한 천무백의 기세를 보면, 솔직히 곽용 본인이 대주를 맡아도 비교가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려면 척마대에 속할 젊은 무인들이 절대적으로 네놈의 지휘에 철저히 따라야겠지.”
“그건 제가 해결해야 할 몫이군요.”
“그렇다. 마음을 훔쳐야 하는 일이니.”
큰 위험이 도사리는 임무를 수행할 만큼, 천무백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건 정의맹의 지휘층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천무백이 오롯이 본인의 힘으로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젊은 무인을 척마대에 투입할 순 없지. 솔직히 말해 무공 실력이 좋지 않은 친구들이 더 많으니까 말이야.”
“결국, 뛰어난 정예들만 모아야 하는데, 이들이 쉬이 따르진 않겠죠.”
“그렇지. 저 무인들 사이에서도 우두머리가 된 이들은 타고난 이들이야. 힘이 있고, 가문의 뒷배가 있고, 권위가 있으며, 늘 위에 서 있는 자들이지. 그들은 오히려 널 흠모하는 게 아니라…….”
“경쟁상대로 여기겠지요.”
특히 네 개의 파벌로 이뤄진 우두머리들.
“교문척, 당수군, 황보숭.”
“허. 그걸 벌써 파악했나?”
“제갈소저가 알려 줬습니다.”
“그 셋은 좀 확실히 태가 달라. 황보숭을 제외하고 교문척과 당수군은 중원에서 좀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보니, 잘 몰랐는데 보아하니 천후랑 비교해도 꿀리지 않더군.”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저 사이에서 파벌 우두머리 노릇을 하겠지.
“황보숭은 오만하지만 그만한 실력이 있네. 황보세가가 어릴 때부터 영약과 벌모세수로 키운 기재라더니, 그만한 실력자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나머지지.”
“안휘세력.”
“맞아. 안휘성의 무사들로 이뤄진 무리.”
“남궁세가는 어떻게 하겠답니까?”
“글쎄. 지금까지 입맹을 타전한 적은 없지만…….”
남궁세가는 홀로 선 채로 안휘성의 패자다.
검존이 모습을 감춘 뒤, 사실상 천하제일인이라 평가받는 남궁세가의 가주.
후기지수의 용(龍) 대공자까지.
그들은 고고하다.
정의맹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지 않아도, 홀로 선 채 마도와 싸울 수 있다 믿는다.
물론 그만한 힘과 세력을 갖추기도 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골치 아프긴 하지. 그만한 세력과 힘을 합치면 분명 큰 힘이 되겠지만.”
“지금 만들어진 권력의 배분이 크게 흔들리겠지요.”
“아무리 대의에 따라 모인 연합체라지만,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지.”
“사실 세 개의 파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문척, 당수군, 황보숭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천무백이 보기에도 세 명의 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이미 절세지경의 경지에 올라선 천무백에겐 가당치도 않다.
적당히 찍어 누르면 알아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안휘세력이 존재한다는 건, 남궁세가가 분명히 간섭하겠다는 의미. 곧 남궁세가도 입맹을 타전할 것입니다.”
곽용이 미심쩍은 얼굴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과연 그럴까…….”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 입맹하길 권했지만, 도도하게 거절하던 이들인데.
“제가 왔으니까요.”
고작 말 한마디로 모든 논리를 대신하는 모습에 곽용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곽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만큼 가장 강력한 논리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의 대공자가 직접 정의맹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천무백은 가볍게 웃었다.
일전부터 천무백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종의 지론이 있다.
“대가리부터 쳐야지.”
그게 가장 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