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39화 (239/318)

<검신재생 239화>

239. 이런 도둑놈……

정의맹은 일전에 중경에서 한참 세를 떨치던 적룡방을 무너뜨린 그 자리에 누각을 올렸다.

수많은 사람의 피가 흐른 장소에 세워진 건 당연히 께름칙하다.

하지만 정의맹주인 곽용은 그런 걸 두려워하는 위인이 아니다.

차라리 원한을 가진 귀신이 나오면, 혼령까지 베어 주겠노라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내니까.

“차라리 귀신이 나오면 좋겠군.”

그런 천하의 곽용도 작금의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다.

곽용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혀를 찼다.

“터가 안 좋아…… 터가.”

젊은 무인들 사이로 암암리에 사조직이 만들어지는 건 알았지만 딱히 제지할 방도가 없었다.

제지하면 할수록 젊은 혈기 특유의 반발심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치기 어린 무인들이 아니다.

마도에 대항한다는 항마의 기치에 이끌려 모인 이들을 단순한 혈기라고 낮춰 생각할 수 없다.

거대한 마도에도 굴복하지 않고 맹렬하게 싸우고자 굳은 결심을 한 이들

이들에게 정파의 선배라고 해도, 사실 꼰대나 다름없는 이들의 조언이 귀에나 들어가겠는가.

누르면 누를수록 더 맹렬하게 튀어나오는 세대였다.

그래, 차라리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곽용 자신도 젊을 때 그러했고, 창천검신을 만나 정신을 차렸으니까.

“자기네끼리 만든 사조직 사이에서도 권력 싸움이 있단 말이지.”

오늘 아침 일어난 사건이 그러했다.

젊은 무인들이 조직한 사조직끼리 부딪친 것이다.

물론 대대적인 싸움은 아니고, 몇몇 무인이 일부 부딪쳤지만 정의맹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지금껏 잠잠하던 혈귀곡이 최근 모습을 드러냈는데,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지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겠는가.

“쯧쯧. 어린 것들에겐 내 권위가 안 통해.”

나도 늙긴 늙었나…….

곽용이 그리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있던 제갈선이 쓰게 웃었다.

총군사인 그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원래 그런 이치이지요. 어른보다, 바로 몇 살 위를 더 무서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무백, 그 자식이 와야 하겠지.”

젊은 혈기를 억누르고, 한데 모으는 역할은 지금 지휘부가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물론 권위와 힘, 배분과 관록이 있으니 강제로는 할 수 있다.

“그러면 더 반발하겠지요. 어쩌면 정의맹을 나가 자기네끼리 새로운 연합을 만들고자 할지도 모릅니다.”

곽용의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갈선이 저리 말한 건, 바닥에 비슷한 기류가 감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 심각하오? 군사?”

“아직까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다만 젊은 무인뿐 아니라, 중진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게 문제지요.”

“혈귀곡 놈들이 괜히 날뛰어 가지고…….”

최근 몇 개의 문파가 풍비박산이 났으니, 정의맹의 중진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감돌았다.

당장 중진들도 중소문파의 수장이거나 장로들이었으니까.

언제 자신들의 문파가 당할지 모르니, 정의맹이 먼저 나서 혈귀곡을 타격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요. 새외가 심상치 않습니다.”

“……새외에도 혈귀곡을 제외한 마도세력이 있다는 말이지.”

“오히려 혈귀곡보다 더 세가 클지도 모릅니다. 서장의 새외문파들이 반년 전에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

“하물며 남만의 야수궁은 봉문에 들어갔지요.”

“…….”

“새외의 세력을 정리하고, 빼앗고, 갈취하고, 그것으로 힘을 키운 마도 세력이 중원에 들어와 혈귀곡과 연수한다면?”

“……후우.”

곽용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많은 문파가 정의맹의 깃발 아래 모일 때만 해도 뿌듯했다.

당장이라도 마도의 잔당을 깡그리 섬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잔당’이 아니었다.

“40년 동안 저들은 완벽하게 부활했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분명 개박살이 났는데.”

“마도는 철저한 강자존의 세상.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절대강자가 살아 있다면 가능하지요.”

“천마 말인가…….”

곽용이 길게 탄식을 토했다.

제갈선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백도에선 창천검신께서 우화등선하셨고, 그 뒤를 이으실 검존께서도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정마대전 이후 무림맹이 형식적인 연합체로만 전락한 이유가 그것이지요.”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하겠군.”

곽용은 본인이 그 구심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마대전의 용사, 창천검신의 곁에서 싸운 투사, 강력한 무력과 권위까지.

하지만 지금 절실하게 느꼈다.

젊은 무인들의 혈기도 제어하지 못하는 자신은 구심점이 될 수 없다고.

하나 지금 가능한 자가 딱 한 명 있다.

지금 정의맹의 지휘부를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한 사람이자, 젊은 무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자.

“천무백 요놈 왜 이렇게 안 와?”

“제 딸아이가 데리러 갔으니 곧 올 것입니다.”

“듣자 하니 하남에 들렀다 온다고 하는데…….”

불현듯 곽용의 얼굴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젊은 남녀가 같이 여행을 떠나면 뭐, 없는 마음도 생기겠지.”

“……맹주님.”

“허허허. 왜 그런가. 천룡검협이라면 모든 문파가 원하는 사윗감일 텐데.”

“제 딸은 아직 어립니다. 시집이라뇨.”

“에잉, 어리긴. 언제까지 품속의 애라고 여기나. 쯧. 나에게 천후 같은 선머슴 놈이 아니라 딸애가 있었다면 아주 꽉 붙잡을 텐데.”

제갈선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천무백, 그 사람이 일세의 기재인 건 맞지만, 속엔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는 있는 사람입니다.”

“허허허…… 수백 마리는 너무 과하지. 더구나 무뚝뚝하고 생각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군사께서 혹시 질투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맹주님!”

“핫핫핫.”

곽용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도 늙어감에 따라 오히려 애 같은 면모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제갈선은 천무백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 수백 년은 늙은 노괴가 들어간 것 같은 녀석이란 말이지.’

사람 보는 안목만큼은 아버지인 태상가주도 인정했다.

자신의 안목을 신뢰하는 제갈선은 어쩐지 천무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암. 이건 내 감이야. 설아 고 아이가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도 못 걸게 해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지.’

그리 생각하던 때.

드디어 기다렸던 소식이 도착했다.

“천룡검협과 제갈소저께서 정의맹에 도착하셨습니다!”

* * *

손님을 맞이하는 접빈당엔 천무백과 제갈설아, 둘이 앉아있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묘하긴 하구려.”

“그렇죠? 제가 떠나기 전보다 조금 더한 느낌이에요.”

“중진들 사이에서도 묘한 불만이 보이고, 젊은 친구들은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안달인 것 같고.”

“그러니까요. 실제론 혈귀곡과 안 싸워 봐서 그렇겠죠. 자신들도 정마대전의 용사들을 꿈꾸고 있으니까요.”

“이래선 어린 것들은…….”

“……으, 방금 소름 끼쳤어요.”

“왜 그러시오?”

“저보다 더 어리고, 심지어 밖에 있는 무인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게 공자님인데. 그런 말씀 하시니까요.”

“몸은 어리지만, 정신은 늙어서 그런가 보오.”

“하긴, 공자님은 강호를 주유하시며 벌써 큰 싸움을 여러 번 하셨으니 정신적으로 지치실 만해요.”

그리 말하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니, 천무백은 더 할 말이 궁해졌다.

진짜 정신은 늙었는데…….

“한데 무인들 사이에서도 파벌이 갈린 것 같던데?”

“맞아요. 아무래도 우두머리 역할을 할 만한 후기지수들 사이로 무인들이 뭉치기 마련이니까요.”

“지나오면서 대충 본 거로는 대략 세 개의 파벌인 것 같소.”

“그걸 단순히 지나오면서 알아차리셨다고요?”

제갈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어찌 지나가면서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파벌이 갈린 걸 눈치챌까.

하지만 천무백은 뛰어난 기감으로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서로의 기파가 묘하게 겹치고 부딪치는 걸 파악하면 대략적인 몇 개의 덩어리가 느껴지니까.

“맞아요. 정확히는 네 개의 파벌이에요.”

“네 개?”

“강소성의 소주에서 큰 세력을 떨친 교문세가의 교문척을 중심으로 한 세력, 소수지만 독립성이 강한 사천의 당문에서 온 당수군, 산동 황보세가의 황보숭, 그리고 안휘성의 무인들로 이뤄진 안휘 세력. 이렇게 네 파벌이에요.”

“구파일방의 젊은 무인들은?”

“그들은 당연히 파벌이 따로 없어요. 현 정의맹의 지휘층이 다 그들 문파의 선배이자 스승들이니까요. 정의맹의 행사에 잘 따르죠.”

“그렇군. 하면 안휘 세력은?”

“아직 정의맹에 입맹하지 않은 남궁세가의 파벌이에요.”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입맹도 하지 않았는데, 정의맹 내부에 파벌을 형성해 영향력을 행세한다?”

“대남궁세가니까요.”

제갈설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구파일방은 서서히 정의맹에 입맹하고, 입맹을 타진하는 단계다.

다만 오대세가, 그중에서도 남궁세가는 입맹을 타전 자체를 하지 않았다.

홀로 선 세가의 힘만으로도 안휘성의 패자요, 중원 무림의 거목이었으니까.

“모르죠. 공자님이 젊은 무인들을 이끈다고 하면, 남궁세가에서도 올지도.”

“남궁세가의 대공자를 말하는 것이오?”

남궁세가의 대공자.

천무백이 등장하기 이전엔 차기 무림을 이끌어갈 유일한 용(龍)으로 불렸던 자.

“본래 검룡(劍龍)이라 불리던 후기지수는 남궁세가의 대공자였으니까요.”

제갈설아의 자세한 설명에 천무백은 대략적인 그림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어쩐지 남궁세가의 입김이 이번 일에 더 들어갔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다 문득 천무백의 시야에 제갈설아의 머리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길게 풀어헤친 머리였다.

‘그러고 보니…….’

월야방 습격 때인가.

제갈설아가 살수들의 시선을 피해서 진법을 만들었었지.

“비녀는 그때 잊어버린 것이오?”

“아? 이거요?”

제갈설아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흑단처럼 탐스런 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급히 도구가 없어서요. 근방의 나뭇가지나 돌멩이도 알맞은 게 없었고, 그래서 비녀를 뚝 절반으로 나눠서 진법을 만들었었죠.”

“그렇군.”

본래 늘 단정하게 쪽 찐 머리를 유지하던 제갈설아였다.

월야방 습격 이후 여전히 급히 말을 달려 중경에 왔으니, 비녀를 구할 시간도 없었으리라.

“잘됐군.”

“네? 잘됐다고요?”

제갈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웬 뜬금없는 말인가.

‘혹시 생머리 좋아하시나?’

그럼 진작 풀고 다닐 걸 그랬나.

천무백은 품속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고품스런 비단으로 감싼 함이었다.

제갈설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에요?”

“하남에 장인들이 모두 주문이 밀려 있어서 늦었소.”

“뭔데요?”

천무백은 말없이 비단을 풀어서 함을 열었다.

“……!”

고아한 향이 풍기는 듯한 착각이 드는 기품 있는 나비잠이었다.

제갈설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이었으니까.

더구나 물건의 생김새를 알아본 제갈설아는 순간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일전에 제갈설아가 능조에게 선물로 추천한 모양의 나비잠과 비슷했다.

다만 재질이 달랐다.

“시중에서 팔던 건 재질이 조잡하더군. 하남의 장인들을 수소문해서 백옥으로 만들었소.”

“이걸…… 절 주신다고요?”

“내가 쓰려고 주문한 물건은 아니지 않겠소.”

제갈설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천무백도 그녀의 반응에 어쩐지 머쓱해져 시선을 흘깃 돌렸다.

산동의 천하논전부터 해서 도움받은 게 한 둘이 아니니, 나름 그만의 보상이었다.

하지만 제갈설아가 한참 말없이 나비잠을 바라보고 있자 천무백이 슬쩍 물었다.

“마음에 안 드오?”

“아뇨, 그건 아닌데…….”

“해 보시오.”

제갈설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비잠을 들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내려앉은 침묵이 묘한 감정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살짝 들뜬 듯한 제갈설아의 숨결이 장내의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천룡검협, 그리고 설아야. 드디어 왔느…… 으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제갈선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단순한 홍조가 아니라 얼굴이 잔뜩 붉힌 제갈설아.

살짝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의 빛.

장내에 가득 찬 묘한 분위기.

제갈선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그의 눈이 쌍심지를 켰다.

천무백을 바라보는 제갈선의 입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환영의 인사 따위가 아니었다.

“이런 도둑놈의 새끼……!”

제갈선의 속이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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