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38화 (238/318)

<검신재생 238화>

238. 내가 말이오?

혈귀곡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월야방 살행 실패. 특급살수 셋을 포함한 정예살수 서른넷 전멸이라…….”

월야방의 소식을 전해들은 귀마(鬼魔)의 얼굴이 묘해졌다.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귀마의 표정은 딱히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알 듯 모를 듯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성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큰 반응은 없었습니다. 듣기론 그저 고개를 끄덕인 뒤 불경을 읽고 있답니다.”

귀마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갔다.

“답지 않게 불경은 무슨. 누가 보면 제대로 된 고승인 줄 알겠구나. 땡중 주제에…….”

“…….”

수하는 애써 고개를 숙이며 못 들은 척했다.

일성은 엄연히 귀마보다 서열이 높았으니까. 괜히 험담하는 데 맞장구를 치는 건 좋은 처사는 아니다.

하지만 위계서열이 꼭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강자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만큼, 하극상의 세상이기도 했다. 언제든 아래 서열이 위 서열을 도모하고, 올라설 수 있다.

이성(二星)으로서 혈귀곡 내 두 번째 서열이자, 암종의 종주인 귀마가 일성을 비웃는다고 해도 특별할 건 없는 일이었다.

“쯧. 고작 살수들 손을 써서 성공할 줄 아셨나. 하긴 무력은 특출 나나, 경험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

귀마는 연신 일성, 혈귀곡의 곡주이자 혈종의 종주, 혈불에 대한 험담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나이로나 배분 모두 귀마가 훨씬 위였다.

정마대전 막바지 당시 귀마는 긴 전쟁 동안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였다.

반면 혈불은 막바지에 돌연 나타난 마도의 신진고수였다.

둘의 나이 차는 무려 스무 살이 넘었고, 배분으로만 따져도 한 배분의 차이가 난다.

지금은 역전이 됐다.

‘천마께서 불세출의 기재라고 평하시고, 시간만 있다면 능히 창천검신에 버금갈 잠재력이라 말씀하셨으니.’

겉으론 실컷 비웃고 험담했지만, 귀마는 혈불이 두려웠다.

그만한 잠재력에 걸맞은 실력의 성장.

패도를 추구하며 마도의 권력을 휘어잡을 만한데, 혈불은 그러지 않았다.

늘 자애로운 미소를 달고 살았다. 모르는 이들이 봤다면 자애로운 승려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미소 너머에 수많은 피로 점철된 길이 있음을 귀마는 똑똑히 알았다.

“쯧. 이리되면 내 계획만 통한 것인가.”

혈귀곡은 두 가지 계책을 동시에 진행했다.

첫째는 혈불이 월야방을 통해 천룡검협을 직접 공격하는 것.

두 번째는 귀마가 검종을 포섭하여 세력을 공고히 하는 계획이었다.

사실 귀마는 최근까지만 해도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으리라 여겼다.

감시자로 보낸 이들이 죽고 연락이 끊겼으니까.

상황이 급변한 건 얼마 전이였다.

“서문적, 그자의 말이 확실한가?”

“조사 결과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귀마가 턱을 쓰다듬었다.

접촉해 온 검종의 마인이라는 서문적은 귀마가 보기에도 인상적이었다.

자신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고, 대담했다.

거칠면서도 기민했고 타고난 배포와 배짱만큼은 귀마도 감탄할 정도였다.

“검종 내에서 패가 갈려서 서로 주도권을 잡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말이지.”

과정에서 혈귀곡 감시자들의 정체가 발각돼, 혈귀곡과 연수를 반대한 무리에게 참살당했다는 게 서문적의 설명이었다.

패가 갈려서 연수하니 마니 하며 싸우다가, 최근 연수를 지지하는 측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얘기였다.

물론 귀마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당장 수하들을 풀어 상황을 확인했다.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정황이 서문적의 말과 일치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귀마는 혈불의 계획이 실패했단 사실 때문인지, 흡족했다.

하나 수하는 조금 께름칙한 구석이 있었다.

‘모든 정황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마치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것처럼.’

하지만 수하는 함부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정확한 증거도 없이 심증을 내세우기엔, 귀마의 아량이 넓은 건 아니었으니까.

“좋다. 검종을 곡내로 들여보내라. 확실한 내 세력으로 만들어야겠다.”

“바로 밑에 두실 생각입니까?”

“일성, 그 양반이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사실 혈불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진 않는다.

귀마는 혈불이 몇 수를 더 내다봤는지 이미 눈치챘다.

‘월야방의 실패쯤은 어차피 예상했을 거다. 문제는 이미 월야방과 천룡검협은 척을 졌고, 살행은 진행해야 하니 월야방은 오히려 혈불의 조력을 받아야 하는 처지겠지. 그러면 자연스레 월야방에 혈불의 입김이 커지고, 끝내는 수중에 들어올 거다.’

마도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인 혈불이, 월야방이란 칼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문제 되지 않는다. 마도천하를 이룩하기 위해 세력을 키우는 거야. 어찌됐든 지금은 모두 한편이니까.

하지만 그 이후다.

“새외의 천마께서 곧 돌아오신다. 마도천하는 당연히 일어날 일이다. 창천검신은 없고, 검존 역시 늙었다. 창천 대신 검은 하늘이 올 것이니, 그 이후를 생각해야지.”

마도천하는 당연히 올 일이다.

귀마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면 마도천하를 이룩해 낸 이후, 마도 내부의 치열한 권력암투가 벌어지지 않겠는가.

‘나와, 나의 암종이 우뚝 설 날이 올 것이다.’

귀마의 눈이 시퍼런 귀화를 토했다.

* * *

천무백은 마음을 급히 먹지 않았다.

‘월야방의 거점인 수십 군데.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곳하고 차이가 있겠지.’

당시 창천검신은 월야방의 거점과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살문인 만큼 마도의 편에 선다면, 단숨에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당대 방주는 똑똑한 이였고, 철저하게 몸을 숨기며 정마대전을 피했다.

지금 천무백의 머릿속엔 월야방의 모든 거점이 들어 있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 몇몇 거점은 변했을지도 모르니, 당장 치는 건 어불성설이다.

또 한 번 살행이 실패했다는 게 알려졌으면, 저들의 움직임 역시 은밀해지리라.

‘쫓는 거야 못 할 것도 없다만.’

다소 귀찮은 일이다.

천무백은 중경성에 도달하자마자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능허가 없으니 귀찮긴 하군.”

“아저씨가 은근히 일은 잘하긴 했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긴 했소.”

“흐흣.”

별안간 제갈설아가 웃었다.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소?”

“안 그런 척하면서 능허 아저씨 좋아하는 거 티가 나서요.”

천무백이 무슨 끔찍한 소리냐는 듯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설아가 곁에서 본 이래, 가장 다채로운 표정이었다.

“끔찍한 얘기니, 그런 말은 장난이라도 하지 마시오.”

가장 먼저 향한 장소는 하오문 지부였다.

“월야방의 거점과 살수들을 감시하라.”

하오문주 곡지흠이 천무백의 수하나 다름없어진 상황에서, 천무백은 거의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월야방이란 이름에 하오문은 흠칫했지만, 망설임 없이 따랐다.

“하오문이 월야방을 감시할 수 있을까요?”

“하오문만큼 적격인 이들이 없소.”

“하오문이 적격이라고요?”

제갈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견 이해가 안 가는 발언이니까.

천무백은 설명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줬다.

영특한 제갈설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뼉을 쳤다.

“그렇군요. 살수들은 위장의 대가니까요.”

천무백이 가볍게 웃자, 제갈설아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일전에 습격한 이들도 행색이 모두 각양각색이었어요. 사냥꾼, 약초꾼, 승려…….”

“그렇지.”

“살수들 역시 살행 대상을 면밀히 감시하죠. 그러려면 주위에 있어야 해요. 눈에 띄면 안 되고 환경에 스며들어야 하죠. 가장 흔한 건 일반 사람들이죠. 상인들, 점소이들, 가게 직원들…….”

천무백이 씩 웃었다.

제갈설아는 강호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확실히 영특했다. 조금의 단서로 큰 틀을 떠올리는 것에 능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의맹에 총군사로 있는 만큼, 그녀 역시 군사의 자질을 타고 난 것이다.

“그러니 월야방이 계속 공자님을 노리려면, 평범한 이들로 위장할 테고.”

“하오문은 그런 하류인생들이 모인 곳이니, 평소 보지 못했던 자가 스며들면 당연히 알아차리기 쉽지. 하오문도 이쪽 분야에선 대가들이니까.”

“그렇군요! 이미 공자님께선 월야방을 감시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던 거였어요.”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천무백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선망의 눈빛이기엔 과한 시선이었다.

“대단하세요. 정말로요! 언제 하오문과 이렇게 관계를 만드셨는지…….”

본래 제갈설아는 천무백에게 깊은 호감을 지녔다. 거기에 무인으로서의 감탄과 학자로서의 경탄이 합쳐졌다.

당연했다.

월야방의 습격은 분명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사건이다.

예상하지도 못했다. 누구나 살수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걸 알게 되면 당황한다.

‘하지만 공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도 이렇게 담담하게 행동하지 못하리라.

‘설령 계획이 있다고 해도, 그 계획을 진행할 저력이 있는 건 또 다른 문제야.’

천무백처럼 담담할 수도 있다.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기민하게 새로운 계책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낸 걸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은 가진 저력에서 나온다.

하오문은 정보단체다.

돈을 받고 정보를 판다.

철저한 상인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감시를 맡으라고 하면, 과연 반응이 어떨까?

당장 지금처럼 호의적으로 납득하지 않을 건 분명하다.

힘으로서 핍박해도, 하오문은 차라리 숨을지언정 굴복하지는 않으리라.

하나 천무백의 말에 하오문은 망설임 없이 조직력을 가동했다.

그간 천무백이 이뤄낸 아주 단단한 관계가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무백의 진정한 저력이었다.

‘괜히 정의맹주께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야.’

일전에 제갈설아가 천무백을 데리고 오겠다고, 허락을 구할 때 곽용은 기꺼워하며 수락했다.

수많은 백도 문파가 모여 마에 대항하는 정의맹.

‘구심점은 오로지 하나가 될 거라고.’

처음엔 구심점이 곽용일 줄 알았다.

정마대전의 용사였으며, 가장 높은 권위와 명성을 지녔으며 실력까지 갖춘 이였으니까.

하지만 곽용은 천무백을 꼽았다.

사실 그때만 해도 천무백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신뢰했지만, 백도의 구심점이 되리라는 판단에 고개를 갸웃했던 제갈설아였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산동에서부터 천무백과 동행하면서 절실하게 느꼈다.

‘상황을 판단하고 곧바로 다음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능력을 보면, 참…… 말이 안 나오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근데 왜……’

제갈설아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문득 표정을 찡그렸다.

“왜 그러시오?”

천무백이 묻자 제갈설아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답답해서요.”

“뭐가 말이오?”

“눈치 없는 거요.”

“내가 말이오?”

“…….”

제갈설아 꽁한 듯 답하지 않자 천무백은 조금은 당황한 기색으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중경성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청성표국의 지부였다.

“아버지와 누님에게 당분간 표국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곽천후나 능허, 허성에게 확실하게 정신 차리라고 하고.”

월야방이 청성표국을 노려 천무백의 배후를 어지럽힐 계획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천무백은 그리 걱정하진 않았다. 청성표국의 수가기문도는 살수가 감히 뛰어들 수 없고, 포진해 있는 인물들도 만만치 않다.

당장 능허와 곽천후 둘만 해도 내로라하며, 허성 역시 마찬가지.

거기에 장노를 비롯한 검종의 마인들도 스며들어 있으니 오히려 월야방은 제대로 전쟁을 치를 각오해야 하리라.

“알겠습니다, 도련님. 곧장 하남으로 전령을 출발시키겠습니다.”

“고맙소, 지부장.”

“아, 그리고 하남에서 때마침 도착했습니다. 저번에 준비해달라고 한 것이라고…….”

지부장은 그리 말하며 작은 함을 내밀었다.

“고맙소. 늦지 않게 왔군.”

천무백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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