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34화>
234. 밥 먹을 땐 개도……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이 어디 세 명이나 있냐? 뭘 그리 불러 대.”
천무백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점박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와 코앞에서 멈췄다.
“또 강호에 나가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뭘 새삼스럽게. 계속 집에 있을 줄 알았냐?”
“굳이 위험하게 계속 강호로 가야 합니까. 이곳에서 도련님에 관한 들려오는 소문만 들어도, 심장이 매번 철렁합니다. 저도 이럴진데 부국주님이나 국주님은 오죽 하겠습니까.”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저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점박이가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광경은 퍽 웃겼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속에 담긴 따뜻함이 절절하게 느껴졌으니까. 누군가 걱정해 준다는 건 의외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큰 힘이 된다.
‘괜히 무공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경지가 높아질수록 도 닦는다고 하는 게 아니지.’
이제 천무백의 경지는 단순히 내공을 늘려서 상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대다수가 입신지경이 무인으로서 닿을 수 있는 한계라 생각하나, 그보다 더 높은 경지가 바로 절세지경이며 한 세대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만이 오를 수 있는 경지.
절세지경이라는 고강한 경지에 이르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된다.
무수한 삶을 살아온 강철 같은 정신력의 천무백이어도, 늘 철혈간담의 사내는 아니다.
신이 아니라면 온갖 번뇌와 심마는 평생 싸우고, 극복하고, 좌절하는 것이니까.
그만큼 지고한 경지이며, 천하의 천무백도 심기일전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위치였다.
점박이를 비롯한 가족의 걱정과 따뜻한 애정은 천무백에게 큰 힘이 된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큰일 아니니.”
“큰일이 아니라니요. 강호에 큰일이 아닌 일이 있겠습니까. 저는 도련님이…… 이렇게 헌앙해지셔서 장부가 되신 것도 좋지만, 가끔은 집안에서 한량처럼 악기나 뜯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어째 검을 배우기 전에는 한량 같았다고 욕하는 거 같다?”
“아이고, 도련님. 그런 말씀이 아니신 거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날도 좋은 날, 또 떠나신다 하니…….”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점박이가 움찔했다.
“이놈 봐라.”
“왜, 왜 그러십니까요.”
“혹여 내가 늦게 돌아와서 혼례식 치르는 거 늦어질까 봐 그러냐?”
그러자 점박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내심 천무백을 동생처럼 여기던 점박이는 오히려 순수해서 더 어린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천무백이 혀를 쯧쯧 찼다.
제갈설아도 시녀인 유아와 대화를 나눠서 점박이와 둘이 서로 호감을 품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두 명의 혼례를 올려 주기로 한 터.
“쯧. 알고 보니 날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네 녀석 혼례식이 늦어질까 봐서 염려한 거였어?”
“아니, 도련님. 그, 그, 그게 아닙니다.”
“아하. 제갈 소저랑 같이 강호로 떠난다니까, 혹시 유아도 같이 가는 줄 알고 날 원망했던 거냐?”
“아, 아닙니다! 도련님!”
점박이가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천무백이 말없이 웃고만 있자, 그제야 자신을 놀린 걸 깨달은 점박이의 눈이 늘어졌다.
“유아는 표국에 두고 간다. 이번에는 빨리 가야 하니, 제갈 소저랑 둘이서만 출발한다.
그러자 점박이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애써 표정관리하려는 게 보였지만, 의미 없었다. 천무백은 감정을 엿보는 선안을 가졌으니까.
“표사들은 안 데려가도 되겠느냐?”
그때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무백의 고개가 돌아갔다. 천문경과 천유하였다.
천무백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표국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표사 한 명, 한 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가 굳이 데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천문경이 다소 표정을 굳혔다.
“표국의 일도 중요하나, 그건 나와 유하의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있다. 너의 안위만큼 중요하겠느냐.”
“무백아. 음, 그러면 곽 표사라도 데리고 가는 게 어때?”
천무백은 천유하의 조심스러운 말에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곽천후를 데리고 갈까 생각하기도 했다.
곽용의 아들이기도 했고, 젊은 후기지수의 대표적인 인물이니까.
사실 그리도 착한 제갈설아가 어쩐지 이번만큼은 안 된다는 듯이 강렬하게 거부했으니, 어쩌겠는가.
더구나 곽천후를 데리고 가기엔 조금 여의치 않는 점도 있다.
“제가 데리고 가면 누님이 적적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니!”
순간 천유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표국의 일을 척척 지휘하던 여장부답지 않게,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했다.
옆에 있던 천문경이 껄껄 웃었다.
“이거야 원, 딸아이는 정의맹주의 아이와 연을 맺고 있고, 막내 아들놈은 제갈세가의 금지옥엽과 연을 맺으니. 세상에 나만 한 장인어른과 시아버지가 있겠느냐.”
“…….”
순간 천유하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천문경이었지만, 한 표국의 수장답게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허허허허허……. 자식 농사는 참 잘 지었어. 참.”
* * *
“쉬고 갑시다.”
“흐으으.”
천무백의 말에 제갈설아는 대답하지도 못하고 이상한 신음성을 내뱉었다.
흐물거리며 말에서 내리는 제갈설아의 모습에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소?”
“안 괜찮은 것 같아요. 우리 이틀도 안 되어서 호북성에 접어든 거 아세요?”
제갈설아가 몸서리를 쳤다.
사실 제갈설아는 표국을 나서면서 꽤 긴장도 하고, 기대도 했다.
하지만 기대는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틀 밤동안 하남을 벗어나 호북성에 접어든 것이다.
청성표국 분타에서 말을 갈아타면서 내달리니, 꾸준히 수련한 제갈설아도 허벅지가 아팠다.
“제가 말을 못 타는 건 아닌데도, 마치 처음 타는 것처럼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울상을 짓는 제갈설아에게 천무백이 살짝 웃었다.
“앉아서 쉬시오.”
천무백은 능숙하게 잘 마른 장작을 모은 뒤 불을 피웠다.
빤히 바라보던 제갈설아는 새삼 감탄했다.
“무슨 불을 삼매진화로 태워요?”
“부싯돌 부딪치는 것보다 편하오.”
“제가 생각하는 상식과 달라서 당혹스럽네요.”
“상식만으로 세상이 굴러가진 않소.”
“가끔 느끼는 거지만, 강호나 세상 이야기를 할 땐 공자님은 저보다 수배는 더 산 노인 같아요.”
“그런 말 자주 듣소.”
“으으. 어떻게 그렇게 세상사며 강호의 생리까지 잘 아는 거죠? 저보다 늦게 출두하셨으면서.”
제갈설아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사뿐 걸었다.
천무백은 흘깃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천성인가보오.”
“강호가 천성이라니. 그런 사람은 처음 봤어요.”
“강호가 싫소?”
“딱히 좋진 않아요. 머리 쓸 데가 많잖아요.”
“머리 똑똑한 소저도 머리 쓰는 건 싫은가보오.”
“똑똑하다고 칭찬해주는 거예요?”
“자주 듣는 칭찬 아니오?”
제갈설아가 헤-하고 혀를 짧게 내밀었다.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오히려 똑똑하단 칭찬을 안 해주거든요. 똑똑한 사람한테 들으니 더 기분 좋네요.”
“그냥 칭찬이 다 좋은 거 같은데…….”
“공자님은 강호가 좋아요?”
그러자 천무백이 일순 침묵했다. 사뿐사뿐 걸으며 주위의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줍던 제갈설아는 한참 답변이 없자 고개를 돌려 천무백을 쳐다봤다.
‘아…….’
제갈설아는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늦가을이 끝나가고 초겨울에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주위로 흩날리는 낙엽 아래에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천무백의 얼굴이 유난히 선명하게 비쳤다.
지고 있는 노을빛이 새하얀 피부에 번지면서, 날카로운 콧대와 턱선을 타고 깎이듯이 흘러내린다.
제갈설아는 새삼 얼굴을 붉혔다.
“잘생겼다.”
“갑자기 뜬금없는 칭찬이지만 고맙소.”
“힉!”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곧장 천무백이 반응하자 제갈설아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예요. 한참 생각에 빠지신 것 같더니.”
“생각에 빠져도 귀는 열려 있지. 자고로 무인이라면 늘 오감을 예민하게 단련하니 말이오.”
“으으. 그냥 중얼거린 거로 생각하고, 귓등으로 흘려들으세요.”
“그럴 수가 있나. 소저에게 처음 듣는 칭찬인데.”
“……!”
“똑똑한 사람에게 똑똑하다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 그런 칭찬을 들으니 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순간 제갈설아는 헛숨을 들이켰다. 천무백의 빙글거리는 웃음에 제갈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천무백이 자신을 대하는 건 처음인지라, 머릿속이 순간 아득해졌다.
천무백이 주섬주섬 가벼운 식사를 위해 화로를 올리면서 그저 가볍게 웃었다.
‘참. 이렇게 보면 재미있는 아가씨야.’
사실 천무백도 이쯤 되면 제갈설아와 어느 정도 많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가족처럼 투덕거리는 능허와 더불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셈이니까. 아무리 인간관계에 있어서 조금은 냉정한 천무백이어도, 정이 들 수밖에 없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천무백이 화로에다 간단한 식사를 만들고, 차를 우릴 물을 끓이는 동안, 겨우 정신을 차린 제갈설아가 쭈뼛거리며 움직였다.
“뭐 하시는 것이오?”
“그, 간단한 기문둔진 하나 만들려구요.”
“기문둔진?”
“여길 숨기고, 혹여 누가 접근하면 경고해 주는 진이요.”
천무백은 내심 감탄했다.
말은 저리 간단하게 하지만, 사실 평범한 진법이 아니다.
더구나 아무런 도구 없이, 제갈설아는 나뭇가지와 돌멩이 몇 개만으로 해내고 있었다.
무공에는 다소 약한 감이 있지만, 과연 수가기문도를 만들었던 위인다운 실력이었다.
“밤새 잠도 못 자고 불침번을 설 수는 없잖아요. 공자님이나 저도 종일 말만 달려서 피곤한데.”
“하긴. 여기서 같이 자고 가야겠구려. 날도 어두워지니.”
“같이요?”
“……?”
“아, 아니에요.”
제갈설아는 고개를 홱 돌려 진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천무백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검종이 계획대로만 혈귀곡에 녹아들어야 할 텐데.’
천무백이 나서서 계획을 전두지휘하고 싶었지만, 정의맹 일도 급한지라 장노에게 맡기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장노였기에 믿고 맡긴 것이다.
비단 장노뿐이 아니다.
‘능허 녀석도 표국에 있으니.’
천무백의 행동을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능허였으니, 장노가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더구나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곽천후도 있지 않은가.
천무백의 목적은 간단했다.
검종을 혈귀곡에 침투시키는 것.
그리고 마류칠종의 하나로 세력을 구축시키는 것.
내부에 잠입한 적이 무서운 이유는 분명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칼을 거꾸로 쥐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지.’
혹여 검종의 배반을 우려할 수도 있다.
능허가 그 점을 염려했었다.
하나 천무백은 단언컨대 그런 걱정은 접어 둬도 된다고 생각했다.
‘무인에게 무공을 미끼로 삼은 게 미안하긴 하지만, 확실한 성능이지.’
천무백은 성심성의껏 검종 마인들의 무공을 손봐줬다.
실전되고, 왜곡된 내용들을 새로 제대로 잡아 줬다.
오로지 천무백만이 가능했다.
패천검마 본인이었으니까.
천무백의 손길에 단숨에 검종 마인들의 경지는 향상됐다.
그들에게 천무백은 단순히 믿고 따를 상관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은인이었다.
더구나 천무백은 모든 걸 전수하지 않았다.
아예 검종에서 완전히 실전되어 사라져 버린 패천검마의 절세무공 역시 존재했고, 이걸 넌지시 밝혔다. 검종 사이에선 잊힌 무공을 익힐 수 있단 희망 하나만으로, 검종은 천무백을 배반하지 않으리라.
검종 역시 나머지 종단들에게 철저하게 핍박받았으니, 복수심에 불타고 있기도 했으니까.
거기까지 상념이 닿았을 때, 제갈설아가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흐아. 다 끝났어요.”
“고생하셨소. 우선 따뜻한 차로 몸이라도 녹이시오.”
“와. 차도 우렸어요?”
“누님과 아버지가 이것저것 많이 챙겨 주셨더군.”
날이 어두워지니 추위가 금세 찾아왔다. 따뜻한 차를 홀짝이는 제갈설아의 눈이 반달처럼 호선을 그렸다.
조용한 가운데 가볍게 서로 차를 나누고, 천무백은 화로에 끓이던 음식을 천천히 덜어줬다.
제갈설아는 그 광경을 그저 가만히 쳐다봤다.
‘어쩐지…… 좀 낭만적인 것 같은데.’
이제야 둘만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다가온 제갈설아는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몸을 떤 게 단순히 둘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신경을 찌르르 울리는 전율.
‘진법에 누가 접근했다!’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천무백을 쳐다봤다.
하나 이미 천무백은 기척을 느꼈는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천무백의 시선이 수풀 너머, 흐릿한 인영들의 그림자에 닿았다.
“어느 놈들이 식사를 방해해?”
“…….”
천무백의 안광이 어둠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