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33화>
233. 마음을 손아귀에 넣는 남자
“그러니까, 혈귀곡과 손을 잡으라는 말씀입니까?”
장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는 사실상 주군이 된 천무백의 첫 지시부터 곧장 납득하기 어려워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장노.”
특별히 더 부연설명은 없었다.
장노는 잠시 그런 천무백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장노 정도 되는 노강호라면, 천무백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도련님은 마도 내부에 우릴 심으실 생각이군요.”
“그렇소.”
“위험할 겁니다.”
“그것도 그렇소.”
“……발각된다면 검종은 사라질 겁니다.”
“그것도 그렇소.”
“……따르겠습니다.”
“좋소.”
천무백이 씩 웃었다.
사실 위험한 일이다.
검종을 감시하던 세작들이 전부 죽었다.
이 사실은 곧 혈귀곡에 전해졌을 터.
이런데 검종이 혈귀곡과 손을 잡는다고 하면, 분명 의심할 게 틀림없다.
더구나 조금만 조사하면 하남성에 천룡검협이 있다는 사실도 전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검종이 마도를 배반하고 천룡검협과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 트는 건 당연했다.
장노는 굳은 얼굴로 받아들였다.
이미 뜻에 따르기로 했으니, 무슨 반론이 필요한가.
위험한 일 없이 달콤한 과실은 없는 법이니까. 다행히도 천무백은 위험을 충분히 예지했다.
“혈귀곡에선 배반을 의심하되, 확신은 할 수 없을 거요.”
“음…….”
“적어도 저들에게 천룡검협은 그런 존재거든.”
“그런 존재라 하심은……?”
“마도를 절대 용서치 않는 존재로 여기고 있으니까 말이오.”
“아…….”
하긴 그랬다.
천룡검협의 행적을 뜯어보면, 아무리 봐도 마도에게 지독한 혐오감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듯이 행동하지 않는가.
혈귀곡으로서도 검종이 배반해서 천룡검협과 손을 잡았다는 건, 사실 의심하기도 어렵기도 했다.
“더구나 혈귀곡이 검종에게 손을 내민 건, 분명 그 세력이 필요함이겠지.”
“그렇습니다.”
“혈귀곡의 세력은 적어도 절반으로 쪼그라들었소.”
“세력이 줄어들었으니, 검종으로서 세력을 다시 복구시키겠단 의도란 말씀입니까?”
“일단은 그렇지만…….”
천무백은 말끝을 흐렸다.
만일 그랬다면, 진즉 검종을 찾지 않았을까.
천무백은 마류칠종의 성정과 그들의 역사를 잘 알았다.
마도천하를 위해 협력하지만, 사실 내부에서는 서로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족속들이다.
‘전쟁을 위해서는 결국 세력이 필요하지. 숫자가 많고 힘이 강해서 마도 내에서도 발언권이 강해지는 법. 혈귀곡이 검종의 세력을 갑자기 원하는 건, 갑자기 세력을 늘려야할 필요성을 느낀 거다.’
과연 그 필요성이 무엇일까. 천무백은 어렵지 않게 추론해 냈다.
‘다른 마류칠종의 종단들 앞에서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겠지.’
암종과 혈종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종단.
그리고 그 종단들은 모두 새외에 있다.
지금까지는 서로 활동하는 무대가 달랐지만, 혈귀곡이 검종을 원하는 데에서 천무백은 충분히 짐작했다.
‘새외의 마도세력이 중원으로 오는가…….’
그러니 혈귀곡은 억지로라도 세력을 늘릴 필요성을 절감하리라.
거기까지 추론한 천무백은, 이번 기회에 혈귀곡 내부에 힘을 투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코자했다.
바로 검종이다.
“그래도 위험한 일이겠지. 검종이 마도에서 기존에 받던 취급을 생각하면 말이오.”
“이미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설령 도련님을 거부하고 혈귀곡과 연수했더라도, 그들은 완전한 믿음을 주지 않았겠지요.”
“믿음은 주지 않더라도, 그대들을 대우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드리겠소.”
“예?”
의아해하는 장노를 보며 천무백이 씩 웃었다.
“그대들이 이은 검마의 마공은 다소 부족한 점이 많더군.”
순간 장노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무백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혈귀곡이 의심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검종을 중용할 수밖에 만드는 것.
간단했다.
검종이 쓸모가 있음을 입증하면 됐다.
바로 압도적인 강함이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란 걸 증명하면 그만이다.
장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워낙 많은 시간이 흘러서겠지. 이리저리 치이고, 도망 다니면서, 무맥이 끊기고 지워지고 사라졌겠지. 이어져 오는 것도 왜곡된 내용들로 가득할 것이고.”
천무백의 지적은 정확했다.
‘초창기 검종은 강력했다. 단숨에 마류칠종의 하나가 됐으며, 다른 종단들이 모두 경계했을 정도로.’
비단 패천검마의 어마어마한 위력 덕분이 아니다.
만일 패천검마 한 명에게만 의지했다면, 천마가 죽은 후 모든 종단이 힘을 합쳐 검종을 몰아내려고 했겠는가.
그만큼 검종의 힘은 컸다.
한데 지금은 아니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숫자가 줄어들고 세력이 쪼그라든 게 아니다.
무맥이 끊겼고 사라졌다. 검종 초창기의 강력했던 무공이 실전되고, 전해져 오는 것들도 하나같이 왜곡됐다.
천무백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떨리는 시선을 느끼며 천무백은 가볍게 웃었다.
“검종이 근본을 되찾는 날, 마류칠종 중 유일하고도 완전한 마도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될 것이오.”
순간, 장노는 가슴이 설렜다.
그의 재능과 뛰어난 오성을 고려하면, 처음 검종에 투신했을 때 스승은 능히 입신지경을 논할 기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평생을 수련해도 절정이 한계였다.
그 한계가 어디에서 오는지 장노는 잘 알았다.
‘무공…….’
시간이 흘러 여러모로 실전되고 왜곡된 무공은 자체가 한계였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한데 천무백이 말했다.
그가 어떻게 검마의 무공을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장노의 가슴이, 젊은 시절처럼 강렬하게 뛰는 이유가 중요했다.
지금껏 숨겨져 온 마인으로서 강자에 대한 동경, 그리고 무인으로서 끓어오르는 혈기.
비단 이건 장노뿐만이 아니라 검종의 나머지 마인들에게도 동일한 마음이리라.
장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복했다.
“도련님, 아니,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천무백이 웃었다.
장노를 포함한 검종의 마인 세력.
그들의 마음마저 천무백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 * *
천무백이 검종의 무공을 손봐 주면서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이른 아침부터 제갈설아가 찾아왔다.
“정의맹에서 연락이 왔어요.”
조금은 심각한 제갈설아의 표정에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희고 투명한 피부 너머로 아연한 기색이 역력했다.
“썩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구려.”
“공격을 받았대요.”
“혈귀곡이오?”
“네.”
검종의 마인들을 물밑으로 포섭하려던 걸 제외하면 그간 조용했던 혈귀곡의 갑작스런 행적에 천무백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정확히는 정의맹에 가입한 중소문파에 대해 습격이 이뤄졌어요.”
이어 제갈설아가 나열한 문파에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통점이 있구려.”
“그쵸? 다 비교적 백인 이하의 작은 문파이면서…….”
“최근에 정의맹에 입맹한 문파군.”
“맞아요.”
“정의맹의 대응은?”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고, 동시에 무려 19개 문파를 반쯤 멸문시키고 빠져나가서 지금 추적하는 중이래요.”
“골치 아프군.”
혈귀곡의 의도가 알 만했다.
흑회의 출범과 강호에 직면한 혈귀곡의 위협에 작은 중소문파들이 정의맹에 입맹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정의맹의 울타리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겠다는 것.
한데 입맹한 지 얼마 안 된 소규모 문파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당했다면, 정파의 새로운 울타리를 자처하는 정의맹의 처지가 난처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정의맹도 아직 제대로 체계가 완벽하게 잡힌 건 아니란 말이죠. 지금 내부에서는 당장 큰 싸움을 벌이자는 젊은 무사들의 반발도 심하고…….”
제갈설아가 말끝을 흐리자 천무백은 그제야 이야기를 거론한 이유가 따로 있음을 눈치챘다.
“날 빨리 데려오라고 쓰여 있소?”
“으음. 아무래도 젊은 무사들과의 갈등이 더 심한가 봐요.”
“하긴, 습격을 당했으니 대대적인 반격을 하자는 게 주의견일 것 같은데.”
“맞아요. 하지만 아버지를 비롯해서 각 문파의 수장들은 신중하시고요. 아직 혈귀곡의 세력파악도 다 이뤄지지 않은 상태니까요.”
“날 데려오라고 재촉하는 걸 보니, 단순한 갈등으로 보이지는 않구려.”
천무백이 그리 말하자 제갈설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천 공자님은 이런 쪽에선 눈치가 정말 빠르시네요.”
“이런 쪽?”
“무림의 일 말이에요. 다른 데는 이상하게 답답하면서…….”
“다른 데?”
“아니에요. 여하튼, 공자님 말이 맞아요. 젊은 무사들이 단독으로 행동하다가 오히려 마인들에게 참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대요.”
“젊은 혈기군.”
천무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정의맹의 신조는 지금껏 만들어진 정파 연맹과는 다소 다르다.
정파들의 힘을 모아 강호의 평화와 이권을 추구한다는 건 공통되지만, 정의맹은 그중에서도 딱 집어서 마도에 대항한다는 항마(降魔)의 의지를 천명했다.
더구나 천무백이 본격적으로 혈귀곡과 전쟁을 벌이면서, 그 여파가 강호 전체에 퍼져나갔다.
혈귀곡이 더 숨지 않고 마각을 드러내면서, 휘말리는 문파들이 생긴 것이다.
과정에서 피해를 받는 문파가 많아졌고, 자연 문파의 젊은 무사들이 항마의 기치를 내건 정의맹에 몸을 던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이들에게 40년 전의 정마대전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조부나 아버지가 정마대전 때의 싸우거나 그 겁화에서 살아남았으니 어린 시절부터 정마대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하니 마도에 대한 적개심은 어느 때보다 뚜렷했다. 또 경험하지 못한 정마대전의 참상은 오히려 겪지 못한 젊은 무인들에게 호승심을 끓게 했다. 수많은 영웅의 이야기도 했으니까.
젊은 혈기와 무사 특유의 공명심까지 합쳐진 상황.
정의맹에서 통제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보아하니 젊은 무사들의 단독행동이 점점 커지는 것 같소.”
“맞아요. 따로 자기네끼리 맹 내에서 사조직을 결성해서 혈귀곡과 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대요.”
“이거야 원.”
이런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정의맹은 천무백을 꼽은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있을 줄 알았지만, 소저에게 서찰이 온 걸 보니 더 심각해 보이오.”
“바로 가실 건가요?”
“능허 놈의 애기가 능허 닮지 않은 걸 보고 안심하고 가려 했는데, 그건 어렵게 됐군.”
“설영 언니를 닮았을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겠소.”
천무백의 가벼운 농담에 심각한 분위기가 희석되는 느낌이었다.
제갈설아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럼 능허 아저씨는 못 가겠네요?”
“지금 상황에서 데리고 가면, 내가 온갖 욕은 다 먹겠지. 특히 설영이한테.”
“그럼 빨리 출발할 수 있겠네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요.”
어쩐지 제갈설아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떠올랐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능허 아저씨가 같이 못 가면, 둘이서 가는 거잖아?’
하남에서 중경까지는 거리가 제법 된다.
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도 풍찬노숙을 피할 길이 없다.
평소 같으면 끔찍한 일이라고 고개를 내젓겠지만, 제갈설아는 흘끔 천무백을 쳐다봤다.
둘이다.
능허 빼고. 단둘이.
새삼스러운 사실에 제갈설아의 가슴이 콩닥 뛰었다.
“그럼 언제쯤 출발하는 게 낫겠소?”
“그야 지금 당장이라도……!”
“당장?”
“어, 음. 간단한 준비만 끝내고 가급적 빨리 출발해야겠죠?”
제갈설아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나 광대가 씰룩이는 건 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