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32화>
232. 놈을 잡아야겠다
커다란 충격이 좌중을 강타했다.
검마란 이름은 지금껏 제법 많은 이에게 붙여진 별호다.
마인 중에 검으로써 경지에 오른 자는 충분히 많았으니까.
하나 패천(敗天)이 붙은 이는 유일했다.
“패천검마…….”
떨리는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검종의 창시자이자, 영원불멸의 종주, 패천검마.
패천이 담긴 의미는 컸다.
말 그대로 하늘을 깨뜨리다.
‘마도의 하늘을 죽인 유일한 마도의 인물.’
검마는 천마를 격살했다. 마도인들에게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하늘을 처참하게 부수고 으스러뜨렸다.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마도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이 남았다.
‘천마가 목숨을 구걸했었지.’
역사에 남은 최악의 굴욕은 일종의 멍에였다.
검종을 제외한 다른 종단, 특히 그중 하나.
지금껏 계속해서 천마를 배출해 낸 마류칠종의 진정한 마(魔).
마도의 씨앗이 발아하던 시절부터 유일한 종단으로 존재해 왔던 마종(魔宗)에서 그토록 없애고 싶어 하는 굴욕의 역사.
천마가 목숨을 구걸해 가며 바닥을 기었다는 일화는 명백한 진실이다.
오죽하면 수백 년의 세월이 훨씬 지났는데도, 그때의 원한을 잊지 못해 검종의 모든 마인이 배신자가 되었겠는가.
패천이란 그런 의미다.
마도의 하늘을 부수는 것.
한데 향주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패천의 의미를 똑바로 봤다.
스스로를 현 시대의 패천이라 부르는 자.
참으로 광오하고 오만한 자.
‘천마를 죽인다.’
그 누가 그토록 가공할 목표를 세운단 말인가. 감히 누가 그런 선언을 한단 말인가.
40년 전, 역대 최강으로 불리는 고금 제일인인 창천검신도 실패한 천마의 격살이라니.
만일 정말 그러한 목표로 삼고, 거침없이 정진해 나가고 있다면.
‘그 누구보다 패천이란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존재일 터.’
작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정면의 천무백에게 닿았다.
그가 검마는 아니다.
그가 검종의 마인은 아니다.
그러나 작산은 불현 듯, 비어 있는 검종의 종주자리에 천무백이 오연하게 앉은 모습이 상상됐다.
전혀 무공의 궤를 달리하는 정파의 협객.
강호에서 찬란하게 떠오르는 별.
작금의 패천을 논하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느낀 건 비단 작산뿐만이 아니다.
좌중의 모든 이가 공감했다.
검종도 마도의 한 축.
강자를 존중하는 강자존의 세계에서, 누구도 범접 못할 무력과 자신감을 내비치는 천무백을 깊게 흠모하는 감정이 싹텄다.
작산이 결심한 듯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했다.
“검종의 향주 작산,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머지 이들도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똑같은 포권을 취했다.
천무백은 그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다행히 이중에는 혈귀곡의 세작이 더 없군.”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 향주들이 흠칫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닿았다.
향주들은 침음성을 삼켰다.
두천의 인피면구를 찬 세작의 시신.
“암종이라니…….”
작산이 신음을 흘렸다.
암종.
마류칠종 중 가장 껄끄러운 상대. 온갖 계략과 중상모략에 능해 사실상 검종을 가장 앞서 핍박하던 이들.
“우릴 믿지 못했던 거였군.”
서문적의 목소리가 유난히 가라앉았다.
충격적이다. 두천의 인피면구를 한 채로 숨어들다니.
저 인피면구가 결국 두천을 죽였다는 의미니까.
“만일 우리가 혈귀곡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모조리 죽이려고 했겠군.”
“그럴 거요. 때마침 여기저기 도망치던 검종이 다 모였으니, 아예 한자리에서 치울 수 있으리라고 여겼겠지.”
“맞아. 수락하면 정파와 싸울 화살받이가 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이 모인 자리에서 삭초제근할 속셈이었겠지.”
“잠깐. 삭초제근?”
작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문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작 사형. 암종 놈들이 뱀 같은 놈들인 거 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놈들은 여차하면 우릴 모두 죽이고도 남을 놈들이죠.”
“아니, 생각해 보아라, 서문 아우! 고작 두천의 인피면구를 쓴 한 놈이 우릴 다 죽일 수 있었겠느냐?”
“그야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형님도 한가락 하고 나도…… 어?”
그제야 이상한 점을 발견한 서문적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이 틀어져서 다 해치울 생각이었다면, 두천으로 위장한 한 놈만 있을 리가 없다.
혼자서 나머지 여덟 명을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니까.
그 말인즉슨…….
작산이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뒤를 밟혔다!”
작산의 말뜻을 깨달은 향주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 상태가 어떠한가.
천무백을 상대로 겨루느라 모든 진력을 소진한 터.
만일 이 상태에서 습격을 받는다면 영락없이 당하고 만다.
향주들 사이 격렬한 위기감이 맴돌았다. 하나 그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미 다 해결됐소.”
묵직한 음성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경악과 두려움을 안겨 주던 목소리였건만, 어쩐지 지금은 묘하게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정리됐소. 뒤를 밟은 쥐새끼들 말이지.”
“……!”
향주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천무백의 태도와 어조가 너무 태연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기다렸다는 듯한 어조.
당연한 일을 처리했다는 것 같은 표정과 말은 다급하게 느껴지던 위기감을 단숨에 해소시켜줬다.
“지금 정리했다는 말은…….”
“아! 밖을 지키던 그 삼인의 무사!”
“아아!”
감탄을 터뜨리는 좌중을 보며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사실 천무백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혈귀곡의 주축 세력이 암종이면, 하는 짓도 뻔히 예측되지.’
그들에게 검종은 계륵이다.
같은 편으로 세우기에도 껄끄럽다. 다른 종단끼리도 사이가 썩 좋지 않아 갈등이 자주 일어나는데, 하물며 배신자로 낙인찍힌 검종은 어떠하겠는가.
그렇다고 내버려 두긴 아까운 세력이다. 비록 쪼그라든 세력이지만, 한때는 마도를 휘몰아쳤던 거대 세력이다. 근본이 어디 가지는 않는 법이다.
‘그러니 해결하려 했겠지. 같은 편이 되면 화살받이로 내몰 테고, 만일 거부한다면 이참에 안 그래도 껄끄럽던 놈들 정리할 속셈이었겠지.’
큰 싸움을 앞두고 뒤에 적을 내버려 두지 않는 법.
기본적인 전략이다.
암종이라면 그 정도 생각은 충분히 한다.
‘당장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천무백의 냉막한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바라보던 향주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실제로 천무백도 여차하면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이들이 당장 혈귀곡에게 넘어가면, 천무백이 그간 강호를 주유하며 혈귀곡 세력을 쪼그라들게 만든 게 허사가 되니까.
하면 모두 모였을 때 차라리 제거할 꿍꿍이를 품었던 것이다.
물론 차선이었다.
최선은 이들을 천무백의 편으로 만드는 것.
‘그러려면…….’
확실한 열매를 제공해 줘야 한다.
완전하고도 유일한 마도로서의 정체성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당장 크게 체감되는 사항은 아닐 터.
‘완전히 내 세력으로 삼아야겠어.’
이들의 마음까지 수중에 넣을 방법을 떠올린 천무백은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목전에 닥친 일부터 해결했다.
여하튼 천무백은 치밀한 계산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
“능허 이놈이 한두 명 목숨은 붙여 놨으면 좋겠군.”
천무백이 그리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허어…….”
“이, 무슨……!”
문을 열자 코를 확 찌르는 혈향과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에 모두 신음성을 내뱉었다.
바닥에 널부러진 시체들.
하나같이 복면을 쓰고 있는 시신에서 느껴지는 마공의 흔적에 침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장노와 작산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종에서 가장 실력자인 두 명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암종이군.”
“놈들이야.”
은은하게 남아 있는 마공의 흔적.
암종의 마공이 틀림없었다. 잔뜩 굳어진 그들의 표정 너머로 놀라움이 번졌다.
노회한 작산은 시체에 남은 상처를 보고 침음을 삼켰다.
‘치명상이로다.’
시체들에 남은 상처를 보면 하나같이 치명상이었다.
단칼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장소에 깊고, 정확하게 검상이 남아 있었다.
한데 각자 흔적이 다 달랐다.
어느 것은 매화향이 희미하게 남았고, 또는 깊숙이 관통될 정도로 완벽한 찌르기였거나, 그도 아니면 깔끔한 검격으로 베인 사흔들.
작산이 떨리는 눈빛으로 피칠갑을 한 삼인을 바라봤다.
그중 외눈의 무인이 걸어 나오며 보고했다.
능허였다.
“숨어서 지켜보던 놈들 싹 다 처리했습니다.”
“다 죽였냐?”
천무백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크. 그렇습니다. 저도 이제 제법 하죠? 그쵸? 이놈들. 옛날 같았으면 끙끙대면서 칼 피하느라 죽었을 텐데. 곽천후 저놈이 잡은 게 여덟인데, 제가 일곱입니다. 고작 하나 차이에요.”
“…….”
“저기 허 표사는 네 명 잡았답니다. 흐흐흐. 이 독안사 능허, 이제 꽤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 죽였다고?”
“그럼요. 다 죽였죠.”
능허가 당당하게 말했다. 마치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 뿌듯한 얼굴이다. 하긴 그럴 것이다. 비슷한 실력자였던 허성보다 훨씬 앞섰고, 늘 높아 보이던 곽천후와 비등해졌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하나도 안 내버려 두고?”
되묻는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내버려 둡니까. 흐흐. 급하게 도망치던 놈까지 제가 아주 끝까지 쫓아가서 작살냈습니다.”
“…….”
“뿐입니까? 살려만 달라고 빌던 놈도 깨끗이 정리했죠. 흐흐.”
“…….”
“잘했죠?”
“……그래.”
그때였다.
“한 놈 숨은 붙여 놨습니다.”
지켜보던 허성이 다가와 묵묵히 보고했다.
그 말에 천무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허 표사, 그대가 저 미련한 놈보다 훨씬 낫군.”
“…….”
능허의 얼굴이 소태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 * *
파르르!
혈귀곡 내부에서는 이성(二星)이라 불리며, 전 세대의 강호인들에게는 귀마(鬼魔)라 불리는 대마인.
그가 흉신악살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검종의 회합에 따라간 마영대 애들만 스무 명인데, 모두 연락이 끊겼다. 이 보고를 믿으란 말인가?”
마영대는 암종의 마인들로만 이뤄진 타격대.
혈귀곡 내부에서도 암종과 혈종의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암종의 마인들로만 이뤄진 마영대에서 스무 명이 당했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지금처럼 혈귀곡의 세력 자체가 쪼그라든 상황에선 더욱이.
“이 보고가 진짜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귀마는 이를 악물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검종이 그 정도란 말인가?”
“저,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최근 하남성에 천룡검협이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
순간 귀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듣기만 해도 속이 거북한 이름에 귀마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천룡검협.
혈귀곡의 대적이 하남성에 돌아왔다.
그리고 하남에서 열리는 검종의 회합을 따라갔던 적혈대와 모든 연락이 끊겼다.
참으로 공교로운 상황이 아닌가?
“검종이 배반했다고?”
“저는 사실만 보고 드릴 뿐입니다.”
“으음…….”
귀마가 침음성을 삼켰다.
“독마를 죽인 놈이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접할 때, 귀마는 반쯤 정신이 나가는 듯했다.
독마라면 자신과 함께 정마대전 때 싸웠던 동급의 마인.
그가 고작 애송이한테 죽었다.
이 순간부터, 귀마는 천룡겁협을 단순한 애송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창천검신에 이어 또 한 번 마도천하를 막아서는 빌어먹을 놈.’
귀마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곧 새외의 종단들이 강호로 올 것이다. 무리해서 검종을 포섭하려던 이유도 쪼그라든 혈귀곡의 세력을 증강해야, 차후 있을 전쟁에서 우리의 입지도 커질 터. 천룡검협 그놈이 끝내 이 모든 일을 망치고 있구나!”
그리 한탄한 귀마의 눈에서 시퍼런 귀화가 타올랐다.
“놈을 잡아야겠다.”
순간 폭발적인 살기가 그로부터 흘러나왔다.
귀마의 안광이 번뜩였다.
“천룡검협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