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31화>
231. 패천이다
침묵 속에 경악이 번졌다. 크게 부릅떠진 눈동자에 어린 건 공포였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가라앉은 가운데, 누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유일한…… 종단.’
천무백의 말은 복잡하지 않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하나 알아듣기 쉬운 것과 납득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생각을 아무리 달리한다고 해도, 저런 발상이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마류칠종이 어째서 마류칠종인가.
마도를 대표하는 강력한 힘.
그 모든 걸 없애버리고 검종만 오롯이 세우겠다?
놀란 건 향주들뿐 아니라, 장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득.
‘이런 식으로 설득을 하다니…….’
천무백은 분명 설득이라고 표현했다.
설득의 요체는 간단하다.
무엇을 내줄 수 있느냐.
혈귀곡은 검종에게 마류칠종의 자리를 약속하며, 완전한 마인이라는 열매를 건넸다.
만일 장노가 천무백을 모시지 않았다면, 장노 역시 수락했을 정도로 검종에게 운명을 판가름할 결정적인 열매다.
과연 그것보다 더 좋은 걸 제시하면서 설득할 수 있을까?
장노는 우려스러웠다.
설득은 핑계고, 결국엔 검종을 한데 모아 두고 모조리 없애버릴 생각이 아닐까.
연화루 밖을 지키는 삼인을 세워 둔 것도,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의도가 아닌가.
능허, 허성, 곽천후 셋이라면 이 아홉 명을 다 죽이진 못하더라도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물샐틈없이 막을 수 있으니까.
그리 여겼다.
한데 천무백은 예상치 못한 걸 내세웠다.
“마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절대불변의 명제.
천무백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단언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은 무림과 삶을 함께 해왔다.
‘내 손으로 연 무림이다.’
삼재검성으로 직접 열어젖힌 무림이다.
무림이 태동하고 마도가 일어섰다.
‘단 한 번도, 그 저주받을 이름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세력이 쪼그라들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은 있어도.
철저하게 짓밟혀 철저하게 숨은 적은 있어도.
마도는 늘 존재해 왔다.
‘그리고 매번 내 앞을 막았다.’
천무백의 눈빛이 기억 저편에 닿았다.
독마가 피를 토하며 죽어 갈 때 말했듯이, 마도가 웅비할 순간 천무백이 막았다.
특별히 천무백이 마도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시대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수많은 강자가 포진했으니까.
천무백이 전생마다 여러 번 짓밟고 불태웠음에도.
마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림이 열린 이래 바뀌지 않는 절대 명제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마류칠종이 아니라, 딱 하나만의 세력으로.
바로.
“검종만이 유일한 마도가 되는 세상. 그러면 검종이 유일하고도 완전한 마인이니,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오.”
“……!”
향주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슨 의미인지 이제 모두가 받아들였다.
“당, 당신과 손을 잡고 혈귀곡을 없애버리자는 것이오?”
“아니. 혈귀곡뿐이 아니지.”
“……?”
“혈귀곡은 고작 두 개 종단뿐이지. 나머지 종단은 새외에 있고.”
“헉!”
작산을 비롯한 향주들은 위장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혈귀곡과 새외의 마도세력까지.
정말 마도의 전부를 없애버리자는 제안이 아닌가.
참으로 광오한 제안이다.
한데 놀라운 건, 어쩐지 허황된 소리라고만 느껴지지 않다는 점이다.
작산의 동공이 거세게 떨렸다.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지금 이 기세, 이 분위기, 저 지독함.
냉막한 눈빛 속에 담긴 강렬함까지.
어쩐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들 역시 잘 알았다.
강호에서 천룡검협의 행적을.
혈귀곡의 마인들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너졌다.
그것만으로도, 아니 혈귀곡이 다급해져서 핍박하던 검종에 손을 내민 사실만으로도 천무백의 위력과 진실한 힘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여섯 종단을 멸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스운 소리! 마도가 그리도 녹록해 보이는가, 천룡검협이여! 혈귀곡의 마인 몇을 제거했다고, 마류칠종의 진실한 힘이 그토록 우스워 보이는가! 그 대단한 창천검신도 완전히 멸하지 못한 마도의 힘을, 그대가 멸할 수 있다고 어찌도 그리 오만하게 단언하는가!”
향주 중 가장 막내인 서문적이 벌컥 소리쳤다.
절강에서 어부 일을 하지만, 당연히 중의적인 의미다.
그는 해적이었다.
거친 뱃사람의 성정이,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배포가 표면으로 드러났다.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패천검마의 검 중, 현류(眩流)를 이었군?”
“……!”
순간 향주들 모두 일제히 경악했다.
“어, 어찌…….”
기세 좋게 나섰던 서문적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패천검마의 검은 단순히 하나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수많은 검의 묘리가 담겼고, 묘리는 각각의 이름으로 검종에 전해졌다.
장노가 무류(無流)를 이었다면, 서문적은 현류(眩流)를 이었다.
향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에 있던 장노에게 향했다.
“대사형, 설마 검종의 무공까지 밝힌 것이오!”
그들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강호에서 아무도 모르는, 아니, 마도에서도 이제는 잊혀져서 모를 수밖에 없는 검종의 마공.
천무백의 입에서 거론됐다.
‘어떻게?’
서문적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냥 검을 뽑은 것만으로?
검을 잡은 자세만으로?
어떻게 아는가.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하나 장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께선, 모든 걸 알고 계시네. 괜히 천룡검협의 이름이 마도의 대적자로 떠오른 것이 아니란 말이지.”
향주들의 얼굴에 믿기 어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또 한편으로는 그럴 듯하다는 수긍하는 빛도 희미하게 어렸다.
마도에 대해서 그만큼 해박하니, 마도의 대적자로 우뚝 선 게 아니냐는 의견은 언뜻 합당하긴 했다.
하지만.
“우리가 혈귀곡과 연수하는 게 더 낫지 않겠소? 당신이, 모든 마도를 멸할 수 있으리라고 난 생각하지 않소.”
향주들 중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장년의 사내가 묵직하게 말했다.
비교적 신장이 작은 이였지만, 기세만큼은 남달랐다.
작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두천의 말이 맞소. 둘 중 비교하면 혈귀곡과 손을 잡아 그대와 싸우는 게 낫지. 마류칠종의 힘이 그리도 약하게 보이오? 혈귀곡이 전부가 아니오. 마도의 모든 힘이 통합된다면…….”
“정녕 보는 눈이 거기까지인가.”
“……!”
분위기가 일변했다.
천무백의 목소리는 차가울 정도로 싸늘했다.
“보여주지 않고서,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자 두천이 다시금 말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두천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무심했다.
다른 향주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비록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사형제였지만, 두천은 본래 저런 인사가 아니었다. 매사에 유들유들한 사람이 아니던가.
한데 지금 모습은 오히려 패도(悖道)적이었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그럼 보여 주지.”
“……내가 상대하겠소.”
지켜보던 작산이 심호흡을 하며 나섰다.
장노의 바로 아래인 만큼, 향주들 중 가장 무공이 월등한 자였다.
하나 천무백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천무백의 손가락이 작산을 가리켰다.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쭉 그었다.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무백이 웃으며 말했다.
“전부, 덤벼.”
아홉 개, 아니 천무백의 검까지.
열 자루의 검광이 어둠속에서 번뜩였다.
* * *
“커헉!”
작산이 피를 토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이미 무릎을 꿇은 이들의 주위로 여덟 명이 쓰러져 있었다.
장노는 그 광경을 침음하며 지켜봤다.
‘압도적인 항마기…….’
마를 멸(滅)하는 힘.
극한까지 운용하는 상단전에서 튀어나오는 압도적인 항마기는 범접할 수 없었다.
닿는 대로 사그라졌다. 작산의 검이 부러졌고, 서문적의 검이 깨졌으며, 다른 이들의 무릎이 바닥에 꿇려졌다.
‘도련님은…… 더 큰사람이 되어 있었구나.’
사실 장노는 천무백을 지키기 위해, 혈귀곡이 아닌 천무백을 선택하는 결정을 내렸다.
‘혈귀곡이 도련님을 노리고 있다.’
검종에게 손을 내미는 건, 결국엔 천무백을 상대하기 위함이다.
노련한 장노는 거기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여 장노는 혈귀곡이 아닌 천무백을 선택했다.
‘지켜드려야 한다.’
거의 인생의 절반을 청성표국을 지켜왔고, 그 신념은 이제 천무백에게 향했다. 지켜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키기엔 너무 큰 사람이 되셨다.’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걱정했다. 마도와의 싸움을 결심하는 천무백에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든든함이 생겼다.
‘가능할까?’
가능하다.
지금 눈앞의 이들은 검종의 우두머리들이자 검종을 대표하는 힘.
이들이 천무백에게 무너졌다.
그것도 죽이지 않고, 완벽하게 제압했다.
자고로 죽이는 것보다 제압이 더 어려운 법.
장노는 천무백의 무력을 절실히 체감했다.
“이제는 어떻지? 좀 달라 보이나?”
천무백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작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흠집조차 내지 못한 완벽한 패배였다.
그간 쌓아 온 검의 경지가 무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 정하오.”
작산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압도적인 무력 차. 마공을 익힌 마인이라면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
항복이었다.
두려웠다.
혈귀곡과 손을 잡아서.
‘저 자를 상대할 자신이 없다.’
그날이 곧 오래도록 이어져 온 검종이 사라지는 날이리라.
작산은 그제야 이해했다.
그의 떨리는 시선이 침중한 얼굴의 장노에게 닿았다.
“대사형은…… 우릴 살리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었구려.”
만일 장노가 이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혈귀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떠오르는 암울한 상상에 작산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작산은 선택했다.
“천룡검협…… 당신의 뜻을 따르겠소.”
혈귀곡을 버리고, 천무백과 손을 잡는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그때였다.
천무백의 손아귀가 어둠을 갈랐다.
“커허억!”
“……!”
두천의 목이 천무백의 손아귀에 잡힌 채 대롱대롱 떠올랐다.
아연한 광경에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노마저 놀라서 소리쳤다.
“도, 도련님! 어째섭니까! 어째서 두천을 왜 죽이려고 합니까!”
“약속과 다르지 않소! 천룡검협!”
하나 천무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끄어어억!”
두천의 눈이 뒤집혀져 흰자위만 드러났다.
천무백의 표정은 냉담했다. 영락없이 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아무도 달려들지 못했다. 아니, 달려들려던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스스스스!
“……!”
“두, 두천?”
놀랍게도 두천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더니, 화상을 입은 것처럼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면서 벗겨졌다.
그 끔찍한 광경에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작산이 비명을 내질렀다.
“인피면구!”
“아아!”
그랬다. 얼굴 가죽이 벗겨지고 드러난 건, 전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천무백이 냉소를 지었다.
“더러운 암종(暗宗)의 냄새. 또 같잖은 계략을 꾸미는 구나.”
“크흐으으……. 천룡검…… 협이여. 너의 오만도 곧 끝이다. 곧…….”
새하얗게 질려 가는 얼굴 속에서도 사내는 거친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천무백이 마주보며 웃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무심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로지 가공한 살기만이 터져 나왔다.
“지랄하네. 새끼.”
우두둑!
“……!”
사내의 목이 단숨에 꺾였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던져버린 채, 천무백은 좌중을 돌아봤다.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마는 하늘을 깨뜨리고 부수는 자였다.”
쓰러져 있던 향주들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마도의 하늘, 천마를 깨부수니 그를 패천검마라 불리었다.”
검마(劍魔)라는 대단한 별호 앞에, 패천(敗天)이 붙었다.
“그리고 나는, 마도의 하늘을 깨부술 것이다.”
마도의 하늘은 곧 천마.
“천마를 죽인다.”
천마를 죽이는 것이야 말로, 하늘을 깨부수는 것.
“그것은 곧 패천이다.”
천무백의 안광이 마도 사이로 번뜩였다.
“본좌는, 현시대의 패천(敗天)이다.”
검종의 종주(宗主)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