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30화 (230/318)

<검신재생 230화>

230. 완전한 마인이 되는 법

연화루의 등은 꺼지지 않는다. 혈사문의 역병이 창궐할 때도 꿋꿋이 등을 밝혔던 곳이 연화루다.

하지만 오늘, 연화루의 등은 꺼졌고, 문은 굳게 닫혔다.

굳게 닫힌 연화루에 은밀히 모여드는 아홉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요, 작 형.”

“서문 아우, 절강에서 햇볕을 하도 쬐었나 봐? 얼굴이 아주 오귀자(烏鬼者)가 됐구먼.”

“허허, 어부 생활도 썩 즐겁더이다. 얼굴이 타는 건 좀 그렇다만.”

하나같이 모두 안면이 있는 듯 반가운 기색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면 당연했다.

드넓은 강호에서도 세상의 시선 때문에 한곳에 모이기 어려운 사형제.

검종의 지휘층인 아홉 명의 향주들이었다.

“사형들 모두 연락받았지요? 놈들에게서 말입니다.”

“그럼. 혈귀곡 놈들이 여러모로 다급해졌나 봐. 우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놈들이, 이제는 모셔가려고 애를 쓰니.”

“장 대사형이 우릴 불러 모은 것도 그 연유 때문이겠지요?”

“대사형께서 모든 규칙을 깨고, 우리를 한자리에 모으는 이유가 그것 말고 또 있겠는가. 그만큼 중한 일이라는 거겠지.”

그들 모두 장노의 서찰을 받았다.

사실 서로를 사형제라고 여기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니다.

개개인의 스승이 달랐다. 하지만 검종이라는 커다란 울타리에서, 서로를 사형제처럼 여겼다. 그런 끈끈한 유대감이 아니었다면 검종은 진즉 마도든, 백도든 어느 한쪽으로부터 사라졌으리라.

“……!”

연화루에 은밀히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흠칫했다.

어둠 속에서 세 명의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향주들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인영이 일부러 기척을 내기 전에는, 누가 있다고 제대로 간파하지도 못했으니까.

하물며 삼 인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거칠면서도 날카롭게 정련된 기세에 그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칼침을 놓을 듯이 살벌한 기세에 향주들의 얼굴에 희미한 경계심이 떠올랐다.

“이 무슨…….”

“흐흐, 거, 걱정 마쇼! 장노께선 안에 계시니 말이오. 우리는 그저 경계를 서는 호위무사들이외다.”

삼인 중 가장 장년의 사내가 가볍게 웃었다. 다소 경박한 어조였다.

아홉 향주 중 제일 막내인 서문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껄렁한 기색의 외팔, 외눈 사내의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허 표사, 거기 문 열어 주시구랴. 기다렸던 손님들이 왔으니까.”

그러자 허 표사라고 불린 이가 묵묵히 전각의 문을 열었다.

외눈의 사내보다는 살짝 부족해 보였지만, 장대한 기골에서 담담하고도 흔들리지 않은 바위 같은 기도가 느껴졌다.

향주들의 낯빛이 딱딱해졌다.

‘이건…… 정종의 무공인데?’

‘정파? 이건 화산인가?’

‘화산이다! 매화향이 희미하게…….’

향주들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바로 청성표국의 표사인 허성이었다. 일전에 천무백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화산의 속가제자였지만 이제는 어떤 화산의 문하보다도 더 화산다운 정종의 깊이를 내포하는 이였다.

허성을 보자 향주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거…….’

‘그 서찰 정말 대사형이 보낸 거 맞소?’

‘설마 지금 이게 함정이라는 건가?’

‘저기 외눈의 무사는 흑도 기질이 보이지만, 저 허 표사란 작자는 진짜 백도의 무인이오. 곁에 가까이하기도 힘든 정종의 내공이 느껴진단 말이오.’

‘어째서 대사형께서 정파의 무인을 이 자리에 세웠겠소이까?’

‘이거 함정입니다.’

순식간에 전음을 통해 서로의 의견이 오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장내에 가득했다. 불길한 기운이었다.

검종은 늘 핍박 속에 살았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숨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서로의 모든 직감이 똑같은 감각을 공유했다.

‘위험하다!’

모두가 동의한 순간.

아홉 향주의 최연장자인 작산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왕이면 밖에서 만나는 게 낫지 않겠소. 여기 밤하늘의 별을 보며 논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안에 계신 장사형께 나와 달라고 해 주시오. 우리 먼저 나가 있겠소.”

작산을 필두로 아홉 명이 일제히 들어온 대문 밖으로 몸을 돌렸다.

하나 그 순간 대문을 닫고 앞에 굳건히 서는 사내.

“……!”

작산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문 앞을 막아선 사내는 비교적 어렸다. 기껏해야 서른 살이 되지 않았을 젊은 외모.

하지만…….

‘대체 이 무슨!’

당장 여기 정체불명의 삼 인을 보면, 허성만 해도 누구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

한데 그런 허성보다도 외눈의 무사, 능허는 훨씬 더 비범했다. 향주 셋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데 눈앞의 청년은 최소한 그 정도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황야의 늑대처럼 흉포한 야성이 안광에서 번뜩였다.

“밖으로 못 나가오. 들어가시오. 이 곽가의 검이 문을 막고 있으니까.”

곽천후의 살벌한 기세에 작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 명, 한 명이 강호에서 보기 드문 엄청난 실력자다.

한데 이런 실력자가 무려 셋이나, 한곳에 이렇게 모여 있다니.

하물며 저런 실력자를 그저 경비로 세워 놓았다고?

‘이 무슨 용담호혈이란 말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향주들 사이에 여러 시선이 오갔다.

“어쩔 수 없군. 일단 들어가서 대사형을 만나보세. 서찰의 필체와 직인은 대사형의 그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작산은 굳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허성의 안내로 계단을 올라간 그들의 앞에 넓은 방문이 열렸다.

들어선 작산의 눈동자에 언뜻 이채가 어렸다.

희미한 촛불 사이로 장노가 보였다. 늙은 얼굴이었지만, 틀림없었다.

검종 열한 명의 향주, 그중에서 맏형. 장노였다.

하나 향주들은 반가운 기색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장노의 곁에 또 다른 사내의 모습이 비쳤으니까.

작산의 등에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콕콕 가슴을 쑤셔댔다.

그는 몰랐지만, 바로 항마기(降魔氣)였다.

“아홉 명이라. 장노, 숫자는 맞소?”

“맞습니다. 한 명은 서령이의 스승이나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오지 못했으니, 모든 인원이 모였습니다.”

“얼굴은.”

“모두…… 제 사제들입니다.”

향주들은 일제히 사내를 노려봤다.

장노가 존댓말을 하는 사내.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윗사람처럼.

작산은 장노와 반갑게 해후는 못 하고, 사내를 노려봤다.

천무백에게서 흘러나오는 항마기가 묘하게 그의 신경을 압박했다.

당연했다.

천무백은 지금 이 순간, 일부러 경천혼공을 최대한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마도라면, 마공을 익힌 이라면 그 누구라도 불쾌하고 꺼릴 수밖에 없는 항마기로 상황을 압박했다.

작산이 향주를 대표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대사형,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오랜만이구나. 사제.”

“대사형……. 설명해 주시지요. 어째서 검종 마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외부인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모시는 분일세.”

“……!”

순간 향주들의 얼굴에 배신감이 떠올랐다.

검종의 규칙.

절대로 마공을 드러내지 않으며, 마인임을 들키지 않는다. 설령 강호에 나서게 되더라도 숨겨야 하며, 어느 세력에 들어갔어도 비밀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검종이 살아남은 방법이다.

한데 장노는 제 상관을 검종의 마인들이 모이는 회합 자리에 데리고 왔다.

대사형이라 믿고 따르던 향주들의 얼굴에 필연적으로 배신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대사형!”

“우리를 팔아먹으려고!”

“대사형! 이래선 안 됩니다!”

그 순간, 천무백이 몸을 일으켰다.

화를 내며 장노를 성토하던 향주들이 일순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

향주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단지 천무백이 일어난 것만으로 아홉 향주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기세였다.

단 일인의 기세가 배신감에 성토하던 아홉 명의 기세를 모조리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마치 거대한 산사태가 덮쳐오는 걸 직면하고 급하게 물러서는 것처럼.

작산의 동공이 거세게 요동쳤다.

“당신은…… 누구시오.”

“본좌는…….”

천무백의 눈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번뜩였다.

“천룡겁협이다.”

* * *

채채채채챙!

아홉 개의 검이 희미한 빛을 토해내며 뽑혀 나왔다.

흉흉한 검광(劍光)이 번뜩였다.

그러나 그 순간, 지켜보던 장노가 피를 토하듯, 절절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모두 검을 거둬라! 제발, 모두 검을 거두란 말이다!”

장노는 천무백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먼저 칼을 겨누지 않으면 자신 또한 칼을 쓰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상대가 검을 휘두르면 반드시 맞서 싸운다는 의미 아닌가.

그랬기에 장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든 향주들은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작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저 서 있었다.

아홉 개의 검이 검광을 번뜩이며 겨눠진 상태로도, 천무백은 무방비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틈이 없다.’

역설적이다.

늘어진 팔, 열린 가슴과 목. 완전한 무방비였지만 틈이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천룡검협.

혈귀곡의 대적자이자, 정파의 떠오르는 별.

지금 이 자리는 혈귀곡의 연수 제안에 검종의 의견을 모으는 회합이다.

한데 여기에 천룡검협이 등장하다니? 그리고 장노가 모시는 사람이라니?

천무백의 강렬한 존재감에 향주들은 침묵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들을 설득하려고 왔으니까.”

“설득?”

“검종이 혈귀곡과 손을 잡지 않기를 난 간절히 원하오.”

“…….”

“내가 그대들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셈이지.”

말은 그리했지만,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침묵이 맴돌자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 알고 있소. 검종이 혈귀곡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다는 것도. 다만, 그리할 때 생기는 위험도 내가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위험이라니…….”

“혈귀곡과 손을 잡는 건, 곧 나를 적으로 돌리는 셈이니까.”

“……!”

광오한 말이다. 무척이나 오만한 발언이다. 하지만 반론은 튀어나오지 못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희미한 숨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정적 사이로 천무백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완전한 마인이 되기 위해서 나를 적으로 돌린다? 그것만큼 잘못된 선택은 없지. 장노는 그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소.”

“개소리 말라! 천룡검협! 마도의 적이 바로 당신이 아닌가!”

“마도의 적일 따름이지, 검종의 적은 아니지.”

“……!”

“검종이 어디 마도였소? 그저 검의 패도를 추구하던 수도자들의 모임이 아니었나?”

“…….”

“완전한 마인이라 그래, 그걸 원한다면 내가 만들어 드리지.”

천무백이 웃었다.

“마도는 사라리지 않지. 태동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지.”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는 듯이, 목소리는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흘렀다.

“죽이고, 또 죽였소. 베고, 또 베었소. 밟고, 또 짓밟았소. 태우고, 또 불태웠소. 그런데 악착같이 살아나더이다. 마도라는 악의 이름은, 지독히도 살아나더이다.”

담담했다. 그렇지만 강렬했다. 목소리에 담긴 힘이 공간을 지배했다.

어느새 천무백을 겨눴던 아홉 개의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지. 마도는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가? 아니, 그건 아니오. 마도가 사라졌다고 보인 적은 있었지. 하지만 마도는 늘 암약하고, 늘 숨 쉬고 있소. 마류칠종의 형태든, 아니면 새로운 형태든, 어떻게든 살아 있지. 백도의 대척점엔 무조건 새로운 세력이 생길 것이고, 그것이 곧 마도를 대표하겠지.”

맞다. 마도는 무림이 열린 이래 존재해 왔다.

수없이 싸우고, 패퇴했지만 어느 시대에서나 마도란 이름은 살아 숨 쉬었다.

“마도는 사라지지 않소이다. 죽지 않소이다. 그렇다고 마도와의 전쟁을 멈출 것이냐? 지레 포기하고 끝낼 것이냐? 아니. 그럴 순 없지.”

천무백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담담했던 목소리의 어조가 점점 고조됐다.

“내 앞을 막고 있소. 내 울타리를 침범하려 했소. 내 가족을 위협에 빠뜨리게 하고도 남을 잡놈들이지. 그래서 나는 죽일 것이오.”

숨이 턱 막혔다. 향주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목소리에 담긴 결연함 속에서, 지독함이 느껴졌다.

“그러면 말이오. 장노.”

순간 천무백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장노를 바라보는 천무백의 안광이 시퍼렇게 타올랐다.

“백도와 마도, 그 사이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검종이 한스러워 완전한 마인이 되고자 원한다면 말이오.”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죽이는 듯, 아니면 비웃는 것 같기도 한. 아니, 어쩌면 너무 해맑은 듯한 미소.

“생각보다 너무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소?”

“……?”

“마류칠종 중 여섯 종단. 그 모두를 죽여 버리면, 검종만 남소. 그러면 검종만이 유일(唯一)한 마도요.”

순간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하니 완전한 마도는 검종뿐이 되겠지.”

새하얀 웃음이 마도(魔道) 속에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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