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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29화 (229/318)

<검신재생 229화>

229. 혼례를 치러야지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야?”

“아버님이 보시기에 말이에요.”

설영의 말에 능허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표정에서 말뜻을 못 알아들은 기색이 역력해서, 설영이 부연을 덧붙였다.

“제 모습이 어때요? 단정해 보여요?”

“거 참. 나 그렇게 쑥스러운 말 잘못 하는 거 알면서. 아름답다니까. 진짜로.”

“아휴. 그거 말고요. 아름다운 거 말고, 음음, 단정해 보이냐구요. 아버님이 보시기엔 어떨 거 같아요?”

설영의 물음에 한 번 생각을 곱씹던 능허는 그제야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새삼 설영의 자태를 아래에서 위로 쭉 훑어봤다.

기분 나쁘게 훑어보는 시선은 아니다. 눈빛에는 애정이 듬뿍 담겼으니까.

만일 천무백이 목격했다면, 징그럽다고 눈알을 뽑아버리겠노라 기함할 정도로 진한 애정이 가득했다.

“허. 나 참. 아버님이 혹여 안 좋게 보실까 봐 이렇게 입은 것이오?”

능허가 참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머금었다.

설영의 옷차림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능허를 대신해 연화루를 관리하고, 은퇴 전에는 기녀로서 명성을 떨쳤던 설영인 만큼, 늘 화려한 차림을 유지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변했다.

화려하고 온갖 색으로 가득했던 화장 역시 가벼운 화장으로 대체되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에 부푼 둥근 배를 보면 오히려 어디 명문가 규수처럼 보일 정도로 다소곳했다.

능허가 빙긋 웃었다.

“아름답네.”

설영의 눈이 샐쭉해졌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이 참, 그거 말고요. 아버님이 보기에 너무…… 그래 보이지는 않겠죠?”

“솔직히 말해 난 아버지랑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딱 하나 닮은 게 있단 말이야.”

“네?”

웬 생뚱맞은 대답이냐는 듯 쳐다봤지만 능허는 여전히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우리 어머니가 기가 막힌 미인이셨거든. 정말로.”

“……당신, 안 어울리게 수작질 잘하는 거 알아요?”

“큭큭. 뭐,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 눈에 이뻐 보이니, 아버지 눈에도 이뻐 보일 테니까.”

능허의 능청에 설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렀다. 그렇지만 기분은 좋은지 볼에는 은은한 홍조가 올라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기색도 여전했다.

“참. 진작 좀 알려 주시지 그랬어요. 가족 얘기는 단 한 번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도련님하고 아버님을 모셔오면 어떻게요?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요?”

“사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절연하고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데리고 올 생각도 없었어. 근데 주야장천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 나라고 별수 있겠어?”

“제가…… 기녀인 것도 말씀드렸어요?”

설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능허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긴, 본인도 걱정했던 대목이지 않았나.

처음 기녀라고 밝힐 땐, 차라리 속 시원했다. 기억 속 아버지는 그저 꼿꼿하고 완고한 유학자였고, 기녀 출신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차라리 절연한 부자의 연. 그냥 아예 돌이킬 수 없게끔 끊어버리고자 기녀라고 솔직히 밝혔다. 능허 특유의 반골 기질이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다 말했지. 걱정하지 마시오. 내 생각보다…… 아버지는…… 음……. 뭐 그리 나쁜 분은 아니시오.”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다고 한들, 차마 낯뜨거운 칭찬을 하기는 그런지라 떨떠름하게 턱을 긁었다.

하지만 능허의 위로에도 설영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여전히 지우지 못했다.

하긴, 언제 결혼을 생각해 봤겠는가.

보통 기녀들의 말로는 뻔하다. 늙어서 은퇴하고, 뒷방으로 물러나 아기 기녀들 머리를 올려주는 역할이나 하겠지.

설영도 그러하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었다.

다만.

‘천 공자님이 이 사람을 좀 사람답게 만들었지.’

능허를 흘깃 쳐다보는 설영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머릿속에 아스라이 옛 기억이 떠올랐다.

혈사문의 손아귀에 연화루가 들어갔을 때.

총관으로 부임한 능허는 전형적인 흑도였다. 수없이 봐 온 흑도. 그중에서도 유난히 거침없고 제법 힘이 있는 흑도.

그렇지만 나름의 주관이 뚜렷해서 기녀는 일절 손도 대지 않는 의외의 면모도 있었다.

설영이 알고 있던 능허는 그게 전부였다.

‘그땐 좀 달라 보였어.’

흑심방에서 연화루를 접수하기 위해 등초와 흑도들이 몰려왔을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등초에게 욕을 보일 법했을 때.

능허가 구해 줬다.

온몸에 핏물로 낭자한데도 아득바득 기어서 칼을 휘두르고 지켜 줬다.

자신에 대한 호감 때문이라고 확신은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행동에 녹아든 인간적인 면모에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로 능허는 변했다.

천무백과 강호를 주유하며, 한낱 흑도에 불과했던 이가 이제는 제법 큰 명성을 갖춘 협객이 됐다.

‘나중에 천 공자님한테 고맙다고 인사라도 올려야겠어.’

아이를 밴 사실도 천무백이 처음 알려 줬다.

의원처럼 맥을 짚지도 않았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 아이가 들어섰다는 걸 알려주며, 축하한다고 말해주던 때를 떠올리니 과연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천무백은 비단 사실만 알려 준 게 아니다.

그의 이름으로 표국에서 임부에게 도움이 될 약재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줬다.

배가 불러오고 나서부터는 아예 연화루가 아니라 표국에 아늑한 거처까지 준비해줬다.

그 사실을 능허에게도 말했다. 능허도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허……. 거, 참. 이상한 데서 자상한 면모가 있는 양반이라니까. 그냥 평소에 좀 잘해 주지. 킁. 이러면 누가 감동할 줄 아나.”

“……감동한 것처럼 보여요, 당신.”

“흥. 나 독안사 능허요. 독사의 눈! 응? 외눈의 뱀! 내가 그런 거로 감동할 거 같아?”

설영은 그저 웃어 보였다. 썩 감격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때였다.

“읏차. 아버지가 오셨나 보오.”

설영의 안색이 홱 변했다. 얼굴에 차오르는 긴장감이 눈에 뚜렷이 드러났다. 콧등이 꿈틀거리고, 얼굴 근육이 빳빳하게 경직됐다.

경직됨 속에서도 설영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했다.

드르륵.

“…….”

방문이 열리고 두 눈이 움푹 팬 능조의 얼굴이 보일 때, 설영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에 한가득한 완고함. 좋게 말하면 완고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고집이 보였다.

“아버지. 여기 이 사람이 내…… 으흠. 내 아이를 밴 연자입니다.”

순간 능조의 날카로운 눈빛이 설영의 얼굴에 꽂혔다. 설영은 흠칫하면서도 급히 인사를 올렸다.

“설, 설영이라고 해요. 아버…… 님.”

고개를 숙이며 설영은 힐끗 능조를 바라봤다.

능조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무언가 잔뜩 마음에 안 드는 듯한 기색에 설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유학자의 풍모다.

아무리 깨인 사람이라도, 기녀 며느리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터.

하물며 듣기로는 한림학사를 지낸 유가라고 하지 않는가.

능조의 목소리가 낮고 깊게 울렸다.

“뭐라 했느냐?”

설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설, 설영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아버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설마 며느리로 인정하기 싫다는 신호인가? 아버님이란 소리를 듣기 싫을 정도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래. 그 말 말이다. 다시 한번 해 보거라.”

“……네?”

“다시, 아버님이라고 해 보라니까.”

“아버님……?”

무언가 능조의 목소리에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설영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으응……?”

강팍하게 닫혔던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가 어느새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급격한 변화에 설영은 얼떨떨했다. 능조가 껄껄 웃었다.

“좋구나. 아버님이라. 아버님이라. 내 생전 저 못난 놈에게 며느리가 생겨서 아버님이란 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래. 며늘아가. 내가 저 못난 놈의 아비란다. 참으로 고생 많았다. 저 못난 놈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내가 더 미안하구나.”

“어…… 아, 아니에요.”

“아니긴. 우리 며늘아가. 아, 그렇지. 자자. 보거라. 내가 말이다. 응? 저기 산동에서부터 귀한 약재하고, 또 선물을…….”

어쩐지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설영은 저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참, 보기 좋아.”

제갈설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능조가 설영을 알뜰살뜰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시아버님이 며느리를 챙겨 주는 모습인지라 보기가 몹시도 좋았다.

천문경은 능허의 가족에게 표국에 거처를 마련해 줬다.

무려 한림학사. 일전에 천무백과 함께 하남으로 오면서 그 명성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름만 밝혀도 웬만한 관문은 통과됐고, 오히려 편의를 봐주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가.

표국은 단순히 강호에만 접하는 세상이 아니다. 관아와 관계도 몹시 중요하다. 그런 천문경에게 전직 한람학사이자, 학문적 명성과 소양, 그리고 인맥을 갖춘 능조는 꼭 모셔야 할 대상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능조를 챙기며 연을 맺어 두려는 속셈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쪼오기도 좋아 보이네.”

제갈설아의 시선이 이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천유하가 곧 표행을 나갈 표물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 옆에는 곽천후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특별히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곽천후가 웃으면서 무언가를 받아 적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썩 좋아 보였다.

천유하도 싫지 않은 눈치였고.

“……어쩐지 나 빼고 다들 잘되어 보이는데?”

새삼 자신의 상태를 떠올린 제갈설아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제갈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어딜 간 거야.”

뭐가 그리도 바쁜지.

천무백은 표국에 도착하고 장노와 둘이서만 무언가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제갈설아가 끼어들 느낌은 아니었던지라, 제갈설아는 표국에서 홀로 있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 친한 능허는 설영하고 짝짜꿍했고, 천유하도 바빴으며 국주인 천문경도 능조를 대접하고 이것저것 일로 매우 바빠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신분이 문제였다.

무려 제갈세가의 장녀.

표국에서 말 편히 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을 신분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제갈설아는 표국에 도착하고 나서 홀로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의 시녀인 유아가 있지 않은가.

한데 그런 유아도…….

“봐봐! 이거 참 예쁘지 않니?”

“응. 예쁘네.”

새침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천무백의 몸종이었던 점박이가 연신 유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점박이가 좋아해서 기웃거리는 모습이었지만, 제갈설아는 유아를 잘 알았다. 새침한 척, 은근히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거다.

순간 제갈설아의 고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조그만 주먹을 꽉 쥐며 무릎을 쳤다.

“……하! 진짜! 다들 너무하네!”

새삼 열불이 난 제갈설아가 탄식을 터뜨렸다.

“뭐가 말이오?”

그때였다. 바로 뒤에서 천무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공, 공자님.”

“뭐가 너무하다는 것이오?”

천무백의 시선이 제갈설아를 따라갔다.

이내 점박이와 유아의 애정행각을 보고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점박이도 이제 슬슬.’

하는 짓은 순진하지만, 나이는 슬슬 노총각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천무백의 시선이 설영과 능허에게도 향했다.

‘저쪽도 이왕이면 말이지.’

이제 곧 출산도 앞뒀는데, 혼례를 간략하게라도 치러야 하지 않으려나.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점박이도 그렇고. 그러나 유아는 엄연히 제갈설아의 시녀였으니, 그녀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천무백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소저.”

“네.”

“혼례 치릅시다.”

“……네?”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한 제갈설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여러번 곱씹어 겨우 의미를 파악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순간,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갈설아가 허둥대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혼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소?”

마치 산책이라도 가자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어조에 제갈설아는 혼이 나갈 것 같았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양손을 꼼지락댔다.

“아니, 그 무슨, 그러니까. 이렇게, 갑자기, 진도를 확 당기시면 이건 너무, 그 뭐라 해야 할지.”

“점박이도 나이가 있고, 유아도 썩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니,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어떻습니까? 점박이는 내가 물어보겠소.”

“그러니까…… 아 점박이랑 유아 말씀하신 거였구나.”

“음?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소?”

“…….”

제갈설아는 간신히 쥐어짜는 목소리로 소리치듯이 말했다.

“필수주어를 생략하지 말라구요! 진짜……!”

* * *

장노가 찾아왔다. 한데 어쩐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 들었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장노.”

“제갈소저에게 혼례를 청하셨다고…….”

“……예?”

“아닙니까? 표사들하고 쟁자수들 사이에서 떠들썩하던데요.”

천무백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음, 아닙니다. 점박이 녀석하고 제갈소저를 따라다니는 그 유아란 녀석하고 혼례를 치러 주자는 제안이었소. 뭐, 하여간.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지금 날 찾은 건…….”

천무백의 말끝이 흐려지자, 장노의 표정 역시 굳었다. 결연한 기색이 드러났다.

“모두, 모였습니다. 검종의 마인들이.”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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