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28화 (228/318)

<검신재생 228화>

228. 그래야 편하겠지

천무백의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고막에 울렸다.

“슬픈 일은 하지 마시오. 그걸 뽑은 순간, 나도 칼을 뽑을 테니까.”

“······!”

장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순간 미몽에서 깨어난 듯 차가운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해졌다. 전기가 흐르듯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깨어났다.

‘허억!’

참았던 호흡을 거칠게 내쉬었다. 떨리는 동공이 자신의 손에 닿았다.

‘이 무슨…….’

그제야 지금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허리춤에 간 오른손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당장 뽑을 듯이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몰랐다.

그냥 본능이었다.

의식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천무백의 눈빛이 관통하는 순간,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이, 이런······.’

온감 감정이 휘몰아쳤다.

고작 눈빛과 말 한마디에 그간의 관록이 우습게도 검을 뽑으려 했단 사실이.

또 상대가 다름 아닌 천무백이란 사실이.

자괴감이다.

두 발로 아장아장 걷는 걸 지켜봤고, 아주 약하고 어릴 때는 품에 안아 줬었다.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손자처럼 생각했다.

그런 천무백에게 검을 뽑아 겨누려고 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뽑히지 않는다.’

칼자루를 쥐는 순간 검이 뽑혀 나왔어야 정상이다.

장노도 그만큼 쾌속한 발검(拔劍)을 갖췄다.

자연스러울 정도로 기계적인 과정이다. 칼자루를 잡으면, 뽑고, 휘두른다.

수십 년 동안 검을 갈고 닦아 만든 정교한 경로.

한데 그러지 못했다.

마치 검집에 아교로 꽉 고정된 것처럼 뽑지 못했다.

천무백의 경고 때문이다.

경고가 귓가에 울린 순간, 머릿속에서 검을 뽑는다는 선택 따위는 사라졌다.

장노의 얼굴에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천무백의 안광에서 뿌려지는 거친 빛이 칼날처럼 온몸을 샅샅이 헤집는 기분이었다.

투명했다.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투명한 눈빛.

천무백의 입이 나직이 열렸다.

“걷는 발을 보면 패천검마의 유환보(流環步). 칼을 잡은 품을 보면 검마의 검 중에서도 무류(無流)의 형식을 따랐고.”

“……!”

장노는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혔다.

단 한 번도 무공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천무백의 입에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검종의 무공은 다양하다. 당장 검법만 해도 여러 종류였으며, 보법과 신법도 마찬가지다.

장노가 검종의 마인이라고 가정했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장노에게서 무공을 보았다는 것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장노의 두뇌가 비상하게 회전했다.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무백 앞에서 마공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내 미세한 습관을 보고…….’

오랜 세월 익힌 무공이라면, 습관이 남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장노는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단지 걷는 걸음을 보고 보법을 유추해 낸단 말인가? 단지 검을 잡는 품을 보고 알아낸단 말인가?

목덜미와 팔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그래, 알아낼 수 있다 치자. 눈썰미가 날카롭고 무에 통달한 경지라면 가능하다. 사실 가능하다고 여겨지진 않지만, 억지로라도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이미 알아야 한다. 내가 익힌 무공을.’

패천검마의 보법인 유형보.

패천검마의 검을 표현하는 무류검.

그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어야만,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 법.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내 정체를 공연히 캐내지 않고, 그저 늘 똑같이 대했던 거였어. 내가 마인인 걸 알면서도.’

장노는 고통스러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들어 천무백을 바라봤다.

투명한 눈빛.

장노는 끝내 굴복했다.

“얘기 길게 하지 맙시다, 장노. 다 알고 있으니까. 마류칠종에서 버림받은 검종. 그대는 검종에서 어느 정도의 직책이시오?”

“······.”

장노는 깊게 숨을 고르곤, 포권을 취했다.

“검종의 향주(香主)가 도련님께 인사드립니다.”

“향주라······.”

비교적 작은 점조직의 수장을 이를 때 향주란 표현을 쓴다.

‘점조직이라. 하긴 그렇겠지. 검종의 역사를 생각하면.’

천무백이 놀라지도 않고 담담한 표정을 짓자 장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 알고 계셨습니까?”

“어렴풋이는 알았소.”

“한데 왜 모른 척하고 계셨습니까.”

“나는 나한테 먼저 칼을 겨눈 자에게 칼을 휘두를 뿐이니까 말이오.”

“그 말은······.”

“말씀하시오. 장노. 검종은 혈귀곡과 손을 잡을 것인지.”

덤덤한 어조였으나 안광은 거친 빛을 흩뿌렸다.

장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혈귀곡은 천무백의 공공연한 적이다.

놀랍게도 천무백은 유서령이 자신에게 전달한 말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도의 참전 제안.

하면 검종을 다시 마류칠종의 하나로 대우해 주며, 곧 열릴 마도천하의 한축으로 삼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하나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고민하기도 전에 천무백과 이리 만나게 됐으니까.

“도련님은, 정말로 다 알고 계시는군요. ······검종의 과거를 아십니까?”

“아오. 패천검마가 천마를 죽인 후, 마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철저하게 파괴당했지.”

“······맞습니다. 우리 종단은 마도천하를 꿈꾸지 않습니다. 오로지 검을 갈고 닦아 검의 극의를 향한 길을 걷습니다. 마도는 그를 위한 수단일 뿐이지요.”

“······.”

“패천검마는 스스로 천마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도니, 천마니, 마도천하니, 그분은 오로지 검을 닦는 마도의 수도자였으니까요. 하여 우리는 마도에서 쫓겨나 핍박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지만 검종은 오랜 세월 강호에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본래 힘을 드러내면 백도에겐 그저 끔찍한 마인이요, 그렇다고 똑같은 마도들에겐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니 그저 쫓기고 버림받아질 뿐이었지요.”

“그래서 그런 삶에 질려 버린 마인들이 있다는 것인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면 검종이 혈귀곡에서 내민 손을 잡을 것이오? 완전한 마인이 되기 위해서?”

완전한 마인.

장노는 심장을 정통으로 때리는 듯한 단어에 침음성을 삼켰다.

그랬다.

어쩌면 장노도 차라리 그걸 바랐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공을 익혔다. 절대 백도의 편엔 설 수 없다. 정파의 일원이 될 수는 없다. 강호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순 없다.

그래서 차라리 완전한 마인이 되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

지향하는 바는 다르더라도, 검종 역시 마도의 한 축.

마공을 사용한다.

백도의 편에서, 강호를 자유로이 주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완전한 마인이 되어 마도에 복속하고자 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아니지. 거의 대다수가 그러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바라던 바였다.

오히려 마도의 편입을 바란 건 검종이었다.

그러나 배신자의 멍에를 뒤집어쓴 검종에게, 마도는 문을 열지 않았다.

한데 지금 혈귀곡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유서령을 통해 전해진 의견은 분명했다.

‘마도천하······.’

그 길에 있어 과거의 악연을 끊고, 검종 역시 마류칠종으로 대우해 주겠다는 달콤한 열매.

아마 이 소식은 비단 장노뿐 아니라, 곳곳에 흩어진 여러 향주들에게도 전해졌으리라.

만일 천무백이 장성하기 이전이었다면.

망설였을지언정 흔쾌히 따랐으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장노는 지금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천무백의 눈을 마주 봤다.

담담한 눈빛에 장노는 탄식했다.

“그렇군요. 제 선택에 따라 도련님의 태도도 바뀌겠군요.”

“당연한 거 아니겠소, 장노. 혈귀곡은 적이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지. 나는 그들을 죽였고, 그들도 나를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두르겠지. 말씀드리겠소, 장노. 그대가 혈귀곡의 손을 잡기를 바라지 않소.”

천무백은 답지 않게 정말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단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는 이유는 충분하다.

‘검종의 세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나, 혈귀곡과 힘을 합친다면 마류칠종 중 세 개 종단이 힘을 합친 꼴이니, 쪼그라든 세력이 다시 회복하겠지.’

적의 세력이 커지는 건 막아야 한다. 전투에서, 전쟁에서 당연한 일이다.

전략적으로도 명백한 이유다.

하나 꼭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장노를 내 손으로 베기는 싫군.’

솔직한 속내였다.

비록 천무백이 전생을 떠올리기 전의 기억이지만, 장노가 살뜰히 자신을 아끼던 모습이 선명했으니까.

그런 천무백의 감정이 전해졌을까.

장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늙은이는 검 한 자루 차고, 은혜를 입어 청성표국에 수십 년을 바쳤습니다. 저에게 있어 마도천하는 하등 쓸모없는 명문이자 목표입니다. 그러나 검종 전체가 혈귀곡과 연수하는 건 제 의견만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이 필요하다는 것이오?”

“도련님 말씀대로, 완전한 마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그 말에 천무백은 가볍게 웃었다.

“완전한 마인이라…….”

이해가 되지 않는 소망은 아니다.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닌, 수백 년에 걸친 핍박이다.

마인이되 마도에서 핍박받고 배신자로 몰리는 존재들.

그렇다고 백도의 편에 설 수는 없는, 경계의 존재들.

차라리 가진 힘을 바탕으로 완전한 마인이 되고, 마도에서 힘을 쓰기를 바랄 터.

천무백은 이해했다.

역설적으로 장노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나 때문이라도 혈귀곡과 연수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야.’

아마 장노도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겠지. 하지만 그리한다면 천무백을 적으로 돌리는 결정이 될 터. 장노는 그것이 싫어 솔직한 속내를 밝힌 것이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검종의 마인을 모두 모아 주시오.”

“예?”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잖소.”

“······.”

“그리고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내가 한 번만 살려 줍사, 말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소. 그래야 날 치겠다고 혈귀곡과 손잡은 결정을 저 뒤편으로 저버릴지도 모르지.”

일순 장노의 몸이 흠칫 떨렸다.

검종의 마인들을 모은 자리에서 직접 설득하겠다는 요지다.

하지만 장노의 머릿속에서 강렬한 경고가 울렸다. 장노의 떨리는 시선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여전히 담담한 얼굴 아래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으니, 그리도 좋아하던 참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하나 장노는 옛날처럼 마주 보며 웃기 어려웠다. 아니, 힘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가정 하나가 머릿속을 쿡쿡 찔렀다.

“모두…… 말입니까?

“그래야 편하지 않겠소.”

장노의 상체가 꽉 경직되며 꼿꼿해졌다.

단순히 한 자리에 모아 설득하면 편하지 않겠냐는 뜻이겠지만.

말이란 게 늘 그렇듯, 똑같은 단어와 문장이어도 서로 다른 뜻을 품는다.

분명히 느껴졌다. 다른 속뜻이 담겨 있다고. 말에 가시가 있다고.

어째서일까.

왜 중의적이라고 느껴진 것일까.

그거야 간단했다. 장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혹여 떠오르는 불길한 가정.

‘만일, 정말 만일 설득에 실패한다면?’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설득에 실패한다는 건, 곧 검종의 공론이 혈귀곡과의 연수로 가닥이 잡힌다는 의미.

하면 검종은 천무백의 적이 된다. 천룡검협의 대적이 된다.

마인이라면 끝까지 쫓아가 격살하는 이가 바로 천무백이다.

장노의 손아귀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편하지 않겠소?

어쩐지 그 말이 장노의 귓가에는 이렇게 들렸다.

‘단번에 다 죽이려면, 다 모여 있는 게 편하지 않겠는가…….’

천무백을 바라보는 장노의 시선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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