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27화>
227. 말해, 어디야?
연무장 위에 선 천무백은 불현듯 전생을 떠올렸다.
패천검마(敗天劍魔)로 불리던 시절의 삶을.
‘치열했었군.’
어디 치열하지 않았던 삶이 있었던가.
그래도 그때의 삶은 천무백의 기억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했다.
모든 전생을 통틀어서도 가장 치열한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난생처음으로 마공을 익혔었지.’
마공을 익히려면 마도에 접근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마도의 인물이 강호에 암약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마도(魔道)는 천산에서 태동했고 성장했다. 과거에는 천산으로 향하는 길이 무척이나 험난했다.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 도로가 닦이고, 나라의 강역이 확장되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영역이지만, 당시엔 중원은 극히 일부였으며, 바깥은 새외였고, 야만의 땅이었다.
천산 역시 마찬가지다.
천무백은 검마가 되기 이전까진 어떤 삶에서도 마공을 익힌 적이 없었다.
그런 천무백이 마공을 익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백했다.
‘경천혼공의 실패.’
무수히 이어지는 전생 중 초창기였다.
지금처럼 심지가 굳건하지 못하고, 성급했다.
매번 계속되는 삶에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어떻게든 윤회를 벗어나고자 안달복달했다.
‘어렸었지. 참 어렸어.’
지금처럼 기억에 무감각하지 못했다.
매 삶에서 맺은 인연.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무신경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늘 떠올리며 매번 한탄하며 심마를 품고 살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끝내고자 모든 방도를 강구했다. 바로 경천혼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족한 실력으로 희대의 심공을 연구하고 창안하려 노력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이번 삶에서 상단전이 열려 있는 기연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쉽지 않았을 것이 바로 경천혼공.
무리하게 상단전을 열려고 뇌를 자극하다가 치명상을 입었다.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에 가까운 지경이 됐다.
모든 단전이 파괴되고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됐으니까.
다행히 그간의 쌓은 경지 덕분인지, 완전한 폐인은 되지 않았다.
팔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검은 아직 휘두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포기 못 했지. 어떻게든 끝을 봐야 했으니까.’
그래서 마도로 향했다.
그리고 마공을 익혔다.
그리고 검마가 되었다.
아직은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수많은 마도의 종단 사이에서 천무백은 검마로서 홀로 우뚝 섰다.
끊임없이 싸웠다.
마도의 고수란 고수들과 수없이 부딪치고 싸웠다.
천무백은 그저 나아가기 위해, 마도의 끝을 보면 검의 끝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싸웠다.
그것이 마인들에게는 다르게 비쳤다.
강자존(强者尊)의 세계.
강한 자만이 약한 자를 무릎 꿇리고 가장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마도.
그들에게 있어 천무백의 행적은 진정한 마도행이었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투쟁하며 나아가는 상징.
자연스레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무리들도 당시의 천무백과 똑 닮았다.
맹목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오로지 검에만 몰두했다.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는 길만을 추구했다.
마도 내부의 정치적 공학이며, 역학 관계 등 모든 걸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시 마도내부의 여러 종단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이합집산하던 모습에 실망하던 마인들이 천무백을 추종했다.
오로지 검만을 추구하는, 검에 미친 마인들만이 모였다.
곧 하나의 세력.
검종(劍宗)의 탄생이었다.
‘사실 검종이란 게 생긴 것도 나중에 알았지.’
당시 천무백은 정말 검 외에는 무관심했다. 추종하는 마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싸우고 또 싸웠다.
나머지 마류육종의 종주를 모조리 무릎 꿇려, 마류칠종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끝내 천마와 싸워서, 천마를 격살했다.
마도에 있어서 신화(神話)였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외부인이, 마도의 모든 고수를 쓰러 넘긴 뒤, 결국엔 마도의 최정점인 천마를 격살해 버린 사건.
어쩌면 그때, 천무백이 새로운 천마가 되어 마도를 이끌고 강호로 향했다면.
진즉 강호가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무백은 그러지 않았다.
‘마도에서 더 싸울 실력자가 없었으니까.’
천무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책임한 행동이다.
천마를 죽였으니, 마도에서 더 싸울 상대는 없었다. 그래서 마도를 떠났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종주가 사라진 검종은 처절한 보복을 당했으니까.
물론 천무백이 그걸 몰라서 떠난 건 아니다.
다만.
‘내 울타리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랬다면 어떻게든 종단을 지켰겠지.
천무백은 검종의 마인에게 적잖은 부채감을 가졌다.
당시의 천무백과 비슷하게 놀라울 정도로 검에 미친 검귀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천무백도 검종을 내버려 뒀다.
다만.
‘혈귀곡과 손을 잡으면, 이젠 모를 일이지.’
그걸 확인해야 한다.
저벅.
그 순간,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천무백은 반갑게 웃었다.
“오셨소, 장노?”
* * *
장노는 표국에 돌아와서 유서령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 보는 아이였지만, 단번에 깨달았다. 아무리 꼭꼭 숨겼다고 한들, 장노가 느끼지 못할 리가.
같은 근원, 같은 무공, 같은 내공까지.
‘동류다······!’
서로를 느낀 건 유서령도 마찬가지였다.
검종 마인들이 공유하는 감각.
그걸 느낀 유서령도 장노를 곧바로 알아봤다.
자신이 찾아야 할, 사백이라는 사실을.
장노는 그간의 모든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도련님······.’
장노는 차마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두 발로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천무백을 지켜봤던 장노는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모든 걸 알고 있다. 모든 걸.’
호북의 무당에서 의미심장한 말은 듣긴 했지만, 그래도 장노는 확신하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을 숨겨 온 출신을 들켰을 리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금의 천무백은,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천무백이 아니었다.
‘천룡검협. 마(魔)의 대적자.’
누구보다 가장 앞서서, 어떤 문파도, 가문도 해내지 못한 마도척결의 선두.
어쩌면 작금의 강호에서 마도에 정통한 이가 천무백 말고 또 있을까.
‘어쩌면 진즉 알고 계셨겠구나.’
장노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저벅, 저벅.
연무장으로 향하는 한 걸음, 걸음이 무거웠다. 천근만근 무거웠다. 뜨거운 불 속을 걷는 것처럼 걸음을 떼기 어려웠다.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아찔했다.
‘과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택해야 한다.
무엇이든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하나 장노는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천무백과 얘기를 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유서령이 전해 온, 종단의 결정을 내릴 수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단순히 추론일지도 모른다. 정말 검종의 마인임을 알아차리셨다면, 어찌 살려 놓으셨을까.’
연무장은 어두웠다. 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하나 장노는 그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미소를 목격했다.
특별히 안력을 돋우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웃음.
새하얗게 드러난 이빨은 호쾌했으며, 지금까지 봐왔던, 그리고 제 손주처럼 아꼈던 천무백의 해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웃음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서늘했다.
“오셨소? 장노?”
‘아······.’
장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신이 떨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짓누르는 듯한 거친 악다구니가 귓가를 앵앵 울리는 듯했다.
서늘함에 온몸이 저렸다.
‘눈빛······.’
날카롭다. 차갑다. 매정하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빛에 담긴 감정에 장노의 몸이 한번 휘청거렸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빛이다. 아니, 정확히는 천무백이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 처음이다.
‘적······.’
생사를 넘나드는 무수한 싸움.
그 고비마다 마주친 무섭고도 냉정했던 적들이 저런 눈빛이었지.
장노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손자처럼 여기던 천무백에게서 저런 시선을 받자 장노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사질과의 해후는 즐거우셨소?”
“······도련님.”
장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유서령이 사질이란 사실을 안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있을까.
검종의 마공은 특이해서, 다른 종단들과 다르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천하의 천룡검협이라도, 검종이란 한 종단에 속한, 어쩌면 정통의 마인인 자신과 유서령의 근원을 알 수 있을까.
“굳이 따지면, 나도 장노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장노도 내 스승이나 다름없지 않소. 어쩌면 저하고도 사제관계일지도 모르겠소.”
가벼운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장노는 침묵했다.
스승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처음 천무백의 수련을 맡아 주긴 했지만, 스승 노릇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스스로 컸다.
‘내가 한 건 없었지. 홀로 무인이 되셨다.’
신기한 일이다.
천하제일의 기재가 저러할까.
스스로 치열하게 노력하고 성장해서 걸출한 무인이 됐다.
그러니 자신을 스승이라고 운운하는 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
장노는 천무백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신경을 집중했다.
천무백은 혀를 찼다.
“왜 그러시오, 장노.”
“······도련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라. 장노께선 지금까지 우리 표국을 지켜왔지.”
“······!”
“그대는 내 아버지를 지켰고, 누님을 지켜왔으며, 표국을 지켜왔소. 표국이 어려울 때도 꼿꼿이 서서 모든 풍파를 견뎌왔지.”
천무백은 장노를 또렷이 응시했다.
장노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말에 담긴 뜻은 따스했지만,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가웠으니까.
무엇보다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은 관록의 장노도 거북할 정도였다.
천무백이 웃으며 말했다.
“하니 물어야겠소. 엄연히 나에게 처음 무공을 가르쳐 준 스승이신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스승의 근원을 모르는 게 말이 되겠소. 어느 문파에서 무공을 배웠소?”
장노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강호에선 노인과 아이를 조심하란 말이 있다.
적어도 노인의 축에 드는 장노는 치열한 경험을 쌓은 노강호다.
얼굴 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니, 장노는 내심 이 짙은 어둠이 가려지고 있음에 감사했다.
장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스승께서는 사문을 밝히기 싫어하셨지요.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천무백은 그런 장노를 뚜렷이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안광(眼光)이 장노의 숙인 뒤통수에 닿았다. 한참 노려보던 천무백이 다시 물었다.
“어디서 무공을 배우셨소?”
똑같은 물음에 장노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왔다.
천무백이 다시 물었다.
“어디오?”
장노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도 강호에 나섰으니 알 것입니다. 때론 사문을 거론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음을요.”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사문을 밝히기 어려워하는 무인들이 있지. 당연한 일이오. 수많은 은원(恩怨)이 엮인 곳이 강호지. 사문을 밝히면 내가 모르는 어떤 원한이 내 목을 노릴지도 모르니까.”
담담했던 장노의 얼굴에 일순 미약한 균열이 일었다.
천무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대체 어떤 원한이 있는 사문이기에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혹시 알려지면,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이려고 달려들 만한 사문이라 그런 걸까.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소.”
그 순간, 장노는 어둠 속에서 안광이 시퍼렇게 타오르는 걸 똑똑히 봤다.
흡사 맹수의 눈빛 같기도 한 시선은 닿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해. 어디야?”
장노의 안색이 싹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