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26화 (226/318)

<검신재생 226화>

226. 참 눈치 없다

표사들의 선두에서 달려오고 이는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능허야.”

“예, 주군.”

“투귀 곽천후가 언제부터 청성표국의 표사가 됐냐.”

“표국의 막내이신 공자님이 아셔야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쟤 설마 소림에 정의맹 창설 얘기 건네러 간 뒤로, 하남에 죽치고 앉아 있는 거야?”

천무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게 대체 언제인데?’

정의맹이 창설되고 서서히 궤도에 오르고 있는지 벌써 얼마나 됐나.

처음 정의맹 창설을 계획했을 때 곽천후가 소림의 지지를 받기 위해 하남으로 갔으니까…….

“참나.”

점점 가까워지면서 곽천후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청성표국의 표식이 새겨진 무복을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표사였다.

더구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띄워진 게 전반적으로 밝아 보였다.

일전에는 오로지 끊임없는 싸움만을 원해 투귀라는 별호가 붙었을 정도로, 얼굴에는 웃음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코앞에 다가오자 곽천후가 천천히 말을 멈췄다.

“오랜만이다.”

곽천후의 인사에 천무백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냐, 너.”

“뭐가?”

“왜 표국 옷을 입고 있어?”

“……객원표사다.”

“아직도?”

“……흠흠. 여하튼 부국주님 명에 따라 널 데리러 왔다.”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국주, 그러니까 천무백의 누이인 천유하를 언급하자 곽천후의 얼굴 너머로 붉은 빛무리가 현란하게 빛났다.

‘하. 이 새끼.’

제 아비를 닮아 맹렬하게 싸움만을 추구하던 기재.

쉬지 않고 몸을 극한까지 단련시켜,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워 투귀(鬪鬼), 싸움에 미친 귀신이란 소리를 듣던 후기지수가…….

“행복하냐?”

“흠흠. 부국주님께서 잘 챙겨 주신다.”

“…….”

아이고.

천무백은 볼을 긁적였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 * *

상전벽해란 말이 있다.

천무백은 청성표국의 변화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떠날 때만 해도 공사 중이던 수많은 누각이 완성됐으며, 대문 앞으로 펼쳐진 대로로 끊임없이 마차와 사람들이 오갔다.

창고에는 표물이 계속해서 쌓이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많이 변했지?”

곁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목소리에 천무백이 시선을 돌렸다.

천유하가 빙긋 웃었다.

“다 네 덕이야. 정의맹과 계약으로 중경성을 오가는 표물을 거의 독점하고 있고, 호북에서도 무당과 제갈세가의 비호 아래 세력이 커졌어. 섬서에서도 화산이 도와주고 있고.”

천유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강호에서 천무백의 행적이 필연적으로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소림, 화산, 무당, 제갈세가 모두 한 성의 패자(霸者).

그들의 비호를 받고 표물 계약을 맺는다는 것만으로도 청성표국은 단숨에 비상할 수 있었다.

천무백은 자신의 별호가 가진 힘을 잘 알았다. 강호의 생리가 어떻고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도 알았다.

‘천룡검협의 표국이니까.’

천무백인 청성표국에 속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숨기기도 어려운 일이다. 세상 곳곳에 눈과 귀가 있고, 천무백이 각성하기 이전의 행적 역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작금의 강호에서 천룡검협이 뜻하는 명성은 엄청나다.

천무백과 접점이 없는 강호인사들도 천성표국을 무시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만약을 위해 호의적으로 표국을 대하기 마련.

뿐이랴.

표국의 앞길에 있어서 가장 큰 약점과 불확실한 건 바로 표행 실패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표국인 만큼, 표행 실패 경력은 치명적이다.

하나 작금의 청성표국은 그렇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는 산적이나 수적들이 아예 시비를 걸지 않더구나. 덕택에 아주 자그마한 표행이라도 실패하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거의 없어. 이것도 다 널 무서워해서 그러는 거 아니겠니?”

천유하는 아마 녹림과 수적들도 천무백을 두려워해서 건들지 않는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천무백은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물론 천무백을 두려워하겠지. 하지만 흑도가 두렵다고 해서 물러서는 놈들은 아니지 않은가.

‘곡지흠이가 잘 처리하고 있나 보군.’

산적이나 수적이나 이미 천무백의 손아귀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당계세가가 가만히 있을 거로 생각하진 않았는데, 곡지흠이 다 처리했다고 하니.’

하오문을 통해 곡지흠의 연락을 전해 들은 천무백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들려오는 얘기론 철저하게 양측 사이의 줄을 타며 흑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당장 당계세가를 처리한 일만 봐도 그렇다.

곡지흠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았는가.

흑회의 목줄기가 천무백의 손아귀에 틀어 잡혔으니, 당분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뿐이랴.

‘여차하면 내 뜻에 맞게 움직일 수도 있겠어.’

곡지흠을 잘 이용하면, 흑회라는 거대세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물론 청성표국이 이렇게 세력을 떨치게 된 건 오로지 천무백의 활약과 행적 덕분만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연달아 벌어진다고 해도, 갑자기 다가온 기회를 쟁취해서 성공시키는 건 모두 천유하와 천문경의 힘이었다.

“아버지와 누님께서 수완이 좋아서, 표국이 이리 커진 거지요. 강호는 곧 은원(恩怨)이니, 호의적인 세력이 있다면 악의를 품은 세력도 있고 많은 방해와 장애물이 있을 겁니다. 그 모든 걸 극복한 건 다 누님 아닙니까.”

“어머, 우리 무백이 이제 말도 엄청나게 잘하네!”

천유하가 까치발을 들며 천무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궁, 우리 무백이. 언제 이리 컸을까. 누나 품에 안겨서 잘 때가 엊그제 같은데.”

“…….”

어린 애 취급당하는 기분이 묘했지만, 천무백은 묵묵히 있었다.

그때였다.

“부국주님, 호북으로 향했던 무령적가의 표행에 성공하고, 다음날에 복귀한다는 소식입니다.”

천무백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정중한 어조지만 힘이 실려 있어서, 상부에 정확하게 내용이 보고된다.

훌륭한 태도와 자세였으니, 표사로서 칭찬을 아끼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다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처음 만났을 때 능허에게 눈을 번들거리며 싸움을 걸던 투귀.

싸움 귀신이란 별호가 가장 잘 어울리던 곽천후의 변한 모습에 천무백은 어처구니없었다.

그런 천무백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곽천후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애써 피했다. 천무백의 목소리가 절로 퉁명해졌다.

“야.”

“뭐.”

“너 집에 안 돌아가냐? 정의맹에서 한 자리 안 준대?”

“자고로 강호의 무인이면 강호를 떠도는 법.”

“그럼 이전처럼 비무행을 해야지, 왜 표국에서 표사 일을 해?”

천무백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하자, 곽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 반박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때 도움을 준 건 천유하였다.

“왜 그러니, 무백아. 우리 표국에 큰 도움을 주고 계시는데. 너 없는 동안 시비를 걸어오는 몇몇 낭인들도 다 곽 공자께서 해결해 주셨단다.”

“…….”

언제 표정을 찡그렸냐는 듯, 천유하가 두둔하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고 천무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기재였는데…….’

솔직히 천무백은 투신 곽용이나 그의 성정을 똑 닮은 곽천후를 인정하고 나름 호감을 품었다.

칼에 피를 묻혀야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천무백과, 오로지 싸움만으로 실력을 쟁취하는 곽 부자의 사고는 거의 흡사했으니까.

“그럼 곽 공자님, 자세한 보고는 차를 마시면서 듣기로 해요. 괜찮으시죠?”

“아, 물론입니다. 부국주님.”

“야. 광대 찢어지겠다.”

……다만 지금은 그저 말 한마디에 헤-하고 웃어 버리는 얼간이가 된 게 조금 안타까웠을 뿐.

“저 곽천후가 절 죽이려고 했던 곽천후가 맞습니까.”

능허의 황당한 물음에 천무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투귀가 얼간이가 됐어.”

“사실 제가 보기에는 주군의 누이께서 수완이 장난 아니신데요.”

“응?”

능허가 어깨를 으쓱였다.

“보아하니 아주 손바닥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는 거 같지 말입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는 제천대성 같달까요.”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부국주지만, 천무백은 아버지가 아닌 천유하가 실질적인 표국의 책임자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충분히 수완이 있으시지만…….’

천무백이 보기엔 천문경의 수완도 나쁘지 않지만, 그에 월등하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표국을 이만큼 이끈 건 사실상 천유하의 수완이다.

이런 거대 표국을 이끄는 자라면 응당 심계가 깊기 마련이고, 눈치가 빠르기 마련이다.

“누님이 모를 리가 없겠지.”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겉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곽천후가 사랑에 푹 빠져서 얼간이가 된 것처럼 보이는데, 천유하라고 눈치를 못 챌까.

천유하는 적절히 곽천후를 제어했다.

하지만 천무백은 알았다.

천유하가 타인의 감정을 그저 이용만 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성격상 아니다 싶으면 아예 이용하지도 부담스럽다고 쳐 낼 것이다. 그런데도 곽천후를 곁에 둔 건, 그의 무위와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무래도 어느 정도 천유하도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이겠지.

“하긴, 저렇게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데 모를 리가 있나. 바보 천치도 아니고. 곽천후, 쟤도 참 눈치 없어.”

“…….”

그 순간, 주위에 묘하게 퍼져 가는 침묵에 천무백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며 기막힌 눈빛으로 입을 꾹 다문 제갈설아가 보였다.

눈빛에 담긴 의미가 천무백의 선안으로 보기에도 워낙 묘했다.

어처구니없음, 기막힘, 황당함, 안타까움, 아쉬움, 등 이상한 감정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이었으니까.

선안으로도 명확히 느껴지지 않는 감정에 천무백이 조금은 당황했다.

“어, 제갈소저. 왜 그러시오?”

“에휴…….”

하나 대답 없이 제갈설아는 자리를 피했다.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능허야.”

“예.”

“어디 아프시다더냐?”

“……에휴.”

능허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검만 잡았네. 검만 잡았어. 평생, 아니 전생 내내 검만 죽어라 잡은 거야. 검만 오지게 잡았어. 어? 아주 검에만 미쳤던 거야. 그래. 그래야 이해가 돼. 참, 이런 거에는 참. 눈치가 없어. 응. 검만 잡았으면 그렇지. 음음…….”

* * *

“장 총표두님, 이번 표행도 정말 고생 많으셨소.”

표행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에겐 늘 치하와 보상이 뒤따르지만, 국주인 천문경이 직접 나서 양손을 잡아 주며 대우해 주는 사람은 유일했다.

“장노 덕택에 어려운 표행도 무사히 끝났소. 다친 사람도 없고 말이오.”

“아닙니다, 국주님.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당분간 푹 쉬시지요. 조만간 표행을 떠났던 모든 표사가 돌아오면, 오랜만에 잔치를 벌일 생각입니다. 우리 막둥이 놈이 돌아왔거든. 장노가 가르친 제자가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는 큰사람이 되어서 돌아왔소이다.”

팔불출의 모습을 영락없이 드러낸 천문경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어쩐지 장노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으니까.

평소 천무백이라면, 자신만큼 애정을 품은 장노가 아니던가.

한데 장노의 얼굴에선 기쁨이 보이지 않았다.

“장노, 많이 피곤하셨나 보구려. 내가 표행을 끝내고 막 돌아온 사람을 너무 오래 앉혀 놨소.”

“아닙니다, 국주님. 저도 도련님께서 돌아왔단 사실에 그저 기쁜 마음입니다.”

“허허허. 그렇지요? 장노의 제자기도 하니 말이오.”

“…….”

그렇게 천문경의 치하를 받은 장노는 서재에서 물러났다.

하나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본인의 집무실이 아니었다.

표사들의 수련이 행해지는 연무장.

이곳에서 장노는 처음으로 천무백의 수련을 담당했었다.

어설프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신체로 꿋꿋이 수련하던 천무백이 참 장했었다.

그리고 그런 천무백이.

“오셨소? 장노.”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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