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25화>
225. 쟤가 왜 저기서 나와
당계세가의 가주, 당계산은 격노했다.
“어떤 개자식이, 어떤 개잡놈이 내 아들내미를 이리 만들었느냔 말이다!”
입에 거품을 물며 손에 집히는 대로 마구 집어던졌다.
비싼 장식이나 가구나 가릴 것 없이 깨져 나갔다.
“도대체 어떤 짓을 저질렀길래, 애가 정신이 나가 버리느냐!”
당계제염은 평소엔 멀쩡했다. 오히려 오만한 모습이 사라졌으니 차라리 나아보였다.
다만 검을 찬 무사들을 보기라도 하면, 경기를 일으키며 오줌을 지려 버리니 문제였다.
아연한 광경에 당계산은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무인이 검을 잡지도 못하고, 무사를 보기만 해도 지려버린다니!
이건 살인이다. 무인으로서 생명을 죽여 버린 것이다.
무공에 재능이 있던 삼남이다. 비록 후계자 자리는 머리도 잘 쓰는 장자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만, 그렇다고 막내를 아끼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름 어여쁘기도 했다. 어떻게든 야망을 품고 무공을 익히는 모양이 제법 사내답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천룡검협! 이 개같은 자식. 가만두지 않겠다. 감히 이 당계세가를 농락해? 내 아들을 저따위로 만들어?”
당계산은 충혈된 눈을 본 구 영감은 순간 섬찟함을 느꼈다.
천룡검협이란 명성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설마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흑회에 서찰을 전하라!”
“······흑회 말입니까?”
“당계세가가 흑회에 가입하고, 상납금으로 바친 돈이 얼마인데! 천룡검협이 강해 봤자 독고패보다 강하겠느냐? 하왕 왕전유보다 강하겠느냐? 거력왕보다 강하겠느냐! 아무리 강해 봤자 수백의 흑도가 칼을 찌르는데 피조차 흘리지 않겠느냐!”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양손을 마구 휘두르는 당계산의 모습에 광기가 깃들였다.
평소 냉철하고도 잔인한 판단력으로 세가를 꾸려 온 모습이 아니다.
아들이 당한 상황에 판단력을 잃어버렸다.
구 영감은 한숨을 내쉬었다.
‘떠나야겠구나.’
손녀의 병세가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절정무인이니 어디서 돈 못 벌 리가 없다. 낭인으로 살아도 충분하다. 당계세가에 붙잡혔던 이유는 큰 빚을 졌던 이유 때문이다.
은원은 몰라도 빚만큼은 어떻게든 받아내는 당계세가니, 구 영감은 감히 당계세가에서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제 쫓아올 당계세가는 사라질 테니까.’
구 영감의 얼굴에 일순 싸늘함이 스쳐갔다.
그날 밤, 구 영감은 손녀를 데리고 당계세가를 훌쩍 떠났고, 동시에 당계산의 서찰이 흑회로 향했다.
“……천룡검협을 죽여 달라고? 재산의 절반을 상납할 테니까?”
흑회의 감찰당은 엄청난 권한을 행사했다. 흑회에 들어오는 모든 연락망은 감찰당을 거쳐 가게 되어 있었다.
천무백과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한 독고패는 감찰당에 권한을 몰아줬고, 천무백이 제 사람이라고 여기는 왕전유는 그를 대리하는 감찰당에 힘을 실어 줬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 하오문이라는 거대한 정보단체를 잿더미에서 일으켜 세운 곡지흠의 수완은 대단했다.
양측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 타며 감찰당의 권한을 강화해서 흑회를 쥐락펴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
“나참 어이가 없네. 당계세가면 산동에 몇 없는 흑도방파잖아?”
“고리대금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자금줄이 워낙 튼튼해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흑회에 가입하면서 상당한 후원금을 냈습니다.”
수하의 말에 독고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채업과 흑도는 뗼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리고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자금줄이다.
당계세가의 영향력이라면, 흑회에서 제법 큰소리칠 정도는 된다.
다만.
‘미쳤군. 천무백을 쳐 달라고?’
곡지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이게 될 줄 알았단 말인가.
물론 천무백의 무력을 정확히 모른다면 저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곡지흠은 불쌍하다는 혀를 찼다.
“당장 가용 가능한 인원을 꾸린다.”
“천룡검협을 칩니까? 그렇다면 상부에 보고를…….”
“당계세가를 친다.”
“네? 하, 하지만.”
“뭐? 엄연히 감찰하러 가는 거다.”
“하지만, 그들이 내는…….”
“뭣 하러 받아? 다 뺏어버리면 되지.”
곡지흠의 냉정한 말에 수하는 입을 쩍 벌렸다.
참으로 냉혹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곡지흠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 양반이랑 같은 편인데 어떡하라고?’
사실 같은 편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곡지흠은 쓰게 웃었다.
‘주군으로 안 부를 뿐, 사실 수하나 다름없지 않은가.’
* * *
이러다간 며느리에게 줄 선물만 마차 한 대는 나올 상황이 되자, 천무백은 결국 삼부자를 재촉했다.
능조는 그것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셨는데, 언제 꼿꼿하고 완고한 노학자였는지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차를 타고 관도를 통해 곧장 하남으로 향했다.
이때 천무백은 능조 덕을 톡톡히 봤다.
전직 한림학사라는 명성, 집안이 가진 위세까지.
관도를 통과하는 건 순식간이었고, 도중에 수로를 이용할 땐 관아에서 가장 빠른 배를 수배해 주기까지 했다.
능허가 짐짓 아버지의 명성에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벼슬과 권력이 최고 아닙니까?”
“너는 그런 벼슬과 권력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내버려두고 흑도짓을 했냐? 하긴 그러니까 머리가 나쁜 거지. 잘 선택했다. 그 머리론 벼슬은 못 할 테니.”
“······.”
말 한마디 했다가 되로 받은 능허는 침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동과 하남의 경계의 마을에 도착할 무렵.
능조가 별안간 마차를 멈추고 이곳에서 쉬어 가자고 말했다.
“왜 그래요?”
능허의 물음에 능조가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 임부에게 좋은 약재라도 사가야 하지 않겠느냐. 출산 후에 몸조리도 해야 하고. 여기 근방에 황궁 태의(太醫)의 제자가 운영하는 의약방이 있고, 내 면식도 있으니 다녀오마.”
“허······.”
어쩐지 자신보다 설영을 더 챙기는 모습에 능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의 쌓여 온 부자간의 벽이 많이 허물어진 건 저런 능조의 모습 덕분이기도 했다.
며느리로 순순히 인정하다 못해, 오히려 저보다 더 알뜰히 챙기는 모습에 능허도 적잖이 마음을 풀 수밖에 없었다.
능조의 제안에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어르신. 해가 지기 전에 다음 현에는 도착 못할 거 같으니, 여기서 쉬고 가는 게 낫겠습니다.”
“고맙소, 천 공자.”
아무리 좋은 마차여도 하남까지 가는 여정이 편치 않을 텐데도, 노구를 이끌고 움직이는 능조는 의욕적이었다.
“능허야. 나는 잠시 표국에 좀 다녀오겠다.”
“아, 여기에 표국 산동 지부가 있지요? 저도 같이 갑니까?”
“됐다. 아버지나 잘 모셔라.”
천무백이 따로 표국 지부로 향하고, 능허는 능조를 모시고 의약방으로 향했다.
무려 황궁 태의의 제자가 운영하는 의약방이다.
능조가 벼슬을 살며 만들어 놓은 인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의약방의 주인이 맨발로 달려올 정도였다.
제갈설아는 새삼 감탄이 들었다.
어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위해 무려 태의의 제자로부터 약재를 구할까.
“아버님이 참 자상하신 것 같아요.”
“누가? 우리 아버지가?”
능허가 황당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저었다.
“늙어서 저런 거지, 젊을 땐 안 저랬소.. 쯧.”
“그래도 다 정이 있어서 저러시는 거죠. 오히려 저도 은근히 설영언니가 부러운 걸요.”
“부럽다고?”
“세상에 어떤 시아버지가 저렇게 알뜰살뜰 챙겨줘요? 엄청 든든할 거 같은데.”
능허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아버지를 아직은 인정하기 싫어하는 듯한 상반된 감정이 겹쳐 보였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나았다. 자각은 못 하고 있지만, 자연스레 아버지라고 꼬박꼬박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친해지셨나 봐요. 우리 아버지라고 꼬박꼬박 부르고.”
“······허.”
떨떠름해진 능허는 새삼 빙글거리며 웃는 제갈설아가 얄미웠다.
“뭐 부러워할 게 있나. 소저도 봤잖소. 청성표국 국주 양반.”
“네? 봤죠. 저번에 진법 설치할 때.”
“그 양반 주군을 끔찍이 아끼는 거 봤으면 우리 아버지 행동은 부럽지도 않을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청성표국 국주라면 우리 아버지보다 며느리를 더 끔찍하게 아껴 줄걸? 거의 딸아이처럼? 그러니 뭐가 부럽소?”
능허가 능글맞게 웃자 순간 제갈설아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다 고개를 휘휘 돌리곤 천무백이 같이 오지 않음을 뒤늦게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리곤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울상을 지었다.
“티······ 나요?”
“그걸 말이라고. 엄청.”
능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능허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지금까지 엄청 티가 났다는 건데.
갑자기 제갈설아는 악기점에서 새삼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랐다.
‘그때 내가 뭐라 했었지?’
천무백이 워낙 힘들어보여서 위로 겸 응원으로 말 한마디 했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으으! 생각해 보니 이상하잖아?’
제갈설아는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이야기 맥락 없이 그런 말을 왜 해?’
바보다, 바보. 바보야.
혈귀곡과 싸우는 천무백이 힘들어 보여서 같이 싸우겠다고 말해 주려던 건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떻게 듣냐에 따라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이 아닌가.
‘왜 내가 주어를 빼 먹었을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묘한 말이었다.
곁에서 계속 함께하겠다니.
아니······ 강호의 평화를 찾을 때까지 함께 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얼핏 들으면 마치······.
“으아! 난 몰라!”
“또 왜 그래? 소저.”
“몰라요. 아저씨는 신경 쓰지 마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 쓰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데······.”
“쫌!”
“큭큭큭.”
제갈설아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진 능허가 킥킥 웃어댔다.
얼마나 얄미운지, 제갈설아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티 나면, 저 사람은 대체 왜······?”
말끝을 흐렸지만,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들을 리가 없는 능허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아나. 검과 무림, 강호의 모략에는 철두철미하지만, 모든 게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어? 소저. 모자른 부분이 있는데, 하필 딱 그 부분일지도 모르지.”
“······.”
* * *
“하남만 도착하면 마중을 나오겠다는군.”
“그래요?”
“아, 소저. 소저에게 온 서찰도 있소.”
“제 서찰이요?”
“소저의 시녀인 유아가 표국에 있다는군.”
“유아가요?”
제갈설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저가 먼저 훌쩍 절강으로 가서, 뒤늦게 호위할 무사들과 곁에서 보좌할 시녀들이 따라오려고 했는데 소식을 듣고 우리 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오.”
“아하······.”
산동과 하남은 붙어 있으니, 천무백이 곧 표국에 복귀하는데 굳이 산동으로 오지 않고 표국에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유아, 이 녀석. 이거 아주 신났겠네요.”
“왜 그렇소?”
“표국에 공자님 몸종 있잖아요.”
“점박이 말이오?”
“네. 그때 점박이가 준 선물을 늘 품에 품고 다녔거든요.”
“아하.”
그랬었지. 향낭까지 만들면서 선물해 줬던가.
그러고 보니 점박이가 슬슬 장가갈 때가 되지 않았나.
처음 각성하고 눈을 떴을 때 본 얼굴이 점박이인지라, 또 모든 걸 다하는 헌신적 태도에 천무백은 적잖이 점박에가 늘 마음에 걸렸다.
‘뭐. 서로 마음만 있다면야.’
그리 생각하며 마차를 달려 산동성을 벗어나 하남성에 접어들 무렵.
저 관도 너머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상당 숫자의 기마여서 능허가 경계심을 표했지만, 이내 먼지 속에서 드러나는 깃발을 보고 경계를 풀었다.
“역시. 주군네 아버지랑 누이께선 주군이 아직도 품 속 아이처럼 보이나 보오. 저리도 많은 숫자를 마중이라고 보내다니.”
“저만한 숫자를 끌고 오는 거라면, 허 표사가 왔겠네.”
“그 양반 실력 좀 늘었으려나.”
아무래도 마중을 나올 만한 인사로는 허성이 제격이었다.
직위도 직위이거니와 천무백과 친근한 인사니까.
단순히 마중이라도 저만한 인원을 끌고 나올 정도라면 평범한 표사가 책임자일 수는 없었다.
허성을 언급하자 능허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비슷한 실력 수준이었던 둘이었기에 능허는 은근히 허성의 무위 수준과 자신을 곧장 비교하곤 했다.
‘능허가 훨씬 앞서겠지. 이젠.’
허성도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고, 무소의 뿔처럼 노력하는 힘이 있다.
다만 천무백과 함께 강호를 주유하며 여러 깨달음을 검에 접목한 능허의 성장을 따라갈 수는 없으리라.
더욱이 최근 능허의 성장은 눈부셨다.
아버지와 화해를 해서일까.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어진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편안해졌는지 눈에 띌 정도로 검이 빨라졌고 날카로워졌다.
‘이 정도 속도라면······ 죽기 전엔 입신지경은 밟겠지.’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능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날 보고 그리 웃습니까?”
“내가 사람 하나 만들었구나 싶어서.”
“······.”
능허는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고정했다.
“······어?”
하나 능허의 입에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표사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달려오는 이의 얼굴이 먼지 너머로 서서히 보였다.
안력을 돋워 얼굴을 확인한 천무백은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쟤가 왜 저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