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24화>
224. 연하 취향인가?
“그러니까, 저 어린 소저가 장 총표두님의 사질(師姪:사형제의 제자)이란 거죠?”
듣기 좋은 목소리다. 저런 목소리로 시라도 읊으면 꽤 들을 만하겠지.
하지만 능허는 이제 저 목소리가 아주 지긋지긋했다.
“대체 몇 번을 물어? 장노의 사질이라고, 마침 장노 만나러 간다고 해서 주군이 같이 가자고 데리고 온 거라니까.”
“진짜죠?”
제갈설아가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크게 뜨자 능허는 내심 당황했다.
사실 능허도 천무백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능허의 눈치가 어디 가겠는가. 내면에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다는 건 충분히 짐작했다.
‘검 겨누고 표정 정색했던 거 보면 다른 이유도 있긴 한데.’
소리를 차단했으니 자신도 들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니까 그러네.”
“흐음. 그러면 뭐······.”
천무백이 철방에서 뜬금없이 웬 어린 여자를 데리고 오자, 제갈설아는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예쁘장한 외모에 서역의 피가 섞인 듯 이국적인 느낌까지.
천무백의 부탁대로 천하논전에서 마무리 연설까지 하느라 얼마나 바빴는가.
그런데 철방에 갔던 천무백이 유서령을 데리고 오니, 왠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다행히 제갈설아도 청성표국에 머무를 때 봤던 장노의 사질이란 말에, 감정이 어느 정도 가시긴 했다.
그래도 묘한 게 툭툭 신경을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있단 말이지.’
여자의 촉이라고 해야 할까.
알게 모르게 천무백이 유서령을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가령 능허를 시켜서 유서령 곁을 떠나지 말라는 둥.
사실은 보호가 아니라, 능허에게 감시하라는 역할을 맡긴 거지만 말이다.
그러다 문득 정의맹에 있던 채가령이란 어린 소녀가 떠올랐다.
뛰어난 의원이자 약 제조에 훌륭한 능력을 갖춘 채가령이란 친구가 있었다.
제갈설아는 정의맹에 머물면서 채가령이 생각보다 천무백과 접점이 깊다는 걸 깨달았다.
‘구해 주고, 비다라가 된 스승도 죽이지 않고 도와줬다지?’
단순히 생명의 은인이니 흠모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만.
천무백 얘기가 나오면 얼굴을 붉히는 광경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 천무백을 맨 처음 봤을 때, 약을 담은 보따리에 새겨진 자수도 채가령이 했으리라.
제갈설아는 새삼 위기감을 느꼈다.
채가령과 유서령의 공통점.
‘······연하 취향인가?’
새삼 자신이 천무백보다 네 살이나 나이가 많다는 걸 자각하게 된 제갈설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뭘 혼자 그리 심각해?”
“저는 왜 너무 일찍 태어난 걸까요.”
한숨 쉬는 제갈설아를 보며 능허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 *
천하논전은 끝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방향성이 정해졌다.
그러나 확실한 공의(公議)가 나오려면 긴 시간이 걸릴 터.
천무백은 슬슬 하남으로 갈 준비를 꾸렸다.
“이거야 원, 생각보다 일행이 늘어났습니다.”
“어쩌겠냐. 며느리 사랑은 장인어른이 한다는데.”
“흠흠. 뭐, 고맙습니다.”
능허가 멋쩍어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천무백과 능허 둘이라면, 벌써 출발했겠지만 조금 늦어지는 이유가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있었다.
“아버지, 노고에 하남까지 가시다가 몸이 축날까 염려됩니다. 제가 형님을 따라 다녀오겠습니다.”
“이놈, 곡아! 네 아비를 우습게 보는구나!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천하를 떠돌며 스승을 찾던 나다! 고작 하남까지 가는 게 뭐가 힘들겠냐!”
능허의 아버지인 능조와 동생 능곡도 하남으로 가는 여정에 동참했다.
어린 능곡은 모를까. 능조는 환갑이 한참 전에 지난 고령이다.
한데도 노익장을 발휘하며 하남으로 가겠다는 고집을 내세웠는데, 천무백으로서도 만류할 수 없었다.
일단 천하논전에 참여할 수 있게끔 도움을 받았고, 며느리가 출산을 앞뒀는데 찾아가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명분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급할 건 없어. 때론 돌아갈 때도 있어야지.”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간 유서령을 좀 더 캐 본 결과, 자신의 추측이 거의 사실에 근접한다는 걸 알게 됐다.
‘장노가 검종에서 중요한 위치인 게 틀림없어.’
유서령의 스승이라는 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검종의 몇 안 남은 마인 중에서도 상위 계층으로 보인다.
그런 자의 사형이 바로 장노로 추정된다.
거의 확신했다.
하남성의 검종에 속한 장씨성의 마인.
아무리 생각해도 천무백은 장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 검종이 혈귀곡의 손을 잡느냐에 대한 결정을 맡길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할 터.
예상을 벗어나는 사실이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중요한 건 아직 검종의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
다른 마인과 다르게 천무백도 검종은 조금은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미련한 놈들. 다 내 탓이지. 내 탓.’
종단을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을 추종하는 무인이 모여 자연스레 만들어진 검종.
천무백은 검종의 종주라는 자각이 별로 없었다.
그땐 귀찮았을 따름이다.
경천혼공의 불완전함에 부득이하게 마공을 익혔고 마인이 되었으니까.
마인이 되면 마성 자체에 물들게 되어 있고, 본래의 인성이 악해지기 마련이다.
수많은 심마를 마음속에 품은 상태였으니,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를 어떻게 도와줄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다.
마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검종이 핍박받는 걸, 특별히 도와주지 못했다.
추후의 삶에서도 매번 마도는 적이었으니까.
적지 않은 부채감을 가진 천무백은, 장노의 선택에 맡길 생각이었다.
‘내 울타리 안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그 이후 검종을 어떻게 대할지 확실해지리라.
하여튼 검종의 방향성이 장노에게 달려 있으니, 아직 여유를 부릴 시간은 있다.
천무백은 슬쩍 능허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런 비녀도 좋아요. 설영 언니는 이런 느낌을 좋아하실 거예요.”
“그렇소? 허허. 이 늙은이가 며느리에게 선물해 봤어야 알지.”
“저도 설영 언니에 대해서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어디 보자. 이런 것들도 너무 예쁘지 않아요? 딱 여자들이 좋아할 느낌의 장신구에요.”
며느리에게 전해 줄 선물을 산다고 시장에 온 능조 옆에 찰싹 붙은 제갈설아가 쫑알쫑알 조언을 해 줬다.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니,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나서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와서 직접 골라야죠, 이런 건.”
“응? 뭐······.”
“아저씨, 설영 언니한테 제대로 선물한 적 없죠? 이럴 때 점수 따 놔야죠. 어서요.”
천무백 옆에서 그저 바라만 보던 능허가 뻘쭘한 기색으로 좌판으로 걸어갔다.
사실상 제갈설아의 독무대였다. 능 씨 삼부자는 모두 여자한테 제대로 된 선물을 해 본 적이 없는지라, 제갈설아의 조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와. 이 잠(簪) 너무 이쁘지 않아요?”
순간 좌판에서 비취로 만든 나비 모양의 비녀를 발견한 제갈설아가 눈을 빛냈다.
그러자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건 너무 청초해 보이는 느낌이라. 또 우리 설영이는 잠(簪)보단 채(釵)를 주로 쓰더라고.”
비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잠과 채였는데, 잠은 길쭉한 몸체에 둥근 머리를 가졌고, 채는 반원형의 둥그런 몸체에 장식이 달린 형태였다.
“흐응. 이거 진짜 예쁜데.”
능허가 예상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제갈설아는 아쉬운 기색으로 나비잠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제갈설아가 말했다.
“악기 연주하시는 거 좋아하잖아요? 악기를 선물해 가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능 씨 삼부자가 반색했다가 능곡이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악기란 게, 문외한이면 선물하기가 썩 쉬운 게 아닌지라······.”
그러자 제갈설아가 눈을 빛냈다.
“천 공자님! 공자님이 악기 연주 잘하시던데······.”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던 천무백에게 시선이 쏠렸다.
반짝이는 제갈설아의 눈빛과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능허의 시선, 거기에 능 씨 삼부자의 시선에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기점으로 갑시다.”
* * *
참 묘한 기분이다.
천무백은 근래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꽤 바빴군.’
절강으로 가서 흑회에서 제법 큰일을 겪었고, 이후에는 천하논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머리를 한참 굴렸다.
거기에 결국엔 성물을 얻어 선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 왔다.
그래서일까.
천무백은 악기점에 들어간 순간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무수한 전생 중에서도 이번 삶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이점이다.
온갖 검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던 그가, 이제는 악기점에서 편안함을 느끼니까.
“어떤 악기가 좋을까요?”
능허는 아버지와 동생을 데리고 가족들과 정이라도 나누겠다고 제갈설아 보고 둘이 다녀오라 했다.
천무백은 주위를 슥 둘러보다 문득 비파 앞에서 멈췄다.
“이게 좋겠군.”
“음? 딱 보기만 해도 알아요?”
“소저도 웬만해선 검을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감이란 게 오지 않소?”
“아하. 공자님껜 검과 악기가 비슷하단 의미라는 얘기네요.”
“뭐,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게 가장 느낌이 좋소.”
“그래도 악기 소리 한번은 들어봐야 하지 않아요?”
천무백은 흘깃 반짝이는 눈을 바라봤다. 내심 그 속셈이 훤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연주하는 걸 들려준 적은 없었다.
최근에는 워낙 바빠서 악기 연주 같은 건 안 했으니까.
이제는 경천혼공의 경지가 상승에 올라서, 굳이 악기를 연주하지 않아도 내기의 흐름이 원활했으니까.
애당초 악기를 연주하며 내기를 쌓는 건, 속도와 양이 월등해서다.
다만 지금 천무백의 경지는 단순히 축적한 내기의 총량이 많아지는 것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이제는 치열한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천무백은 천천히 비파를 잡았다.
제갈설아의 기대 어린 눈빛을 뒤로하고, 천무백은 눈을 감았다.
‘뭐가 좋을까.’
머릿속에 여러 선율이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천무백은 별안간 능 씨 삼부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며느리 선물 때문에 친하지 않던 삼부자가 똘똘 뭉치는 모습이 퍽 평안해 보였다.
무수한 전생 중에서, 천무백은 꿈꿀 수 없는 평안한 모습이었다.
매 삶에서 칼을 잡았고, 치열하게 싸웠으며, 오로지 검극을 바라봤다.
어쩐지, 천무백은 그런 평범한 광경이 부럽다는 감정이 불쑥 들었다.
자연스레 천무백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비파의 현을 뜯었다.
징-!
“······!”
청명한 음이 울리는 순간. 제갈설아는 숨을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귀를 기울였다.
꽤 유명한 곡조였다.
가난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의미를 품은 가사의 곡조.
경쾌하면서도 귀가 즐거운 음율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부드러우면서도 통통 튀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혀지는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하나 제갈설아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게······ 서글펐던 노래였나?’
묘했다.
경쾌하고 즐거운 선율 속에 무거움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닿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한탄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천무백은 가볍게 연주를 마쳤다.
“이거면 좋은 선물이 될 거 같소.”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비파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얼굴에 떠오른 피곤한 기색을 보며, 제갈설아는 무언가 말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힘들어 보여.’
매번 당당하고 자신 넘치던 천무백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짙은 피로에, 제갈설아의 마음속에 불쑥 안타까움이 치솟았다.
‘그래. 천 공자님은 홀로 강호를 위해 마인과 계속 싸우고 있으시지. 지독히도 힘든 싸움을.’
그제야 새삼 천무백이 처한 상황을 떠올린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곁에서 계속 같이 갈게요.”
“······?”
“천 공자님 옆에서 함께할 테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요.”
천무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꽤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