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23화>
223. 내 울타리 안에 있소?
죽는다.
선명한 글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조금의 비웃음도 조롱도 아닌 그저 무심한 목소리였다.
입가에 띄워진 선명한 미소가 심장을 손으로 움켜쥐는 듯이 강한 압박으로 전해져 온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는 탄성이 절로 나올 미소였지만, 무심한 눈빛과는 완벽하게 대비를 이뤘다.
눈을 마주한 순간 유서령의 몸은 꽁꽁 얼어붙었다.
싸늘함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경고야…….’
선명한 경고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랬다. 상대는 천룡검협.
홀로 서서 오로지 마인들을 멸살하는 존재.
그리고 자신은.
‘나는 마공을 익혔지.’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유서령의 몸이 거칠게 경련했다.
유서령은 알고 있다. 자신의 모든 마공을 드러낸다고 해도 기껏해야 절정.
물론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십대 중반에 절정이란 경지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지만.
마공으로만 이뤄 낸 경지다. 마공을 익혔음이 만일 강호에 밝혀진다면 유서령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작금의 강호는 마인들과 이미 전쟁에 돌입했다.
혈귀곡이 소림을 습격했을 때부터, 호사가들은 새로운 정마대전이 시작되고 있다고 떠들었다.
그런 가운데 마공을 드러낸다? 유서령은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어차피 천룡검협이 마인들을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마인이라면 끝까지 추적하는 게 천룡검협이다.
강호에 자자하게 퍼진 천룡검협의 행적을 떠올린 유서령은 쓴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알아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차피 죽일 거잖아?”
유서령의 표독한 목소리에 천무백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애써 날을 세우지만 목소리에 스며든 떨림은 숨길 수 없다.
‘잔뜩 겁에 질렸군.’
겁에 질렸지만, 억지로 포식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조그만 동물처럼 보였다. 천무백은 기세를 서서히 거둬들이며 경고했다.
“계속 검을 겨누고 있으면 진짜 죽일지도 몰라.”
“······.”
“정말 죽일 생각이었다면, 네가 검을 뽑기 전에 이미 손이 잘리고 목이 잘렸겠지.”
“······!”
유서령은 분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차마 부정하지는 못했다.
당장 알려진 천룡검협의 경지만 해도 자신이 감히 상대할 수 없다.
더욱이 직접 목격한 수준은 알려진 바보다 더했다.
‘단 한 합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단순히 기파만으로 주위의 소음을 차단하는 지고한 경지.
내공의 중후함이 얼마나 깊어야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내공의 수발이 얼마나 자유로워야 가능할까.
깊이 존경하는 스승도 감히 하지 못할 경지다.
뿐이랴.
눈으로 쫓지도 못하고 남겨진 잔상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던 검격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막을 수 있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불가능이다. 아예 하수(下手)면 모를까.
숨겨진 마공까지 드러내면 유서령은 절정의 무인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지만, 대보지도 않고도 차이가 심하면 알 수밖에 없다.
눈으로 쫓지도 못하는 걸 어찌 피하고, 막을 수 있겠는가.
‘진즉 죽일 수 있었어. 철방 밖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천무백의 말대로였다.
정말 단순히 마인임을 알아서 죽이려고 했다면, 진즉 죽이고도 남았으리라.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호의를 베풀었다. 당계제염으로부터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줬고, 좋은 검까지 얻게 양보했다.
이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잠깐만. 내가 검종에 속한 건 어떻게 알지?’
유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류칠종.
각각의 마공과 품은 마기의 세밀함이 다르다지만, 마인이 아닌 이들에겐 다 뭉뚱그려 비슷해 보일 뿐.
어떻게 구별해서 검종이라고 딱 짚었지?
하물며 직접 마공을 선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런 유서령의 시선을 눈치 챘을까.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중단전을 활성화했다.
웅, 웅, 웅, 웅.
귀에는 들리지 않으나 심상으로는 전해지는 공명음.
심장의 맥동이 빨라지며 투명한 선기의 끈이 외부로 발출된다.
오로지 천무백에게 보이는 투명한 실은 목젖에 닿은 검을 밀어냈다.
“······!”
유서령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검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점점 밀리는 광경에 기함을 토했다.
‘내기? 아니야. 내공이 아니야.’
유서령의 동공이 크게 진동했다. 내기가 아니다. 유서령이 힘껏 검신에 내기를 밀어 넣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힘에서 밀리는 게 아니라, 힘겨루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전혀 관계없는 무언가가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바로 선기였다.
‘나쁘지 않은데.’
아직 세심한 조정은 어렵지만, 천무백은 내심 만족했다.
‘이게 숙달되면, 선기만으로 이기어검도 가능하겠군.’
물론 손으로 검을 다루는 것처럼, 세심한 조정은 쉽지 않으리라.
그래도 천무백은 자신 있었다.
중단전의 재생심법으로 내기처럼 다룰 수 있게 된 선기다.
내기처럼 다룰 수 있다면야.
세밀한 운용에 있어서 천하에 천무백을 따를 자가 누가 있으랴.
치열한 감각과 무수한 전생동안 쌓인 관록.
어쩌면 천무백만이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러니까, 검부터 치우고 얘기하자고.”
천무백의 미소에 유서령은 그저 넋 나간 사람처럼 힘없이 아래로 향하는 자신의 검끝을 바라봤다.
“맙소사······.”
형언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밀려들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당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비록 길지 않은 삶이지만, 그래도 그간 쌓아 온 모든 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마공은 쓰지 마. 소리는 감춰도 기운은 감추기 어려우니까. 여기 모든 사람에게 마공을 익혔음을 공표하고 싶지 않다면.”
그제야 유서령은 확신했다. 천무백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면······.
“대체······ 당신은 어떻게 아는 거죠?”
“질문이야?”
천무백이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서로 질문을 하나씩 번갈아서 하는 걸로 하지. 우선 내 질문에 먼저 답해. 숨어 사는 검종이 강호에는 왜 나왔지?”
천무백의 물음에 유서령이 흠칫 떨었다.
‘다 알고 있구나.’
말만 마류칠종이지, 검종은 사실상 마도에서 배제된 종단이다.
마도 내에서도 배신자로 핍박받고, 강호에서는 마인이라며 멸시 당한다.
흑과 백, 양측에서 지탄받는 존재들. 하여 절대로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패천검마가 남긴 흔적을 이을지언정, 강호에 나서지 않는다.
천무백은 그것이 의문이었다.
‘표국도 강호에 발을 걸치긴 했지만, 완전한 강호는 아니지. 그러니 굳이 따지면 장노가 제대로 강호에서 사는 게 아니지.’
한데 유서령은 육가철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는 행색이었다.
‘강호를 주유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란 말이지.’
천무백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단순히 검을 구하기 위해 나온 행색이 아니다. 충분히 오랫동안 풍찬노숙을 버틸 여장을 꾸린 행색이다. 강호를 나선 초촐의 전형적인 행색.
그래서 처음부터 천무백은 유서령을 주목했다.
아직까지 검종은 혈귀곡과 관계가 없음이 확실했다.
한데 만일.
‘본격적으로 혈귀곡과 손을 맞춰 나선다면?’
마도 내에서도 배신자로 치부되며 핍박받는 검종이 혈귀곡과 연수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천무백이지만.
‘절대적인 건 없는 법이지.’
작금의 혈귀곡은 절반의 세력으로 팍 쪼그라든 상태다.
독마마저 천무백이 죽였으며, 네 개의 성에 각각 포진되어 있는 혈귀곡의 거점도 천무백이 모두 파괴하고 전부 한줌 핏물로 만들어 버렸다.
세력이 줄어든 혈귀곡이 순순히 포기하고 모습을 감출까?
근래 혈귀곡은 조용했다. 언제 소림을 공격하고 그리도 난동을 피웠냐는 듯 잠잠하기 짝이 없었다.
만일 그것이 새로운 세력을 일궈 내려는 준비단계라면?
바로 검종을 품에 끌어들여 세력을 재정비하려는 목적이라면?
거기까지 계산이 미치자 천무백은 어떻게든 유서령과 접점을 만들고 정보를 캐내려고 마음먹었다.
다만 곁에 두고 길게 볼 생각은 없었다. 만일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장노······.’
청성표국엔 장노가 있다.
그렇다면, 천무백으로선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까.
하여 천무백은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유서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스승님이 시키신 일 때문이에요.”
“자세히.”
“······외부인이 찾아왔어요. 스승님과 아는 사람처럼 보였죠. 친해 보이진 않았어요. 오히려 스승님이 꼼짝도 못 했으니까. 외부인이 떠나고 나서 한참 침묵하시더니, 저에게 사백(師伯)님께 얘기를 전하라고 하더군요.”
“사백?”
“답은 끝났어요. 제 질문이에요. 당신은 대체 검종에 대해서 어떻게 알죠?”
“천룡검협이니까.”
“······그게 답이에요?”
“마도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검종을 모를 수 있겠나.”
“하지만······.”
“알아. 검종은 마도에서 배제됐다는 거. 그렇다쳐도 마공을 익혔음은 부정할 수 없지.”
유서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백에게 전하라고 한 말이 뭐지?”
“후우······. 종단을 살릴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전하라고 하더라고요.”
“······.”
천무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순간 머릿속에서 모든 그림이 맞춰졌다.
스승을 찾아왔다는 외부인들은 아마도.
‘혈귀곡놈들이겠지. 검종을 포섭하려는 거야.’
다만 다행인 건, 사백이란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전이란 사실이다.
‘사백이 아마도 현 검종의 우두머리겠지.’
그의 선택에 따라 검종이 혈귀곡과 손을 잡느냐가 정해지리라.
하면.
‘그 사백을 찾아야겠군.’
찾는 게 우선이다.
그 뒤로 죽일지 말지는 결정에 따른다.
검종은 천무백이 패천검마 시절 직접 만들어 낸 종단.
물론 만들고자 해서 만든 건 아니다. 검마의 무력에 반한 마인들이 따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종단이 만들어진 것이니까.
어쨌든 자신의 유지를 이은 자들이 아닌가.
천무백은 그들이 혈귀곡과 손만 잡지 않으면, 굳이 멸할 생각이 없었다.
장노가 표국 안에 있음에도 가만히 내버려 둔 이유였다.
오히려 그가 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사백이 누구지?”
“저도 몰라요. 전 저에게 사백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으니까요. 다만 하남에 있다는 것만 알아요.”
“하남? 그런데 왜 산동에 왔지?”
순간 천무백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유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요. 와중에 육가철방의 병기를 구할 수 있단 소식에 달려온 거예요.”
“그럼 하남에 사백이 있단 말이지?”
“장 씨 성을 쓰는 검객을 찾아야 해요.”
“······.”
“이제 제 질문이에요. 어째서 날 살리려는 거죠? 저한테 정보를 캐려고요?”
“죽일지 말지는 추후에 고민해야겠어.”
“네?”
“가지. 사백에게로.”
“무슨······.”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가거든.”
“누군지 안다고요?”
“아마도 내 집에 있는 양반 같단 말이지.”
“······집에 있다고요? 가족인가요?”
순간 유서령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사백의 가족이라면 자신이 크게 예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니까.
하나 천무백은 어쩐지 순수한 반응에 그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가족이라······ 글쎄. 가족이 될지는 모르겠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장노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종단을 살릴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는 혈귀곡의 물음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정해진다.
천무백이 만들고, 세우고, 지키는 커다란 웉타리.
‘내 울타리 안에 있소? 장노.’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