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21화>
221. 네 목숨 값
당계제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무리 봐도 별 거 없는 놈이다.
허리춤에 칼 찼다고 다 무림인은 아니다. 날카로운 내기 한 자락 느껴지지 않고, 기세나 분위기 모두 평범하다.
별 볼 일 없다는 걸 직감한 당계제염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죽고 싶어서 끼어든 거냐? 아니면 곤경에 처한 여인을 구하려는 정의의 사도 흉내라도 내고 싶어서?”
당계제염의 기세가 칼이 되어 천무백에게 집중됐다.
나름 제법이었다. 후기지수인 이유가 있었다. 물론 강호를 주유하며 온갖 고수들을 만나온 천무백에겐 가당치도 않는 수준이긴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리 말하는 거 보니 너 스스로도 괜한 여자를 겁박하고 있다고 내심 생각했나 봐?”
당계제염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농락하는 재주에 당계제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꺼져라. 괜한 오지랖이 너 목숨을 재촉하는 길이니까.”
“그 말이 본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라곤 생각 안 해 봤어?”
당계제염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은 얼굴로 칼자루를 쥐었다.
하나 뽑지는 않았다.
“공자님, 우선 참으십시오!”
“미쳤어? 구 영감? 말리지마. 내가 저놈 모가지를 따 버려야 속이…….”
“자중하시오! 공자!”
“……!”
구 영감의 호통에 당계제염이 놀란 표정으로 멈췄다.
자신에게 큰소리 한번 못 내던 사람이 잔뜩 굳은 얼굴로 기세를 내뿜으니, 당계제염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저 하인처럼 부리던 구 영감이 만류하는 꼴에 당계제염은 분통이 터졌다.
“구 영감? 미친 거지?”
구 영감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방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위험합니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면 가주께서도 좋지 않게 보실 겁니다. 산동에서 육가철방의 영향력, 나아가 강호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
당계제염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칼자루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어서 아버지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차후 후계자 자리는 꿈도 못 꿀 테니까. 하나 머릿속으로는 이해해도, 감정은 풀리지 않았다.
“조용히 검 값만 치르고 돌아가시지요.”
“흥. 노인데. 일 끝나고 보자고. 오늘 범한 무례 그냥 넘어갈 생각 없으니까.”
“……죄는 달갑게 받겠습니다.”
“쯧.”
당계제염의 혀 차는 소릴 들으면서도 구 영감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렸다.
철방에서 타인에게 병기를 휘두르는 게 엄격하게 금지됐다.
다만 그게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구 영감이 당계제염을 만류한 이유는 아니다.
구 영감은 흘깃 천무백을 쳐다봤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어!’
수십 년 무림에서 살아온 노강호(老江湖)만이 느낄 수 있는 기묘한 무언가가 가슴을 찌른다.
두 눈 씻고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도 않는다.
평범하다. 어떤 특이점도 없다.
그래서 이상했다.
기품 넘치는 태도와 한번쯤 시선이 절로 가는 미색.
낮게 깔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의복 너머로 은은하게 드러나는 잘 짜인 근육의 형태까지.
어느 하나 평범하다고 느낄 게 없는 요소다.
모든 요소를 갖추고도, 구 영감이 받은 느낌은 지극한 평범함이었다.
기세도, 분위기도, 모든 것에서 특이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오히려 강한 위화감을 안겨 줬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구 영감은 칼을 뽑으려는 당계제염을 막았다.
일류의 당계제염이라면, 내공 한줌 느껴지지 않는 저 평범한 이를 단숨에 베리라.
그래서 상대를 걱정해서 막았는가? 아니면 변명한대로 가주의 귀에 들어갈까 막았는가?
둘 다 아니다.
‘난 죽기 싫다.’
그랬다. 당계제염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리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비단 당계제염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당계제염이 당하면 호위를 맡은 이상, 그리고 손녀딸이 당계세가에 있는 이상 자신은 당계제염을 위해 칼을 휘둘러야 했으니까.
검을 휘두르는 건 두렵지 않다. 강호를 거쳐 오며 수없이 검을 맞댔으니까.
하지만.
‘개죽음은 싫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왜 그런 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나 수십 년 노강호의 관록이 그리 행하게 했으니, 구 영감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
언뜻 스쳐 가는 천무백의 표정을 본 구 영감의 눈이 부릅떠졌다.
왠지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떠오르자마자 사라졌다. 구 영감은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
‘설마 기다린 건가?’
무림인이 여차하면 칼부터 휘두르는 인상이 강하지만, 때에 따라선 명분이 중요하다.
가령 검을 휘두르는 게 금지 되어있는 철방에서처럼.
무림인에게 명분은 아주 간단하다.
정당방위.
진검을 휘두르는 건 곧 상대를 죽이겠단 마음을 먹은 것이다.
만일 당계제염이 검을 뽑았다면, 천무백은 명분을 얻는다.
‘죽여도 무방할 명분을.’
세상 어떤 무림인이, 아니 정파의 명숙들이어도 당연한 일이다.
누가 먼저 검을 휘두르면,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 강호인들의 삶.
하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정당방위라는 정당한 명분 앞에서는.
부르르르!
‘설마…….’
그런 생각이 들자 구 영감은 천무백이 불현 듯 두려워졌다.
하여 한시라도 빨리 검을 취하고 나가는 게 살길이었다.
구 영감이 당계제염을 대신해 나섰다.
“검을 구매할 자격을 논한다면, 그 자격의 기준은 어떻고, 또 누가 심사하는 것이오? 만일 단순히 병기 판매를 꺼려서 그런 말을 늘어놓은 것이라면 외려 그것이 철방의 규칙을 어기는 것일 터. 병기의 값을 치를 테니 넘기시오.”
구 영감이 직원을 압박하자 당계제염이 피식 웃었다.
“그래. 말 잘하네. 구 영감. 나 그렇게 무도한 사람 아니다? 돈 많이 내놓을게. 검 넘겨.”
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보니 유서령은 여전히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뿐 나서지 못했다.
아무래도 값을 치를 돈이 없겠지.
괜히 뻗대다간 상단에서 말단인 직원으로선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싶어서 결국 검을 넘겼다.
아니, 넘기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나도 구매의향이 있는데?”
“……!”
당계제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내 인내심이 툭 끊기는 기분이었다.
“야. 너 진짜 뒈지고 싶냐?”
“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해 주는 재주가 있구나.”
“이 미친 새끼가. 너 돈은 있냐고.”
행색을 보니 제법 돈 좀 만지는 집안인 거 같아서 당계제염은 내심 긴장했다.
“곧 생겨.”
“곧? 지금은 없다고? 하. 이런 같잖은 새끼.”
당계제염이 한껏 비웃었다.
“대충 어디 칼 한번 잡아보고 강호인 흉내 내보려는 놈 같은데. 보지 않아도 알겠다. 네놈 사문이나 스승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말이다. 흐흐. 아니, 스승이란 놈이 있긴 하냐?”
천무백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오히려 딱딱하게 굳은 건 구 영감이었다.
‘아뿔싸…….’
강호와 무림 운운하지만, 당계제염도 애송이다. 산동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아니 산동무림에서도 뭔가 제대로 활약해 본 적 없는 우물 안 개구리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한 발언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사문과 스승을 욕하는 건, 개인을 모욕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공격이다.
차라리 제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스승이 욕보이는 걸 참지 못하는 게 무림인 법.
한마디로 스승과 사문을 욕하는 건 무림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당장 칼부림이 나도 할 말 없는 공격. 차라리 검을 휘두른 게 남자다운 거지, 이건 뭣도 아니다.
구 영감은 황급히 천무백을 바라봤다.
‘……어?’
순간 천무백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번지는 미소.
싸늘함이 구 영감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돈이야 곧 생긴다니까.”
“나랑 말장난하자는 것이냐? 누구한테서 돈이라도 빌리려고? 흥. 난 뭐가 되든 너의 두 배를 내마.”
“빌리는 건 아니고. 너한테 받아내야지.”
“뭐?”
“네가 얼마로 값을 치르든, 그것보다 더한 값을 치르면 되잖아.”
당계제염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끝까지 자신을 능멸하고 우롱하는 자태에 당계제염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당계제염이 이를 악물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너 목숨 값보다 더 비싸진 않겠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뜻을 이해한 당계제염은 이성의 끈이 툭 끊기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냅다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지잉!
귓가에 꽂히는 소음이 아니라, 뇌를 통째로 울리는 기묘한 파열음.
파열음이 뇌를 울리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
세상이 검게 변했다.
칠흑.
먹물을 부어버린 것처럼 어둠이 덮쳤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툭툭 끊긴다. 인지능력이 형편 없어지고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잠식(蠶食).
어둠에 잠식당한다. 묵빛은 빠르게 덮쳐온다.
코앞까지 묵빛이 도달한 순간. 어둠 속에서 대비되는 새하얗고 흉악한 이빨이 쩍 벌어졌다.
"허억!"
흡사 목을 뜯어버릴 듯이 흉포한 이빨. 그 순간 툭툭 끊기던 당계제염의 사고에 딱 하나의 인식이 뚜렷이 떠올랐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지독히도 이질적인 공포.
‘죽는다.’
정말로, 뜯긴다. 저 맹수의 이빨에. 목이 갈기갈기 찢기고 뜯기리라.
하나 그 순간, 목덜미를 뜯어 버리던 이빨이 모습을 감췄다. 잠식한 묵빛이 사라지면서 빛이 번진다. 천무백의 묘한 웃음이 눈앞에 보였다.
“…….”
지독하리만큼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아무도 못 봤다.
검이 뽑혀 나오고, 대기를 베어 버리고, 다시 납검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벼락처럼, 섬광처럼.
번쩍 하는 순간 흘러갔지만,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이는 단언컨대 현장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딱 두 명만이 어렴풋이 무언가 벌어졌음은 이해했다.
‘……미쳤어.’
유서령은 희미하게나마 봤다. 아니, 정확히는.
‘잔상만 보였어.’
검이 남긴 잔상을.
마치 허공에 먹물을 부은 것처럼 날카롭게 쭉 그어진 묵빛의 잔상.
구 영감은 그보다는 약간 나았다. 잔상만이 아니라 검이 뻗어나가던 경로를 약간이나마 봤으니까.
‘한 호흡 안에 모든 과정이 이뤄졌다. 아니, 숨을 들이시는 시간 전에.’
쾌속의 극치.
때문에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다. 구 영감은 순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철방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금지되었단 규칙?
그 규칙을 누가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저기 상황을 지켜보던 무사들도 모조리 검을 뽑는 것조차 못 봤는데.
그저 눈 깜짝할 사이, 엄청난 기세가 철방을 잠식했고 정신을 차린 순간.
철퍼덕!
“으어으으으!”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린 채 바닥에 주저앉은 당계제염의 모습은 그야말로 꼴사나웠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 초점을 잃은 눈동자까지.
그제야 구 영감은 이해했다.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
구 영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은 당계제염을 바라봤다.
아까 전, 당당했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벌벌 떠는 모습은 초라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저 눈을 깜박이고 보니 겁에 질린 채 주저앉은 모양이니까.
심지어.
“헉.”
“윽, 뭐야. 지린거야?”
바닥에 동그랗게 물드는 샛노란 물을 본 구 영감은 탄식했다.
‘목숨 값 치고는 너무 비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