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20화 (220/318)

<검신재생 220화>

220. 자격

당계제염은 당계세가의 삼자로서 산동의 후기지수로 나름의 명성을 떨쳤다.

다만 명성이 실력과 능력에서 기인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실력 역시 출중하다. 나름대로 재능이 있어 약관이 조금 넘은 나이에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

하나 그의 유명세가 산동성에 퍼진 건, 실력보다 더한 개차반 같은 성격이다.

하늘로 쭉 솟구친 눈매 덕분에 난폭한 인상이 강한 당계제염은 잔뜩 신경질 난 목소리로 옆을 따라온 호위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구 영감. 난 여기서 말이야. 응? 반드시 방주가 만든 무기를 찾아갈 거야.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구 영감이 좀 잘 찾아봐.”

“······예, 공자.”

“못 찾으면 알아서 해. 구 영감이 받는 봉록이 보통 호위보다 더 큰 거 알지? 구 영감 손녀 병치레에 들어가는 돈도 우리 세가에서 해 주잖아? 사채도 눈감아 주고 있고. 은혜는 갚아야지. 똑바로 하라고.”

노인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난폭한 말투였다.

하나 곁에 있는 노인은 그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당계세가는 무가가 아니라 고리대금업, 일종의 사채업으로 가세를 일궜다.

구 영감도 당계세가에서 제법 큰 자금을 융통했다. 손녀의 병세를 치료하기 위해서.

사채업이란 게 응당 그렇듯, 한번 빠지면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다.

절정에 달한 완숙한 노강호인 구 영감도 수렁에 빠지듯 당계세가의 손아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영감이 쓸데없이 늙은 건 아니잖아? 그래도 노강호라고 경험도 있고, 나보다 검 보는 안목은 있을 거 아니야. 잘해 보자고.”

시시껄렁한 말투에도 구 영감은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구 영감은 착실히 당계제염의 명에 따랐다.

“좋은 검입니다, 공자님.”

“이거?”

구 영감이 고른 검은 잘 모르는 당계제염이 봐도 꽤 그럴듯해 보였다.

검신에 흐르는 은은한 광택하며 손만 대도 베일 것 같은 예기까지.

당계제염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았다.

“좋아 보이긴 하는데. 이게 최고야? 영감? 아니면 영감이 갚아야 할 빚이 더 늘어나?”

“······좋은 검은 맞습니다. 다만 공자님이 방주가 만든 검을 원하신다면, 저로서는 이 검이 맞으리라 확신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쯧. 그럼 확신이 드는 검을 찾아봐. 이거는 일단 보류해 놓고.”

당계제염은 그리 말하곤 육가철방을 슥 둘러봤다.

“거참. 고작 철이나 두드리는 놈들이 돈지랄이란 돈지랄은 다 해놨네.”

소문은 익히 들어 대단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 보니 솔직히 말해 감탄으로도 부족한 곳이었다.

아무리 검에 안목이 없는 당계제염이라 해도 곳곳에 놓여 있는 병기를 보면 하나같이 대단한 것임을 눈치챌 정도였으니.

병기들만 대단한 게 아니었다.

철방 내부를 꾸민 작은 장식들 하나마저도 장인들이 만든 게 분명한 명품이 가득했다.

어쩐지 당계세가보다 더 거대한 위세를 눈으로 목격한 거 같아서 당계제염은 절로 심통이 났다.

“고작 망치나 두들기는 하찮은 철장들 주제에, 정마대전 때 정파 편에 잘 붙어먹었다고 위세를 부리고 사는구나. 쯧쯧.”

혀를 차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둘러보던 중 문득 시야에 누군가 들어왔다.

“호오. 어린 게 제법 미색이······.”

당계제염의 눈이 반짝였다.

제 체구와 비슷한 칼을 든 작은 체구의 여검객. 유서령이었다.

누가 봐도 앳된 얼굴이었지만, 서역의 피가 섞인 듯한 이국적인 이목구비는 단숨에 시선을 끌었다.

하나 당계제염의 시선을 붙잡아 둔 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응?”

조금 전, 구 영감이 좋은 검이라 평가한 검에 다가간다.

“허. 꼴에 검을 잡았다고 해도 제법 검을 볼 줄 아나 봐?”

당계제염은 코웃음을 쳤다. 애당초 구 영감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본인은 그런 검을 고를 안목조차 없음을 생각도 못 하고.

한데 이어지는 장면은 의외였다. 유서령이 한참 들여다보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아닌가.

마치 이 정도는 성에 안 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당계제염은 한참 지켜봤다.

몇 개의 검을 더 보고는, 똑같이 고개를 저으며 지나쳤다.

“어이, 구 영감.”

“예, 공자님.”

“이건 어때?”

당계제염은 유서령이 고개를 젓고 지나친 검을 가리켰다.

무심한 얼굴로 검을 살피던 구 영감의 얼굴에 일순 놀람이 번졌다.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당계제염을 바라봤다.

“제가 맨 처음 봤던 검보다 더 좋습니다. 예기는 날카롭고, 검신에 새겨진 물결무늬를 보면 담금질이 얼마나 잘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공자님의 안목이 이 정도라면 저보다 더······.”

“아니, 됐어. 그럼 이거 하고 저건 어때?”

당계제염은 연이어 유서령이 보다가 지나친 검들을 지목했고, 그때마다 구 영감은 놀라움을 표했다.

당계제염은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저 계집. 검 보는 안목이 이 정도라고?”

절정에 달한 완숙한 경지, 많은 경험을 쌓은 노강호인 구 영감보다 더 안목이 높다니.

순간 당계제염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구 영감. 어디 가지 말고. 저 계집이나 조심히 따라가자고.”

“네?”

“흐흐. 방주가 만든 검을 구해 가면, 아버지께서도 다르게 보시겠지.”

탐욕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당계제염은 은밀히 유서령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유서령이 어떤 검을 유심히 살피다, 깜짝 놀라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당계제염이 곧장 행동에 나섰다.

근처에 있는 직원을 찾았다. 무기 판매는 장인이 직접 하지 않고, 육가철방과 거래를 튼 상단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저 검, 내가 사고 싶구나.”

그러자 직원은 가리키는 곳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여성분과 일행입니까?”

“아니. 내가 먼저 보아 놓은 검이라서 말이다.”

“죄송하지만 먼저 검을 보았다고 한들, 거래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여성분도 검의 구매를 원하신다면, 정당한 절차에 의해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당계제염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다.

마음 같아선 확 칼을 뽑고 싶었지만, 육가철방과 연계하는 상단이라면 당계세가가 엄두도 못 낼 상단임이 틀림없다.

당계제염은 머리를 굴리고는 방향을 바꿨다.

“어이, 소저.”

“……저 말인가요?”

유서령이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검, 내가 아까 봐 둔 거거든? 손 떼.”

“다 들었어요. 검을 구매하기 전까진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저도 이 검을 구매할 의향이 있어요.”

당계제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를 악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근히 기세를 내뿜으며 압박까지 하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저보다 어린 것이 분명한데, 조금도 밀리는 기색이 없자 당계제염은 내심 속이 뒤집혔다.

“흥. 살 돈은 있고?”

“……검의 가격은 얼마 안 해요. 육가철방은 검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에겐 누구나 기회를 제공하니까요.”

당계제염이 비웃으며 직원에게 물었다.

“이봐. 만일 똑같은 검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이 여러 명 등장하면 어떻게 되지? 그 사람들 모두 검의 가치를 알아보고 산다고 하는 거잖아?”

유서령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봐요, 당신! 검의 가치를 알아본다고요? 제 뒤만 졸졸 따라오는 거 모를 줄 알았어요? 검 볼 안목 따위는 없으면서!”

“뭐라는 거야. 증거 있어?”

“그……!”

당계제염의 뻔뻔한 대응에 유서령은 말문이 막혔다. 증거가 있을 리가 있겠는가.

직원은 둘의 신경전을 지켜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병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구매의향을 표한 분이 여러 명이라면, 응당 높은 가격에 판매가 됩니다.”

그 말에 당계제염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거 봐. 결국, 돈이잖아. 뭐 거창한 장인정신이니, 장인들의 혼이니. 많은 돈만 쥐여 주면 되는 거잖아? 쯧. 철장 놈들 말만 그럴듯하게 해요. 어이, 소저. 내가 누군지 아나?”

“…….”

직원이 대신 대답했다.

“당계세가의 자제분 아닙니까?”

“맞다. 하면 내가 이 검을 가져가는 게 맞지 않겠느냐. 저 계집이 얼마를 내놓든, 난 무조건 두 배를 내놓으마.”

직원이 슬쩍 유서령을 바라봤다.

두 명의 행색부터가 차이가 났다.

아마도 유서령은 높은 가격을 제시할 수 없으리라.

사실 이럴 때 더 좋게 가격을 치르는 사람에게 병기를 판매하는 건 가장 공정한 처사였다.

아무래도 좋은 검에는 안목 좋은 사람이 여러 명 꼬이기 마련.

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결국 검의 가치를 눈치챘다는 것이니, 살 자격을 갖췄다.

이렇게 경쟁자가 생길 경우, 가장 공정하고 깔끔한 방법이 더 값을 치르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가장 잡음이 나오지 않는 방법이다.

직원은 정해진 규칙대로 대응했으나, 어쩐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쥔 유서령이 안타까웠다.

반면 당계제염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조롱했다.

“돈이 없지? 내가 돈 버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주랴? 흐음. 얼굴은 제법 반반하고, 서토 오랑캐의 그 특유의 이국적인 외모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니…….”

순간 주위가 침묵에 잠겼다.

소란스러움에 은근히 쏠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당계제염이 말끝을 흐렸지만, 의미를 모를 사람이 없다. 주위가 모두 경악했다.

이곳은 산동이다.

공부의 영향으로 유가적인 사상이 바탕에 깔린 곳이다. 한데 저런 조롱이라니!

새빨개진 얼굴의 유서령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으려 했으나, 육가철방 안에서는 싸움할 수 없다는 규칙을 떠올리곤 그저 칼자루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

“흐흐. 자. 검을 넘겨주시오. 내 값을 치름세.”

그러자 직원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만 다른 규칙이 있습니다. 검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지녔다고 한들, 또 합당한 값을 치를 재력을 갖췄다고 한들. 소유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철방은 병기를 판매하지 않습니다.”

당계제염의 광대가 씰룩였다. 볼 살이 푸르르 떨렸다. 불쾌감이 밑에서부터 치밀었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는 직원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말은 내가 자격이 없다는 거냐? 부족하다는 거야?”

기세가 일변하자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누가 봐도 자격이 없어 보이긴 했다.

육가철방의 규정 중 하나가 검을 쓰는 사람은 적어도 악인이 아니어야 한다는 게 있다.

한데 지금 누가 봐도 악인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건…….”

“네깟 놈이 뭔데 감히 내 자격을 논해?”

당계제염의 전신에서 칼날 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일류 막바지.

난폭하고 성급하지만, 그것이 무(武)에 담기면 더 날카로워지고 강력해지는 법.

상단에서 나온 평범한 직원이 감당할 기세가 아니었다. 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격? 내가 자격이 없단 말이냐?”

당계제염의 눈동자가 거세게 타올랐다. 와락 일그러진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기괴했다. 벌름거리는 콧구멍에서 연신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역린이었다.

제법 후기지수라는 소리를 듣지만 삼자라는 이유만으로 세가의 정식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한데 고작 검을 파는데 자격을 논한다.

자격지심이 절로 치밀었다.

“내가 왜 자격이 없느냐! 돈도 있다! 검도 다룬다! 산동에서 나만 한 후기지수는 없다! 그런데 자격이 없다고? 누가! 누가 자격이 없다고 감히 나를 평가하느냐!”

그때, 작업장 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네가 자격 없다는 건 지나가는 능허도 알겠다. 이 새끼야.”

“아니 왜 내가 나옵니까. 보통 거기에 지나가는 똥개도 알겠다가 맞는 표현 아닙니까?”

“뭐가 다른데?”

“뭐 이런 씨.”

당계제염의 고개가 부러질 듯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묘한 빛이 번지더니 이내 비웃음이 걸렸다.

손에는 검 하나 들고 있지만, 아무런 내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저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이는 청년.

당계제염이 거친 안광을 토했다.

“너, 이 새끼. 강호에서 함부로 덤빌 사람 가릴 안목 없으면 죽어 나가는 거 몰라?”

천무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주니까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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