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19화>
219. 한번 보여 드리죠
“철신은 괴물이 되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제 검을 괴물로 만들었습니까?”
“아니다.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육석 역시 말로써 설명하기는 어려운지 곤란한 얼굴이었다.
“직접 봐라. 그래야 이해가 빠를 테니.”
작업장으로 들어간 육석은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상자를 들고 왔다.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우천목이군요.”
“허. 네놈 식견이 제법 깊구나. 어린놈이. 스승이 이런 것까지 알려 주지는 않았을 텐데.”
육석이 나직하게 감탄했다.
조용히 있던 능허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군, 우천목이 뭐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냐. 동생이나 아버님은 똑똑해 보이던데.”
“가족이 똑똑하다고 다 똑똑하답니까.”
“널 보니 그게 틀렸다는 걸 알겠다.”
“아니, 그냥 좀 알려 주쇼. 그만 놀리고.”
“저 멀리 북해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냉기에 강하고 웬만한 금속보다 단단해. 벌레가 꼬이지 않고, 습기와 바람을 막는 데에도 큰 효과가 있지. 귀한 나무다.”
“허. 그걸 고작 검 하나 넣어두는 데 사용합니까.”
천무백도 살짝 공감됐다. 우천목은 귀한 재료였으니까. 워낙 희귀해 중원에서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을 정도다.
한데 검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자라니.
그만큼 육석이 철신고검을 중요하게 여기는 방증이리라.
“자, 한번 직접 봐라.”
상자가 열리고 자태를 드러낸 철신고검은 무언가 강렬한 인상은 없었다.
아무런 장식하나 달려 있지 않은 검은색의 검집.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검집은 운철이군요?”
“허. 보기만 해도 아는 거냐?”
“감입니다. 감.”
“검 보는 눈은 창천검신 그 양반만큼 되는구나. 검집까지 흑운철로 했으면 좋겠다만, 그만한 양이 안 된다. 하여 운철로 만들었다.”
사실 검집을 운철로 만든 것도 엄청난 호화다.
운철으로 검을 만들면 천하의 명검이 된다는 게 속설이니까.
어떤 강철도 벨 수 있고, 호신강기도 부술 수 있는데 운철이지 않은가.
한데 그런 운철을 고작 검집에 쓰다니. 새삼 육석의 배포에 천무백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의 시선을 눈치챈 육석이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이 이뻐 보여서 그리한 건 아니다. 철신이 괴물이 되었으니, 검집도 최소한 운철이 아니라면 품을 수 없다.”
“괴물이라…….”
천무백은 검자루를 쥐었다.
“……!”
천무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져 오는 서늘한 감각.
이전보다 더없이 차가웠다. 마치 북해의 얼음덩어리를 맨손으로 만진 듯, 뼈가 시릴 듯한 냉기가 파고들었다.
“우주에서 온 흑운철이다. 기본적으로 냉기를 머금은 금속이야.”
“하지만 이건…….”
“난 네놈이 그걸 손에 쥐고도 멀쩡한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럴 만하군요.”
천무백이 담담하게 검자루를 쥔 채 이리저리 살피자 육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놈은 북해에서 무공이라도 익힌 것이냐. 북해의 빙백신공이 아닌 이상 그 냉기를 버티지 못할 텐데.”
‘하단전에 있습니다.’
천무백은 그 말을 속내로 삼켰다.
어째서 괴물이 되었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갔다.
하늘. 그 너머 아득한 우주의 기운을 품은 흑운철은 하단전의 극음지기가 손색이 있을 정도로 강렬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 같은 정도는 아닌데.’
천무백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육석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흡……!”
“으음!”
검이 뽑혀 나오자 지켜보던 능허는 헛숨을 들이켰고, 육석은 침음을 내뱉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아찔함과 서늘함이었다.
아니, 서늘하다고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천무백은 검을 위로 향해 올려보았다.
흑운철로 검신을 새로 제작한 게 맞는 듯, 세상 모든 빛을 흡수한 것처럼 검었다.
기존의 새하얀 순백과는 완벽하게 대조됐다.
마치 전혀 다른 검이 재탄생한 것처럼.
천무백은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검은빛이 아니었다. 새까만 먹물을 그대로 부어버린 것처럼 무광(無光)의 흑색은 단순하고 우직했다. 그러나 외려 압도적이면서도 치가 떨릴 정도로 차가움을 내포했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매끄러우면서도 날카롭다. 가벼우면서도 중심이 잡혀있으니 힘이 실린다. 칼날은 서늘하며 묵직하다. 무게의 균형이 완벽하다. 찌르든, 베든, 휘두르든.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전달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균형을 갖췄다.’
천무백의 인생은, 천무백의 전생은 오로지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
검(劍).
평생을 검만 잡아도 검에 통달하는 대가가 되는 법.
천무백은 그런 평생을 무수히도 살았다.
철신고검을 잡은 순간만으로도, 검의 구조와 형태, 무게중심과 균형. 그로 인해 쓰임새까지.
모든 걸 파악했다.
덕택에 감탄을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새하얀 미소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같이 웃어 버릴 만큼, 순수한 웃음이었다.
‘완벽하다.’
천무백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본래의 철신고검은 그리도 강력한 검은 아니었다. 세상이 말하는 명검과 신병이기는 아니었다.
한데도 천무백은 가능하면 매 전생 철신고검을 잡았다.
무수한 전생을 반복하며 철신고검과 천무백 사이에서는 시간을 뛰어넘는 유대감이 형성됐다.
검에 념(念)이 담겼다.
오로지 천무백만을 주인으로 인정했다.
천무백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상관없었다.
검마든, 암천검제든, 산동검호든, 그리고 천무백이든.
철신고검은 주인을 알아보고 검명을 거칠게 토했다.
웅, 웅, 웅, 웅!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단순히 냉기를 품었기에 괴물이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의지가 생겼구나.’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철신은 거칠게 검명을 토했다.
이전에는 천무백에게 만큼은 애교를 떠는 강아지 같았다면. 지금은 한 마리의 맹수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는 듯했다.
천무백을 주인으로 인정하면서도, 머리를 치켜드는 꼴이다.
육석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마 창천검신께서 직접 오신다고 해도, 다루기 쉽지 않을 거다. 예민한 고양이 같기도 한 녀석이다. 문제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라는 거지.”
“호랑이…….”
산중왕 호랑이라.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만에는 적혈호(赤血虎)라는 영물이 있었습니다. 남만인들이 신처럼 생각할 정도로, 기이했으며 강한 놈이었지요.”
“적혈호?”
육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머나먼 남만의 이야기라 그런가. 처음 듣는군.”
“적혈호는 남만을 지배했습니다. 한낱 영물이 사람들 위에 선 것이지요.”
“이 철신고검이 그것처럼 보인단 말이냐?”
“장인께서도 괴물이라고 표현한 만큼 맹렬합니다. 오히려 제 주인을 잡아먹을 괴물 같은 검.”
“맞다. 내가 걱정하는 게 그거다. 검을 잡고 휘두르다, 종국에는 그 검에 사용자가 잡아먹힐 위험이 도사린다. 그만큼 검에 담긴 념(念)이 너무 강하고 잔인해.”
“하지만 말입니다.”
천무백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대단한 적혈호가 지금의 남만에는 없습니다.”
“…….”
“남만야수궁을 개파한 초인이 적혈호를 제압한 것이지요.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강력한 영물을 말입니다.”
천무백이 웃었다.
“그러니 이놈도 다룰 수 있겠지요.”
단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에는 단단함이 깃들었다.
멍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육석은 그저 탄식을 터뜨렸다.
‘자신감이 대단하도다.’
지금의 철신고검은 과거의 철신고검이 아니다.
창천검신이 다루던 시절보다 더 강해진 념을 품었다.
스스로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아 언제든 주인을 잡아먹을 수 있다.
흑운철이란 희대의 금속은 어떤 주인도 잡아먹을 정도로 흉포한 이빨과 발톱을 선물했다.
육석이 설령 과거의 창천검신이 와도 쉽게 다루지 못할 거라고 조심스레 예측한 이유였다.
아마 그건 천무백이 더 잘 알 것이다.
‘창천검신의 후인, 그리고 검에 대해서 어쩌면 나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완벽하게 느끼는 자.’
자신은 그저 철신고검의 흉포함과 무서움, 폭발적인 잠재력을 깨달았지만.
천무백은 그보다 더 깊고 넓은 걸 느끼고 깨달았을 것이다.
한데도 저리도 당당하다니.
‘오만이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이 있기에 나오는 표정과 태도다.’
육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필생의 역작(力作)이다.”
천무백은 조용히 육석의 눈을 쳐다봤다.
나이가 무색하게 타오르던 장인의 눈빛이 어느새 사그라들어 있었다.
강인하고 굳건해 보였던 얼굴에 주름살이 유난히 더 두드러졌다.
천무백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필생의 역작.
말 그대로 모든 걸 불사른 채 만든 검.
그랬다.
천무백이 보기에도, 과거 아주 옛날 간장과 막야가 떠올랐을 정도로.
어쩌면 그것들보다 지금의 철신이 나을지도 모른다.
흑운철로 만들어졌으며 당대 제일의 장인이 혼을 불태웠고, 수백 년에 걸쳐 한 주인을 섬기며 념을 꼿꼿이 세웠으니까.
“패천검마가 처음 철신고검을 사용한 이래, 한동안 주인이 없었다가 암천검제가 그 검을 손에 넣었다. 많은 이들이 암천검제가 백도무림을 위해 마도에 세작으로 잠입해 장로들을 베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그는 오로지 이 철신고검을 얻기 위해 마교에 잠입한 것이었지.”
“…….”
천무백의 표정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천무백의 속내는 꽤 놀라웠다.
‘그걸 어떻게 알았대?’
암천검제가 무림맹의 임무를 받고 마교에 잠입했다고 세간은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당시 철신고검이 마교의 창고에 처박혀 있어서, 천무백은 마교에 잠입했다.
그러다가 발각이 돼서 가로막는 장로들이란 장로들은 다 죽이고 나왔고.
문제는 그런 사실을 누구한테도 밝힌 적이 없다.
한데 육석은 알고 있었다.
“무림인은 무림의 역사를 보며 과거의 강호인을 판단하지만, 난 검을 보고 판단한다. 암천검제는 오로지 검을 얻기 위해서 마교에 간 거야.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대단한 암천검제도 위기를 무릅쓰고서라도 탐을 낼 만큼 좋은 무기라는 얘기다.”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니 나는 이 검을 다시 내 손으로 재탄생시키면서, 두려웠다.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검을 망칠까 봐.”
“망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망쳤다.”
“……?”
천무백이 육석을 응시했다. 육석의 얼굴에 회한이 스쳐갔다.
“아무리 강한 검이라 해도, 아무도 그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저 금속덩어리일 뿐이다. 창천검신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한 불가능하리라 여겼다. 그래서 망쳤다고 생각했다.”
천무백을 바라보는 육석의 눈이 순간 타올랐다.
“철신을, 다룰 수 있겠느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천무백은 잠깐 생각했다.
좋은 검이다. 무수한 전생을 살면서 이토록 검을 얻고 기뻐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천무백은 육석에게 적잖이 고마움을 느꼈다.
저것이 자신이 만든 필생의 역작이 한낱 고철덩어리가 아니길 바라는 소원이라면.
‘철신이 고작 고철이 될 수는 없지.’
천무백이 가볍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작업장 바깥을 향했다.
아까부터 소란이 생겼는지 점점 시끄러워져서 여기까지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유서령…….’
유서령의 화난 목소리가 간간히 섞여 있었다. 천무백의 초인적인 청각은 소란 속 자세한 내용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천무백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한번 직접 보여 드리죠. 잘 사용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