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18화 (218/318)

<검신재생 218화>

218. 알아야 할 게 있네

천무백은 논전의 마무리를 제갈설아에게 맡겨 두고, 공부를 벗어났다.

<철신(鐵神)이 울고 있다.>

육가철방에서 전해져 온 전서에 적힌 문구.

천천히 논전을 지켜보다 떠날 생각이었던 천무백도 엉덩이가 들썩거릴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철신은 곧 천무백의 철신고검을 이른다.

철신이 검명(劍鳴)을 내고 있다는 건, 드디어 흑운철로 완성이 됐음을 의미하리라.

소식을 듣자 천하의 천무백도 조급해졌다.

‘평생, 아니 지긋지긋하게 검을 곁에 뒀으면서 검이 지겹지도 않다니. 나도 참.’

새삼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수한 전생 중에 검을 놓친 적이 없다지만, 고작 달포가 안되는 동안 놓고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조급해질 줄이야.

천무백은 능허만 대동한 채 육가철방으로 향했다.

급히 달려 철방에 도착하자 의외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사들의 엄중한 경비 덕택에 근방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 한적해 보일 정도였던 철방이 북새통을 이뤘다.

마치 시장에 온 것처럼 인파가 몰렸다.

더 놀라운 건 무사들이 문을 연 채 들어오는 인파를 막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출입 자체가 힘든 곳이 아니던가.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하자, 능허가 진즉 눈치채고 이유를 알아왔다.

“무슨 상황이래?”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딱 그 말이 맞소. 철방에서 날을 정해 문을 여는 날이랍니다.”

“문을 연다고?”

“육가철방의 병기가 워낙 귀한 취급을 받으니까, 이름 높은 무사나 뼈대 깊은 가문이나 거대문파만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전대 방주가 일부 계층이 자신들의 병기를 독점하는 걸 경계해서, 이렇게 날을 정해 문을 연답니다. 그간 만들어 놓은 병기를 아무나 와서 사가라고요.”

“아무나?”

“뭐, 명성이 없거나 사문의 끗발이 딸리거나 하는 사람들에게도 병기가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거죠.”

“그래도 병기가 부족하면 살 수 있는 사람은 돈 좀 있는 사람들이 한계일 텐데?”

“듣자하니 제법 많답니다. 주문이 들어온 것만 제작하는 게 아니라, 장인의 혼을 불어넣으면서 만들어 놓은 병기들이 많다네요. 그 덕에 장인들의 실력도 덩달아 상승하고요. 가격이야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능허의 설명에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재고를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니 재정적인 면에서도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천무백이 주목한 건 재정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 노인네, 장인 치곤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무림의 절대다수는 일류가 못되는 평범한 무인이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세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무림을 이루는 건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평범한 무인들이다.

그런 무인들에게도 철방의 병기를 제공한다.

그것만으로도 철방의 위세는 상당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무인에게 병기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철방 안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인, 악적, 무림공적은 엄격하게 출입을 금했다.

번잡한 가운데에도 철방의 대문 앞엔 긴 줄이 늘어섰다.

“제가 저기 무사한테 가서 주군이 왔다고 전할까요?”

“됐다. 그냥 줄 서자.”

전대 방주가 직접 전서를 보냈으니 보여 주기만 하면 금방 통과되리라.

다만 천무백은 그러지 않았다.

철방이 세워 놓은 규칙을 존중하기도 했고, 과거 기억도 아련히 떠올랐으니까.

‘철이 그렇게 귀한 시절, 좋은 검 하나 찾기 위해서 정말 힘겹게 굴렀지.’

아주 초기의 전생.

좋은 검 하나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전생의 모습을, 줄을 선 무사들에게서 조금이나마 떠올렸으니까.

줄을 선 무사들의 행색을 보면 절로 과거가 떠올랐다.

애당초 철방의 병기를 구할 수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나, 보잘 것 없는 사문에 적을 둔 무사들.

몇몇은 그저 검 한 자루 낀 채 강호를 떠도는 낭인이었고, 몇몇은 얼굴에 세상의 풍파가 그대로 새겨진 중년 무사들이었지만.

대부분이 이류였고, 높아 봤자 일류가 한계였다.

무인들을 쭉 살피던 천무백의 시선이 멈췄다.

예쁘장한 얼굴의 여류검객이었다. 체구는 작았다. 천무백의 가슴께나 올까. 조금 이국적인 외모. 중원인과는 약간은 다른 하얀 얼굴과 이목구비였다. 대략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린 나이.

‘족히 일류는 될법한 내공인데?’

고작 십대 중반에 일류라고?

물론 경악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다. 명문세가나 구파일방을 보면 십대에 이미 일류를 벗어나 절정을 바라보는 후기지수가 어디 한 둘인가.

다만 그리도 배경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줄을 서서 병기를 살 이유가 있겠는가.

여기에 모인 이들은 한미한 가문이나 보잘것없는 사문 출신이니.

십대 중반에 일류의 경지란 건 꽤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류의 경지 하나만 보고 쳐다본 건 아니었다.

단순한 일류가 아니라…….

순간 검객이 힐끗 시선을 돌려 천무백을 바라봤다.

제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바로 근방에서 쳐다보면 눈치채는 데, 하물며 기감이 예민한 무인이지 않은가.

“…….”

천무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시선을 돌리면 오히려 훔쳐보는 것처럼 오해를 살수도 있다.

시선을 마주하고도 천무백이 시선을 피하지 않자, 여검객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뭐예요?”

목소리에 날선 경계심이 짙었다. 그제야 딴 곳에 시선이 팔려 있던 능허도 고개를 돌려 관심을 기울였다.

“뭐야. 주군, 또 시비 거셨습니까?”

“시비라니. 능허야. 내가 누구한테 시비 거는 거 봤니?”

“셀 수도 없을 만큼요.”

“계산 공부 좀 해야겠다.”

“제 가문 못 봤습니까? 학문에서도 안 밀립니다.”

“아서라.”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젓곤 여검객에게 포권을 취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소저. 기도가 날카롭고 출중한 것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꽤 정중한 자세에 날카롭게 반응했던 여검객도 부랴부랴 포권을 취했다.

딱 봐도 호위무사를 거느린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보이니, 약간 기가 죽은 것도 있었다.

“아닙니다. 어…… 무인이신가요? 제 기도를 느끼셨다고요?”

“철방에 찾아왔으니, 부족하지만 저 역시 무인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서 허리춤을 흘깃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다.

허리춤에 검 한 자루 없으니 이상하게 여기겠지.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중단전의 선기를 다루게 되면서, 비단 상단전의 경천혼공뿐 아니라 하단전에서 똬리를 틀던 극음지기도 잠잠하게 모습을 감췄다.

이미 절세지경에 오른 천무백인데, 누가 천무백의 경지를 엿볼 수 있겠는가.

여검객은 아마 천무백이 검 한번 못 잡아본 그저 곱게 자란 부잣집 자제로 생각하리라.

“공자님도 육가의 병기를 구하러 오신 건가요?”

“음, 맞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철방의 병기를 구할 수 있어 보이는데. 아, 혹시 제가 실례되는 물음을 한 건가요?”

나이가 어려서일까.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아니면 지금까지 홀로 다녀서인지, 외로움을 탔던 것일지도 몰랐다.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육가철방의 병기를 구할 정도로 위세가 높은 곳은 아닌지라.”

“하긴, 철방의 병기를 구하긴 힘들죠. 지금 방주님의 무기도 하나같이 명품 취급을 받으니까요. 저도 오늘 꼭 기회가 된다면 구할 거예요.”

“방주의 병기도 오늘 내놓습니까?”

“몰랐어요? 안에 진열된 병기 중엔 방주께서 만든 무기도 있어요.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값으로 넘겨준다고 하더라고요.”

“가치라…….”

“누가 만들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으니, 순전히 병기의 가치를 직접 알아봐야죠.”

“자신 있어 보이시네요.”

“이래봬도 제가 검 하나만큼은 잘 알거든요. 공자님도 검 구하실 요량이면, 제가 조금 봐드릴 수 있어요.”

옆에 있던 능허가 피식피식 웃었다.

다름 아닌 천무백에게 검을 고르는 걸 도와주겠다니. 낯선 이에게도 호의를 베푸는 게, 타고난 성품이 착한 건가.

“당금 방주가 만든 병기도 신병이기로 취급받는데, 전대 방주이신 육석공이 만드신 병기는 과연 어떨까요.”

“대단하겠지요.”

“단순히 대단하다고만 할 수는 없어요! 정마대전의 영웅들의 무기 중엔 육석공의 손을 거쳐 가지 않은 게 없으니까요. 오죽하면 마교에서도 죽이지 말고 어떻게든 생포하라고 했을까요.”

여검객의 눈이 반짝였다.

“그분이 만드신 병기를 쥐어 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요. 이제 더는 망치를 안 드시니, 새로이 만든 병기를 영영 볼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줄이 금세 줄어들었다.

천무백보다 앞에 있던 여검객이 급히 말을 마치고, 문지기에게 신분을 밝혔다.

“청해의 유서령이에요. 별호는 아직 없고요. 사문도 없어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신분이었다. 다만 특이점은 청해출신이라는 점이겠지.

중원의 서쪽에서 동쪽 끝으로 온 것이었으니까.

문제가 없었기에 유서령은 단숨에 통과됐다.

그다음은 천무백과 능허였다.

천무백은 육석이 보낸 전서를 내밀었다. 육석공이 직접 쓴 필체와 인장이 새겨져 있는 전서를 보자 문지기는 흠칫하더니, 천무백을 바라보곤 급히 자리를 떠났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지기가 기겁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통과한 유서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이내 의문은 풀렸다.

안에 있던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졌다. 부산스러워지더니, 철방 안에 있던 장인들이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자존심 하나는 하늘을 찌를 듯한 철방의 장인들이 일제히 예를 표하자 좌중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육, 육석 공이시다!”

“전대방주이신 육석 공?”

“맙소사! 은퇴하신 거 아니셨나?”

이미 은퇴한 걸로 알려진 전대 방주이자 명장인 육석의 등장에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철방에 있던 장인들이 분분히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건 당연했고, 들어와 있던 방문객들의 놀란 시선도 육석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육석은 주위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걸었다.

문 쪽으로 다가오는지라, 아직 정문 앞에 있던 유서령이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마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육석은 유서령을 제치고 다름 아닌 천무백 앞에 와서 멈췄다.

그리곤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이라도 치듯이 말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 완성한 지 언제인데, 이제야 와? 무인이란 놈이 경공도 못 써먹나!”

“다 끝났습니까?”

“끝났지! 내 직접 망치를 잡아 하루도 쉬지 않고 두드렸다. 직접 검을 쓸 사람이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해야 할 것 아니냐?”

말은 거칠었고 목소리는 높았지만 좌중은 다 알았다. 격의 없고 친근했기에 대할 수 있는 태도임을.

“제가 보지 않아도 좋은 검이겠지요.”

“흥! 직접 쓸 검을 확인하지 않고서 단언하는 무인 중에 잘된 놈 못 봤다. 네놈이 천룡검협이란 허명을 갖고 있으면 직접 보고 평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트집 잡으라고. 난 완벽한 검을 만들어야 하니까.”

쥐 죽은 듯한 침묵이 가득하던 철방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천룡검협!”

“소림의 보호자, 화산과 종남의 도전자. 그 사람이라고?”

“허어! 너무 어려 보이는데? 저 어린 공자가 정녕 후기지수를 벗어난 지 오래라는…….”

“천룡검협 천무백이라니. 하긴 천룡검협 정도의 명성은 되야 전대 방주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나?”

“아니지. 천룡검협이 명성이 높다 해도, 육석공이 최근 망치를 들어 병기를 만들어 줄 정도는…….”

“천룡검협이 그 정도란 말인가?”

마치 시장 한복판에 온 듯한 시끄러움이 귀를 앵앵 울리자 육석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쯧. 뭣 하러 줄을 서고 기다렸나. 곧장 담을 넘어서라도 오지. 들어가세. 내 역작을 보여 줌세.”

천무백과 능허는 육석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뒤따라가던 천무백이 흘깃 시선을 뒤로 돌렸다.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는 유서령이 있었다.

“조금 있다가 내 검 봐주겠습니까?”

“네?”

“아까 봐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거야…….”

“약속이니 조금 있다가 봐주시죠.”

“네, 네! 알겠어요!”

천무백은 살짝 웃어 주곤 다시 육석의 뒤를 따라갔다.

능허가 달라붙었다.

“제갈 소저에게 이를 겁니다.”

“뭘 일러?”

“꼬리치고 다닌다고.”

“매일같이 머릿속에 새로운 개소리만 생각하니?”

“왜 관심을 가지십니까? 제법 대단한 재능이긴 한데. 그래도 주군이 관심을 가질 만한. 기껏해야 일류 아닙니까.”

“너도 한참 멀었구나.”

천무백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능허를 쳐다봤다.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멀다니요?”

“일류만 봤다는 건, 저 여검객이 대단한 것도 있겠지만 네놈 눈이 아직 멀었다는 거다.”

“아니 무슨…….”

능허가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작업장에 도착한 육석이 말했다.

“아, 보기 전에 네놈이 알아야 할 게 있다.”

“알아야 할 것?”

“그래.”

말끝을 흐리는 육석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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