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17화>
217. 염동(念動)
천무백은 몇 가지 호의를 더 베풀었다.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게 좋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공자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이요.”
“그건 불가하오.”
“물론 완전히 인정하라는 건 아닙니다. 일부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일부?”
공융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대로라면 재석건 측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겁니다. 결론이 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설령 공의가 나온다고 해도, 인정치 않겠죠. 그들에겐 학파의 문제니까요.”
공융이 동의하듯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논전을 연 이유가 공자는 무림인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공의로 내세워서 더 이상의 반론을 제기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하나 어디 학자가 순순히 납득하는 존재였던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물어보는 족속들이다. 공의가 나온다 한들, 재석건의 학파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유가에서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명성, 학식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재석건 측 학파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공자에게서 나옵니다.”
“하면 그들 역시 문성왕께서 무림인이란 사실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이오?”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공융은 천무백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무림인이되, 무림인이 아니라고 공표하면 됩니다. 당시 공자가 익힌 건 호신을 위한 기술 정도로 포장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공융이 말끝을 흐렸다. 공융의 눈빛에 천무백은 내심 실소했다.
제갈설아가 보여 준 건 누가 봐도 무공이었다. 그걸 어떻게 호신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다.
바로 천무백이 도와주면 가능했다.
강호인이 직접 공자가 익힌 게 무공이 아니라, 호신술 정도라고 증언해 주면 그만이니까.
“다음 회합에서 증언해 드리겠습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책에 남은 건 무공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으니까요.”
천무백이 그리 말해 주자 공융이 한시름 놨다는 듯 밝아졌다.
“하면 나는 적당한 시점에서 재석건 공과 얘기를 나눠봐야겠군. 도와준다니 고맙소. 이러다가 학계가 또 한 번 갈라지고 같은 유자끼리 갈등이 깊어질 줄만 알았건만.”
“아닙니다. 그저 부족한 학식으로 감히 몇 가지 조언을 건넨 것뿐입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건 연성공의 배포시지요.”
“허허허······.”
천무백을 바라보는 공융의 눈빛이 한껏 누그러졌다. 아무래도 유가의 학자인지라 겸손한 천무백의 태도가 퍽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부족하기는. 몇 번 대화를 나눠봐도 충분히 공부한 것 같은데.’
스스로 학식이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공융은 내심 부정했다.
대화가 잘 통했다. 몇 번 고사로 돌려서 얘기해도, 천무백은 금세 알아듣고 오히려 자신도 낯선 고사를 얘기하며 응수하지 않던가.
무림인이란 걸 생각하면, 학식이 부족하기는커녕 무림인 중에서는 압도적일 것이다.
아무래도 문과 무, 두 분야에서 정진해 나가는 공융은 똑같이 문무겸전을 갖춘 천무백에게 호감이 불쑥 들었다.
“공자가 이리도 날 도와주시니, 내가 뭐라도 보답해 드리고 싶소. 필요한 게 있소이까?”
순수한 호의였다.
하나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제가 감히 비각에 남은 중요한 물건을 태우는 실수를 범했는데도, 용서를 해 주셨는데 무얼 바랍니까?”
“······!”
“그 사실을 용서해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저에게 충분한 보답이 됐습니다.”
“······으음.”
공융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축문을 태운 걸 대범하게 넘어간 건, 이렇게 은혜를 입혀 놓으면 언젠가 중요한 순간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뒤따랐다.
한데 천무백은 지금 말 몇 마디로 갈음해 버렸다. 이미 용서해 준 것만으로 보답을 받았다고 말해 버렸으니, 어찌 보면 은혜를 갚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잠깐 틈을 보이자, 그걸 곧장 응수하다니.
물론 그렇다고 나중에 도움을 청하면 단칼에 끊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순수한 도움을 바라기는 요원하리라.
공융은 쓴웃음을 삼키며 천무백을 바라봤다.
“······학식이 깊은 것과 머리를 잘 쓰는 건 다른 이야기인 법, 공자는 학문을 닦아도 꽤 크게 되셨겠구려.”
무언가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천무백은 그저 웃어 보였다.
* * *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다음 논전에서 그런 식으로 얘기해 달라는 것이죠?”
“적당한 시점에서 물러나야겠지. 학자들의 논전에 계속에서 발을 담그면, 끝없는 수렁에 빠질 테니까 말이오.”
“하긴. 당장 공자님이 없는 사이에, 절 찾아오는 학자님들이 많았어요. 한번 얘기하는데,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더라니까요.”
“그러니 다음 논전이 끝나면 조용히 빠져나갑시다.”
“다 끝나면 하남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능허가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출산할 때 곁에 있어 줘야 하니까 말이오.”
“음. 그렇군요.”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는지, 제갈설아는 천무백을 힐끔거렸다.
천무백이 시선을 느끼곤 눈을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가만 보니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할지 고심하는 눈빛이었다.
아니, 그런 감정이었다. 이제는 선안에 익숙해진 천무백은 색의 채도를 더 면밀히 분석할 수 있었고, 대략이나마 감정을 읽는 데 능숙해졌다.
“소저도 하남까지 같이 가시는 거지요?”
기다렸던 답변이었는지, 일순 얼굴 너머의 빛무리가 현란하게 바뀌었다.
천무백이 내심 실소할 만큼.
고개를 돌린 옆선에서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리는 게, 듣고 싶었던 말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제갈설아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반문했다.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지만, 천무백의 선안에는 감정이 뚜렷이 보이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같이 가면 좋겠어요?”
“같이 가는 거 아니었소? 그런 줄 알았는데.”
“같이 가죠. 뭐. 전 공자와 함께 정의맹에 가야 하니까요. 그게 제 임무고.”
“먼저 가 계셔도 상관 없소만.”
“그······아니에요. 제가 데리고 오기로 맹주님께 말씀드렸으니, 행해야죠.”
“기분 좋으신가 보오?”
“네?”
“입꼬리가 계속 광대로 올라가려고 열심히 꿈틀거리고 있소.”
제갈설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새초롬한 얼굴이었다.
“······흐흠. 제가 아이들 좋아하거든요. 능허 아저씨 아기를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딸이 아니길 바라야겠군.”
“왜요?”
“딸은 아빠 닮는다 하지 않았소.”
“······엄마 닮았으면 좋겠네요.”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왜 갑자기 날 끌어들여서 패나. 내가 그리 만만해?”
“능허야. 너도 엄마 닮는 게 낫다고 여기지 않니?”
“······.”
능허는 말문이 궁색해졌다.
* * *
공부에 머무르는 동안 공융은 따로 공간을 내줬다.
본인이 무공을 익힐 때 사용하는 장소였다. 공림에서도 구석졌고, 공부 전체로 보면 가장 외곽이었다.
우거진 수풀로 둘러싸여 있어서, 소리가 바깥으로 흘러나갈 염려도 적었다.
설령 흘러나가더라도, 사람이 있는 곳까지 거리는 상당하니 여기서 웬만한 무공을 수련해도 들킬 염려는 적었다.
천무백이야 들키지 않고 수련할 장소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무공을 점검한 장소가 필요하긴 했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천무백은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느껴지는 투명한 감각에 집중했다.
죽간의 축문은 단순히 상제와 신께 축원들 드리는 글귀가 아니었다.
‘무공 구결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굳이 따지면 아직 무공이 정립되지 않던 시기의 원형, 또는 무공의 시초라고 봐야겠지.’
공자가 괜히 축문을 바탕으로 신공을 만들어 낸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글귀가 아니라, 무공구결과 비슷했다.
물론 상고시대, 어쩌면 더 이전의 물건이라 그런지 무공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다만 형식은 무공 구결과 매우 유사했으니,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무공처럼 활용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천무백은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온갖 지식을 꺼냈다.
경천혼공을 창안했던 것처럼, 천무백은 스스로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식과 실력을 갖췄다.
대종사(代宗師).
단순히 무공의 경지가 아니라, 무공의 창안자이자 설계자임을 의미했다.
천무백은 공자가 축문을 보고 재생신공을 만들어 낸 것처럼, 중단전의 심법을 창안했다.
이미 축문 내용 자체가 구결의 형식과 매우 유사했으니, 천무백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자의 재생신공과 같은 신공이냐고 묻는다면.
천무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후우.”
크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집중한 천무백의 머리에서 백회혈이 크게 열렸다.
자연지기가 상단전으로 밀려들어왔다. 경천혼공이 크게 반응하여 자연지기를 전신으로 전달했다. 천무백은 의도적으로 그 기운을 심장으로 향했다.
웅, 웅, 웅.
자연지기가 스며들어서일까. 심장의 박동속도가 서서히 빨라졌다.
쿵, 쿵, 쿵쿵쿵쿵!
전력질주 후에 미친 듯이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박동하는 것처럼.
심장은 거세게, 더 맹렬하게 박동했다. 점점 더.
중단전으로 스며들었던 자연지기가, 경천혼공으로 항마의 기운이 가득 담긴 항마기가 심장에서 혈액과 함께 새롭게 탄생했다.
투명했다.
무색이었고, 무취였다.
선기였다.
기존에 있던 선기의 끈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사라진 게 아니다. 심장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심장 자체가 그릇이 됐다.
하단전, 상단전에 이어 중단전은 천무백의 심장 자체가 됐다.
공자의 재생신공이 강력한 내력을 심장에 쌓는다면.
천무백의 새로운 재생신공은 다른 것을 다룬다.
신비로운 힘.
‘선기.’
처음엔 하단전과 상단전의 통로로만 여기던 중단전.
선기의 끈은 그런 통로로 적합했다.
하지만 중단전에 그릇이 만들어지는 순간, 선기가 모조리 심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새로이 만들어진 단전에 선기가 담겼다. 그리고 놀랍게도 천무백은 이걸 드디어 통제할 수 있게 됐다. 마치 내력처럼.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투명한 기운. 붙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내력보다 투명했으며,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묘한 느낌이었다.
하나 천무백은 이미 빙백신공의 극음지기와 경천혼공의 항마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경지에 올랐다.
내력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천하제일이라 해도 무방했다.
‘잡히지 않으면, 염(念)으로 붙잡는다. 관여할 수 없다면, 영(靈)으로서 통한다.’
파앗!
천무백이 별안간 바닥에 놓여 있는 돌을 크게 차올렸다.
발끝에 실린 내력이 돌에 실리면서, 맹렬한 속도로 돌은 날아갔다.
쉐에에에엑!
정면에 있는 나무에 박힌다면 주먹만 한 구멍이 나리라.
하나 그 순간.
지잉-
공명음과 함께 직선으로 쏘아지던 돌멩이가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파직!
급격한 방향전환이었다. 바닥으로 갑자기 수직 낙하하며 땅바닥에 거침없이 처박혔다.
천무백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팟, 팟, 팟, 팟!
바닥에 있는 돌들을 연속으로 걷어찼다. 돌들은 하나같이 직선으로 맹렬하게 쏘아지다가 공명음과 함께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계속해서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그것이 얼마나 반복됐을까. 주위의 돌이란 돌을 모두 찼을 때.
콰득!
바닥이 아니라, 조금 아래에 있던 바위에 박혀 버리는 돌.
“이제 좀 알겠군.”
천무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중단전, 재생신공에 담긴 선기가 가진 공능.
내력과는 엄연히 달랐다.
무언가 매개체를 통해 발출되는 내력과 달리, 선기는 투명했으며 공간을 단숨에 뛰어넘는 공능을 지녔다.
곧.
“염동력(念動力)이라······.”
사실 염동력은 황당한 얘기 같지만, 무림에서 낯설지는 않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을 움직이는 격공섭물이나 허공섭물 같은 경지는 예부터 존재했다.
의지만으로 검을 다루는 이기어검술의 경지도 지극히 희박하나 분명히 무림에는 존재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건 다르다.
허공섭물이나 격공섭물은 경지에 올랐음에도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과시용이다.
‘내력이 아깝지.’
단순히 물건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내력과 심력을 소모해야 한다.
치열한 전투 중에 큰 폭의 내력소모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게 바로 허공섭물이다.
하물며 이기어검술 같은 전설의 경지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선기의 힘으로 이뤄지는 건 엄연히 달랐다.
내력이 실린 채 맹렬하게 쏘아져 나가는 걸, 단순히 선기만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
쩌저저정!
천무백의 왼손에서 푸른 빛의 냉기가 맺혔다.
하단전의 극음지기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겼다.
웅! 웅! 웅!
오른손에 새하얀 순백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었다.
상단전 경천혼공의 항마기였다.
이제는 두 개의 단전에서 두 개의 심법이 동시에 기운을 내뿜는데도, 천무백의 신체에는 전혀 부담이 가지 않았다.
양손을 무심히 내려보던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꽈앙!
손뼉을 치듯, 천무백은 양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상반된 두 기운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요란한 기파를 내뿜었다.
하지만 폭발하진 않았다. 중단전에서 서서히 흘러나오는 선기가 두 기운을 어루만졌다.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무색무취의 기운.
곧 염동력이 충돌하는 두 기운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하하······.”
천무백의 입가에서 흡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전력(全力)을 낼 수 있게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