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16화>
216. 통제
“죽인 걸까요?”
“누가? 연성공이 주군을?”
제갈설아의 뜬금없는 말에 능허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휘휘 저으며 강경하게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연성공을 만나러 가서 벌써 나흘이 지났단 말이에요.”
제갈설아의 목소리는 걱정이 가득했다.
연성공의 초대를 받아 천무백이 연성공에게 간 지 벌써 나흘.
그간 천하논전은 계속됐지만, 천무백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연성공이 정말 무공을 익혔다면······ 두 분이 싸우셨을 거란 말이죠!”
능허의 얼굴에 떠오른 귀찮아하는 기색이 보이지도 않는지, 제갈설아는 연신 말을 이었다.
능허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를 빠져나가게 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 능곡은 다른 학자들과의 대화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결국, 푸념 아닌 푸념을 들어줄 사람은 본인밖에 없었다.
“그렇겠지.”
“저번에 공자님이 당당하게 한판 붙어서 받아오겠다는 말 생각하면, 비무를 했을 거예요.”
“그래. 싸웠겠지. 느꼈잖아. 기파가 요란하게 부딪치는 거.”
“어? 아저씨도 느꼈어요?”
나흘 전. 꽤 강렬한 기파가 대지를 휩쓸었다. 학자들은 모르겠지만, 응당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강렬함이었다.
보통이 아닌 고수들끼리 부딪쳤을 테니, 근방에는 천무백과 연성공밖에 없다.
제갈설아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무언가 뜨거운 게 울컥 올라왔다.
‘내가 그리 약해 보이나.’
끄응.
솔직히 말해 눈앞의 제갈설아는 이길 수 있지 않나?
그래도 제법 실력 많이 늘었는데.
“나 독안사 능허야, 소저.”
능허가 가슴을 펴며 말했다. 이젠 별호가 제법 강호에 널리 알려졌으니 자신감을 가져도······.
“네. 그렇죠.”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제갈설아의 반응에 능허는 순간 힘이 쭉 빠졌다.
새삼 자신의 처지가 우스웠다.
‘내가 어린애하고 무슨 기 싸움이냐.’
어쩐지 제갈설아하고 대화만 하면, 무언가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둘이 싸웠다면 천 공자님은 왜 안 돌아오실까요? 혹시 크게 다쳐서 정양 중인 걸까요?”
“누가? 주군이? 주군이 연성공에게 당해서 정양 중일 거라고?”
능허는 입을 쩍 벌렸다. 처음엔 농담이라도 하는가 싶어 제갈설아를 빤히 바라봤다.
걱정 가득한 눈을 보니,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능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얼마나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걱정이란 말인가.
능허가 실소를 머금었다.
“주군에게 연성공이 뒤지게 처맞고 정양 중인 거면 몰라도. 주군이 정양 중일까.”
“뒤지게 처맞다니요! 천 공자님이 아저씨처럼 흑도는 아니잖아요.”
“······어째 그 말은 나는 그럴 것 같다는 것처럼 들리네. 소저?”
“오해는 하지 말아요. 아저씨를 그런 무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의리도 있으시고, 가족을 생각하는 모습 보면 정도 깊으시고요. 다만, 그래도 느낌이 있잖아요. 아저씨가 천 공자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죠.”
“아니, 거의 확정적인 추측이라니까?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정도로 두들겨 팬다는 게 뭔지 알아? 그게 바로 주군이 행할 수 있는 기적 중 하나라니까?”
“에휴. 아저씨, 저니까 뒷담화 들어주는 거예요. 어떻게 모시는 주군을 그렇게 모함할 수가 있어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오히려 능허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제갈설아의 모습에 능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새삼 억울함이 치밀었다. 근래 맞지 않았을 뿐. 천무백에게 수련을 빙자한 폭력을 얼마나 당했나.
‘진짜 비 올 때 먼지 나던데······.’
뭐라 해도 말이 안 통하리라는 걸 직감한 능허는 그냥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능허가 입을 다물자, 제갈설아는 허리춤에 팔을 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연성공을 찾아가 봐야겠어요!”
“어떻게?”
“만남을 청해야죠.”
“주군도 안 만나 줘서, 논전에 참여하는 수까지 썼는데?”
“그야······ 음.”
“좀 진득히 기다려 봐, 소저. 주군이 당할 리는 없으니까. 그 양반,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아도 머릿속에 이미 모든 판이 쫘아악 깔려 있을걸?”
제갈설아는 천하 태평한 능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그런 평안한 태도가 역설적으로 강한 믿음을 안겨줬다.
천무백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다.
새삼 천무백을 크게 신뢰하고 있음을 깨달은 제갈설아는 짐짓 퉁명스러워졌다.
“두 분이 제 생각보다 좀 더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응? 내가? 그 양반이랑? 허허. 가깝다니.”
능허가 헛웃음을 흘렸다.
“전혀 걱정을 안 하시잖아요. 그 말은, 걱정을 안 할 정도로 믿음이 강한 만큼 사이가 가깝다는 거나. 아니면 사이가 너무 멀어서 관심도 없다는 건데. 제가 보기엔 전자 같은데요.”
능허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턱을 긁었다.
후자는 아니다.
관심이 없기는 왜 없겠는가.
‘그 양반이 혈귀곡이고 마도 놈들이고 다 때려잡아 줘야 내가 앞으로 편히 사는데.’
그러니 전자가 맞을 것이다. 능허는 천무백이 웬만해서 죽지 않으리라 믿었으니까.
아니, 죽는다는 것 자체가 머릿속에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옛날이었으면 모를까.
지금껏 봐 온 천무백의 압도적인 신위와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이제는 아니까.
창천검신의 후인이라는 점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창천검신 그 자체라니.’
능허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무수한 전생. 특히 아직도 무림인에게는 엄청난 숭앙을 받는 창천검신이다.
능허는 죽었다 깨어나도 천무백이 당하리라곤 의심은커녕, 일말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이 제갈설아에겐 태평하다 못해 강한 신뢰로 느껴졌을 듯했다.
능허는 제갈설아를 흘깃 바라봤다.
‘쯧. 좋을 때다.’
별안간 그런 감상이 든 능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소저. 꽤 오랫동안 주군이랑 다녀봤는데. 당당하게 나서서 안 된 일도 없었고, 감당 못 할 사고를 친 적도 없으니까. 순리대로 가. 순리대로.”
“······.”
그때였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토론하던 학자들 사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토론 소리가 뚝 멈추고, 정적이 가라앉았다.
학자 모두가 일제히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능허와 제갈설아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
공부의 일각. 역대 연성공들과 존속들인 묻힌 공림.
그 가운데서 시뻘건 화광(火光)이 번뜩였다.
마치 모든 걸 불태울 것처럼, 하늘 위로 아지랑이까지 피어오르며 타오르는 화광.
“······.”
능허는 침묵했다.
제갈설아의 눈이 샐쭉해졌다.
“사고를 친 적 없다고요?”
* * *
“다 불태워 버리는 줄 알고 심장이 떨어졌었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당장 혼쭐을 내주려고 했습니까?”
“흠흠. 이해해 주시오. 여기가 다름 아닌 공림이니까 말이오.”
공융은 시선을 피하며 내공을 갈무리했다.
번뜩이는 화광을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게 무색하게, 불길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설마 공림을 태워 버리려는가 싶어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던 공융은 주위를 보고 기세를 가라앉혔다.
“비각은 다행히 멀쩡하고, 불길이 번지지도 않았구려. 분명 화광이 타오르는 걸 멀리서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만한 화광이면 보통 불길이 아니다. 공림을 통째로 삼킬 화마였다. 한데 막상 들어오니 불길은커녕 미미한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천무백이 태연하게 설명했다.
“화기(火氣)가 침범하는 건 일단 제가 막았습니다. 다만 주위가 조금 쑥대밭이 됐군요.”
천무백의 설명에 공융은 시선을 돌렸다.
비각은 멀쩡했으나, 비각이 있던 연못은 말 그대로 증발했다.
공융은 침음을 삼켰다.
‘대체 어떤 화기가 침범했길래, 연못의 물이 전부 증발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런 화기가 침범했는데도 비각은 멀쩡했다. 불에 그슬린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비각이 진법으로 보호되고 있긴 하나, 이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천무백이 화기로부터 비각을 지켰다는 것인데.
공융의 떨리는 눈빛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무언가······ 바뀌었나?’
공융의 눈빛이 날카롭게 천무백을 훑었다. 하단전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냉기는 여전했지만, 특별히 바뀐 건 없었다.
공융의 시선이 천무백의 심장 부근에 향했다.
‘······얻지 못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일 원했던 걸 얻었다면 중단전엔 거센 내력이 느껴질 터.
하나 공융은 천무백이 소득이 없다고 지레짐작할 수가 없었다.
은은하게 떠오른 미소.
실의에 빠지거나 실망해서는 나올 수 없는 미소였다.
원하는 걸 쟁취해 냈을 때 드러나는 환희였다.
공융의 눈빛을 읽은 듯 천무백은 미소를 머금었다.
“축문은 찾았습니다. 다만······ 축문이 스스로 타올라 거센 화기가 밀려오더군요.”
“축문이 스스로 타올랐단 말이오? 아니, 그걸 찾았단 말이오? 어떻게?”
“인연이 따른 것이겠죠.”
“······.”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천무백을 보며 공융은 입을 꾹 다물었다.
“축문이 스스로 타오르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오.”
“죄송합니다. 소중한 공부의 재산이 저 때문에 손해를 입었습니다.”
“으음······.”
공융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축문. 재생신공을 만들어낸 축문이니 귀한 물건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스스로 불타 사라졌다고 하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순간적으로 침범하는 화기를 막아낸 건 분명 천무백이다.
멀리서도 뚜렷이 보였던 화광이다. 공림을 단숨에 집어삼켜 잿더미로 만들 만한 어마어마한 화광.
공자 일족이 묻힌 묘역이기도 했으니, 공융은 말 그대로 심장이 철렁했었다. 조상의 묘를 관리하지 못하는 것만큼 유가에서 최악인 일이 없었으니까.
‘이미 되돌릴 수도 없고, 비각 역시 지켜냈으며 공림이 불타는 것도 막았으니. 어찌 책임을 물 수 있겠는가.’
물론 책임을 물려면 못 물 것도 아니다.
하나 비각에 천무백 혼자 들여보낸 건 자신의 결정이었으니, 자신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하물며.
‘여기서 굳이 천 공자를 몰아붙일 이유도 없지.’
이미 사라져 버린 축문이다.
귀한 물건임은 틀림없지만, 공융은 꽉 막힌 유학자라는 편견과는 달리 상당히 깨인 사람이다.
무인이기도 했으니, 실리를 중요시도 했다.
이미 불타서 사라진 물건이며, 돌이킬 수도 없다. 천무백에게 책임을 문다고 해도 돌아오지 않는 축문이다.
“괜찮소.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하나, 사람보다 귀한 게 있겠소이까. 그대는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오.”
천무백이 말갛게 웃었다.
순간 호선을 그린 천무백의 투명한 눈을 마주한 공융은 일순 부끄러움이 들었다.
빙그레 지어지는 웃음이 마치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으니까.
실제로 천무백은 공융의 의도를 파악했다.
‘부채를 남겨 주겠다는 거겠지.’
은원을 잊지 않는 게 강호의 도리다. 비단 무림만 그러지 않는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공융은 여기서 대범하게 천무백에게 책임을 물지 않았다. 천무백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연을 맺어 두는 것이다. 세상사 모르는 일이니, 도움이 간절한 순간 천무백의 조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리라.
유학자라고 보기엔 어려운 실리적이고 지극히 계산적인 면모였지만, 천무백은 오히려 그것이 기꺼웠다.
‘공자나 노자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도 원하는 건 얻었으니까. 아니, 굳이 따지면 지금 마음 같아선 공융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생각도 있었다.
‘성물.’
축문은 사라졌다. 불타서 한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까.
축문은 다시 살아났다. 천무백의 심장에서.
‘재생(再生)’
천무백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심장의 주위로 얽히고설킨 선기의 끈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선근경으로 쌓고, 진법으로 흡수했으며, 상단전관 하단전의 통로가 된 선기의 끈이 모두.
오로지 심장과 기경팔맥으로 뻗어 나가는 수많은 혈도의 교차점만이 존재했다.
심장이 천천히 박동했다. 붉디붉은 선혈이 흐르는 혈관 속으로 투명한 빛이 흐른다.
두근, 두근.
박동하면 박동할수록, 혈도를 통해 투명한 무언가가 흘러나간다.
더 빠르고, 매섭게.
그의 손끝에서 무언가 간질거리면서 흘러나왔다.
보이지 않고, 향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천무백의 선 안에는 훤히 보였다.
투명한 실이 쭉 흘러나오는 광경이. 그리고 실이 자신의 의지대로 뻗어 나가며, 움직이는 모습이.
‘됐다.’
미증유의 힘.
천무백의 손끝에서 완벽하게 통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