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15화 (215/318)

<검신재생 215화>

215. 절세지경(絕世之境)

“이거야 원. 인연이 따라야 한다더니.”

유가의 종주가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 비각에 들어오니 단번에 이해가 됐다.

“찾는데 종일 걸리겠어.”

밖에서 본 비각은 커 보이지 않았다.

직접 들어온 내부는 달랐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한 책장에는 손대면 훼손될까 봐 겁이 날 정도로 낡은 고서들이 빽빽했다.

“이마저도 진법이었나.”

의도적으로 공간을 왜곡해 비각 자체를 작게 인식하게 만드는 진법의 효과였다.

유가의 종단이자 천하 학문의 전당인 공부에서 진법이 이토록 교묘하게 사용됐다는 걸 알면, 무림이나 유림이나 모두 놀라리라.

천무백은 담담했다.

‘제갈량이 진법의 대가였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지.’

진법은 무공의 갈래보단, 학문의 한 갈래로 여겨져 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

공자뿐 아니라 제자백가들도 진법을 따로 공부하고 진지하게 연구했다.

굳이 따지면 제대로 된 진법의 정립은 학문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원시적이지만 감각의 교란만큼은 작금의 진법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작게 감탄을 내뱉은 천무백은 하나씩 주위를 뜯어보았다.

수많은 고서.

절반 정도는 공자가 직접 옮겨 적었는지, 상태가 그나마 깨끗했다.

문제는 나머지다.

아마 공자의 시절에도, 분명 낡았음이 틀림없는 게 대다수였다.

대나무로 잘라 만든 죽간이 거의 주를 이루었고, 잘게 잘게 찢어진 종이를 간신히 붙여 놓은 것들도 많았다.

그뿐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사라진 사어(死語)들에, 이건 남만이 쓰던 언어인데? 허 갈수록 태산이네.”

중원에 있던 이민족들의 글자며 한자임이 분명하나 다르게 쓰인 뜻들이며.

웬만한 학자들도 제대로 내용을 해석하려면 온갖 자료를 참고해야할 것들이 수두룩했다.

이러니 공융이 인연이 따라야 한다고, 선택받아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으리라.

“그래서 당당히 내주겠다고 한 거야. 쯧, 학자란 녀석이 머리 굴리기는.”

천무백은 혀를 찼다. 학자지만 무인으로서의 자세도 갖춘 공융이 대범하게 심법을 내주겠다고 한 이유를 알겠다.

물론 호락호락하게 질리는 없다는 생각도 가졌을 터.

설령 지더라도, 천무백이 여기서 무언가를 얻기에는 힘드리라 여겼으리라.

고난 속에서도 얻는다면, 진정 얻을 만한 자격이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천무백은 미소를 머금었다.

만일 평범한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작금의 시대라는 한계 안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면.

여기에 들어와서도 크게 얻어갈 건 없을 거다. 공융의 말처럼 정녕 인연이 따르지 않는 한.

하나 천무백이다.

천무백은 상단전을 힘껏 열었다.

상단전의 내기가 잔잔히 흘러나오며 머리를 감싸듯이 부드럽게 퍼졌다. 뇌에 새겨진 주름 하나, 하나까지.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내기는 천무백의 두뇌활용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

천무백의 눈에서 새하얀 안광이 쏟아졌다.

수많은 책 중에, 공융이 말한 축문은 찾기 어렵다.

너무 많으니까.

하면 답은 간단하다.

“모조리 읽다보면 결국엔 나오겠지.”

어차피 필요한 것은 시간 뿐.

천무백에겐 더 이상의 장애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 하나씩 해 볼까.”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 * *

비각에 안내한 공융은 알았을까.

자신도 모르는 글자, 사라진 사어, 뜻을 모를 애매한 문장까지.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공자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선 알아볼 수도, 이해도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생각이라도 했을까.

만일 존재한다면, 공융은 한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공자가 말했던 전생자(前生者).

수없이 삶을 거쳐 오며, 상고시대부터 두 눈으로 보고 느껴온 자.

그런 사람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랬다.

전생자(前生者) 천무백.

비각안의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였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았다니."

천무백은 가슴 가득 차는 희열과 포만감에 만족했다.

지식의 보고(寶庫).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손수 모은 모든 지식.

학문처럼 정립된 건 없으나, 하나, 하나가 흥미로우면서도 가치가 분명한 내용.

오죽하면 천무백의 머릿속에도 없는 것들일까.

공자가 살던 시대에서도 과거의 유물이라고 치부 받는 지식.

물론 그중엔 그저 헛웃음만 짓게 하는 하잘것없는 설화와 민담도 가득했다.

그래도 천무백은 즐거웠다.

모든 것들이 과거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왔고, 잊혀진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단순히 과거의 미신과 설화만이 엮인 게 아니다.

“이것들은 소림에 갖다 주면 아주 환장을 하겠군.”

이름만 남고 사라진 불가의 경전 같은 것들이 수두룩했다.

뿐이랴.

“무당이나 화산도 억만금을 주겠는데.”

수많은 선인이 남긴 글귀 역시 수두룩했다.

모두 다 귀한 책이다.

순수하게 감탄이 들었다.

“과연 문성왕(文宣王)도 학자였구나.”

학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지식에 대한 탐욕이다.

처음엔 당시 전생을 살아가던 천무백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미신을 수집하고, 도학과 불가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모으고 연구했겠지만.

추후에는 단순히 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본인의 지식적 포만감을 얻기 위함이 됐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지식을 한데 모아 놓을 수 있을까.

천무백인 공자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질문의 답을 구하려고 애썼던 것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 현생에서도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더 기꺼운 바는 따로 있었다.

수많은 지식 중엔 지금에서 보면 우습지만, 당시의 무공임이 틀림없는 것들이 존재했다.

“이걸 보면 제갈 소저도 무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천무백은 웃음을 지으며 책을 넘기고 또 넘겼다.

여러 동작을 행하는 그림이 가득한 죽간.

이건 당시의 무공비급서다. 물론 과거의 무공이기에 발달한 작금 보단 허술하고, 체계가 없기 마련이다.

역설적으로 천무백은 이것들이 더 좋았다.

아니,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게 남아 있었구나!”

몇몇은 눈을 빛내며 거침없이 머릿속에 담을 정도였다.

그 당시.

삼재검성으로 무림을 열었을 때, 제대로 된 글자도 없었고 기껏해야 갑골문이나 어지러운 그림들만 있을 때.

새롭게 탄생된 무공들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곤 했다.

천무백이 과거로부터 유래된 많은 무공을 안다고 해도, 무림태동시기의 사라진 무공마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고, 후인도 남기지 않고 탄생과 동시에 사라진 무공들이 한둘이었는가.

그런 것들이 이곳에 전부는 아니지만 존재했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모은 전부가.

물론 고대의 무공이 더 좋을 리가 없다.

장강의 물길이 수없이 바뀌는 동안 발전한 무공을 어찌 따라잡을 수 있을까.

정립된 초식과 형이 없다. 정해진 길이 없으며 자유분방하다.

그랬기에 천무백은 만족하다 못해 기꺼웠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무공이 정립되고 형식화되면서 체계화됐다.

무공의 체계는 곧 초식과 형을 이른다.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완벽하게 정립된 초식과 형이라는 체계가 유지되어야 후인에게 크나큰 오류 없이 이어질 수 있으니까.

만일 체계화되지 않았다면?

각각 익히는 사람마다의 주관이 깊게 들어갈 것이다.

만일 그 주관이 대종사의 경지에 있는 이들의 것이라면 오히려 다 발전할 수 있겠지.

하나 그런 이는 지극히 소수다. 절대다수는 하수이며, 헛된 주관이 들어갔다간 오히려 무공은 더 약해지며 조잡해진다.

그것이 무공의 흐름이었으며, 무림의 역사였다.

그러나 천무백에겐 아니다.

“초식과 형을 벗어나는 것, 곧 탈피(脫皮)만이 무공의 진실된 힘에 가까워진다.”

초식과 형을 탈피하는 것이 곧 천무백의 지론.

여동빈이 만들어 낸 천둔검법도, 끊임없이 생략하고 또 생략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었다.

천무백의 가치는 생략(省略)에 있었다.

모든 초식과 형을 지우고 또 지운다. 그리고 하나의 목적만 남긴다.

바로 살(殺).

삼재검성으로 무림을 열었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오로지 적을 더 빠르고, 더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삼재검을 탄생시켰다.

천무백은 단 한 번도 살이라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고한 검도(劍道)? 검을 닦아 마음을 수양한다?

“개소리.”

천무백이 짧게 냉소했다.

이곳에 남은 태동기의 무공들은 하나같이 허술하고, 초식도, 형식도 없이 조잡했다.

하지만 한 가지 목적에만은 충실했다. 지독히도 위험했다. 오로지 적의 목숨을 끊는 하나의 기술만으로 이뤄졌다.

이것이 바로 무공의 원형.

천무백에겐, 이것들만큼 더 귀한 게 없었다.

그러다 불현 듯, 천무백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상단전을 열어 극한까지 두뇌를 사용해서 그랬는지, 천무백의 생각이 좀 더 깊게, 더 멀리 나아갔다.

“그런가…….”

천무백이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봤다.

허전했다.

검이 없었다.

그러나 보였다.

“내 검의 원형(元型).”

그 첫 시작.

삼재검성부터 시작해서, 천무백은 스스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고 여겼다.

수많은 무공을 익히며, 자신의 검에 더해 왔다.

모든 무공의 묘리와 이치를 접목하고, 새로운 걸 창안했다.

그렇게 나아갔다.

……라고 여겼다.

“어쩌면 내가 그리도 중요하게 여겼던 생략의 묘를, 내 검은 제외했을지도 모르겠지.”

덜어내야 한다.

원형, 그 원형으로 더 다가가야 한다. 생략하고 또 생략해야 한다.

지금의 검은 온갖 것들이 다 담겨 있지 않은가.

천무백은 어쩐지 자신의 검 자체에 많은 것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보였다.

“내 검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 했었군.”

무공은 그토록 탈피와 생략을 중요시했으면서.

어째서 자신의 검만큼은 무언가를 더 해야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을까.

“너무 많은 걸 담고, 많은 걸 표현하려 했구나.”

천무백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쓴 만큼, 후련한 웃음이기도 했다.

어쩐지.

손에 검이 들리진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천무백의 손에 검이 들린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절정 이후, 경지를 나누는 게 무의미하다 하여 불리는 입신지경.

그러나 입신지경 안에도 분명히 경지가 나뉘었으니, 창천검신과 검존, 그리고 수많은 고수가 이를 증명한다.

지금 이 순간.

천무백은 입신지경이란 경지 안에서.

“조금은 더 가까워지는 거 같네.”

나아갔다.

절세지경(絕世之境).

현 무림에서 한손에 꼽을 이들만이 오른 경지.

천무백은 그 경지에 발을 들였다.

* * *

마치 걸신들린 거지가 음식을 탐하는 것처럼.

천무백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미친 듯이 읽고 또 읽었다.

그건 흡사 독서라기보단, 축적이었다.

지식의 축적.

닥치는 대로 머릿속으로 밀어 넣고 또 밀어 넣는 일련의 과정.

이제는 사라진 상고의 지식을 머릿속에 넣으면서 천무백은 비단 무학의 길뿐 아니라,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도가적인 깨달음이기도 했으며,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에 가까워지는 경지이기도 했다.

도가의 도(道)와 불가의 도(道)까지.

천무백은 이곳에서 작지만, 남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끝내.

수많은 책 사이로 곱게 접힌 채 숨겨져 있던 손바닥 한 뼘 정도의 크기.

축문(祝文).

천무백의 모든 직감이 말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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