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14화>
214. 전생자(前生者)
공부는 거대했다.
후인들이 머물고 살아가는 공부는 건물만 480칸이었다.
공자와 성현들이 묻힌 공묘(孔廟)는 무려 466칸의 건물로 이뤄졌다.
천하논전에 참여한 2천여 명의 학자가 머무르는데도 한적하다는 인상을 준 이유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자 일족의 묘역인 공림(孔林)은 공부의 열네 배에 달했다.
그러니 과거의 천무백도 모든 곳에 발이 닿지 못했었다.
‘이쪽은 처음 와 보는데.’
산동검호로 몇 번이고 공부를 방문했지만, 공림의 중심까지 닿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우거진 수풀로 이뤄진 공림. 수많은 비석과 묘패 너머로 깊숙이 들어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천무백은 새삼 감탄했다.
“……!”
어디서 물을 끌어다 왔는지, 맑다 못해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한 연못은 얼핏 보기엔 호수처럼 넓었다. 주위에는 잘 꾸며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웠다.
형형색색의 꽃이 연못에 비쳐, 흡사 꽃으로 이뤄진 세상을 보는 듯했다.
누가 봐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비경(秘境)이었으니, 천무백은 불현듯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제갈 소저도 왔으면 꽤 즐거워했겠군.’
무림인이면서도 학자임과 동시에 여인이기도 했으니, 은근히 꽃과 아름다운 장식을 좋아하는 제갈설아를 떠올린 천무백은 이내 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름다운 비경이 아니다. 정확히는 비경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무언가.
연못 위.
운남 아래의 남만(南蠻)에서 유행하는 가옥처럼 꾸며진 수상전각(水上殿閣)이었다.
천무백의 시선이 거기에 닿았음을 봤을까. 공융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다.
“비각(祕閣)이오.”
연못 위에 꼿꼿이 서 있는데 어찌하여 숨겨진 전각이라 할까.
천무백은 익히 짐작했다.
“진법의 묘리군요.”
천무백의 나직한 말에 공융은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어처구니가 없다기보다는, 이제는 놀랍다 못해 체념의 기색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눈치채셨소?”
“연못과 꽃의 구도가 전각을 시야에서 감추니, 말 그대로 비각이군요.”
연못과 주위를 이루는 형형색색의 꽃은 굳이 따지면 함정이었다.
꽃의 배치, 우거진 수풀의 흐름, 연못으로 반사되는 햇빛과 비경, 심지어 코를 찌르는 향내까지.
모든 게 시각과 후각을 교란하여, 우뚝 솟아 있는 비각을 숨기는 진법 그 자체였다.
유가의 종단이자, 천하학문의 전당인 공부에서 진법이 있다는 건 적어도 천무백에겐 어색하지 않았다.
이미 공자가 무공을 익혔다는 게 명명백백한 사실인데, 공부에 진법이 있는 게 무슨 상관이랴.
천무백도 꽤 흥미로웠다.
‘공림에 와 본 적은 없으니. 하긴 오더라도 쉬이 발견하긴 어려웠겠어.’
공림은 묘역이니, 산동검호로 공부를 여러 번 드나들 때도 찾지 않던 곳이다.
‘심심하면 나중에 공림에 유람이나 가자고.’
‘무슨 조상들 묘역에 유람을 가? 비무하기 싫어서 머리 굴리는 거 봐라? 자고로 공부할 때 중요한 건 건강한 정신이고,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서 오는 법. 공자가 그리 전하며 무공을 전수한 걸텐데?’
‘아니. 언제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하여간. 자네도 그 마교놈들 때려잡으러 가기 전에 한번 같이 가 보자고. 거기 신기한 게 있다니까.’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련한 옛 기억.
몇 없던 친우이자, 제법 좋은 술 상대였고, 또 좋은 경쟁자기도 했던 당대 연성공을 떠올린 천무백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여기였겠지. 그때 시간이라도 내서 한번 올 걸 그랬군.’
애석하게도 당시의 약속은 무위로 돌아갔다.
연성공은 일찍 요절했고, 산동검호도 산동에 숨어든 마교도와의 싸움으로 바빴으니까.
천무백은 아련히 떠오르는 옛 기억을 한편으로 밀어 넣으며 공융을 바라봤다.
“심법을 전해 주는 데 왜 여길 찾아옵니까?”
“난 약속을 지킬 것이오.”
“심법이 저 전각에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요.”
천무백의 목소리는 무심했으나, 공융은 목소리에 담긴 가시를 느꼈다.
내공심법은 곧 구전으로도 전할 수 있는 법.
오히려 곁에서 구결을 알려 주며 내공의 흐름을 봐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공융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내 심법은 내가 죽어야만 다음 대에 전해진다오.”
“······.”
천무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죽어야 전해진다고?”
이게 뭔 소리야?
천무백이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아들과 장손에게선 중단전의 내기가 보이지 않았다.’
연성공의 자식과 장손에게도 내기가 분명 느껴졌다.
한데 중단전이 아니었다.
분명히 하단전이었다.
심지어 제갈설아도 말하지 않았던가. 장남과 장손에게선 내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공융에게선 느낄 수 없었다고.
그건 공융이 경지가 더 높다는 방증이기도 했지만, 중단전에서의 내기의 흐름은 하단전과 명백히 다르다.
만일 장자와 장손이 중단전에 내기를 쌓았다면, 제갈설아가 그 둘보다 경지가 높다고 한들, 내기를 엿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심법을 익혔다면, 자식과 손자도 중단전에 쌓았겠지. 이것이 비밀이었나?’
천무백이 공융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기자, 공융은 의심하는 눈빛으로 받아들이곤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어려울 것 알고 있소. 솔직히 말해 공자께서 남기신 무공과 심법은 당장 강호로 나가도 하나의 문파를 개파하고도 남음을 잘 알고 있소. 내 아무리 강호 사정에 어둡다고 해도 말이오.”
천무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 공융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세가 이상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천하에 딱 일인만이 익히고 나아갈 수 있으니까.”
“천하의 일인이라.”
단 한명만이 강하다면, 그건 무림에서 길게는 살아남을 수 없다. 적어도 한 세력으론 말이다.
“중단전의 심법이란 건 참으로 오묘한 것이오.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롯이 빛나니. 후손이 그걸 그대로 취할 수 있소.”
사람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을 쌓아온 내공이 그대로 존재한다.
하면.
“······그걸 다음 후인에게 넘겨준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소.”
“······.”
솔직히 말해 천무백조차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공자께서 천하유력(天下遊歷)의 여정에 올랐을 때, 제법 흥미로운 사람을 만났다고 전하오.”
“흥미로운 사람?”
“본인을 전생자(前生者)라고 소개하는 사람이오.”
“······.”
공융이 딱딱하게 굳은 천무백의 표정을 보곤 쓰게 웃었다.
“허황된 말로 지금 상황을 모면하려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오. 적손에게만 전해져 오는 비사(秘史)니 믿든, 안 믿든 자유요.”
“아니, 믿습니다.”
“······뭐, 그렇게 단호하게 신뢰할 정도는 아니다만. 나도 긴가민가한 게 좀 있거든.”
천무백이 본인보다 더 확신 어린 표정으로 믿는다 하니 공융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천하에서 가장 많은 걸 아는 지식인으로 소문이 났으니, 자칭 전생자라는 사람이 찾아와 물어봤다고 하오. 계속해서 반복되는 윤회를 끊고 싶다며, 방법을 아느냐고. 물론 공자께선 그 말을 처음엔 허황된 소리라 여기셨지.”
“…….”
“당시 세상엔 온갖 미신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고, 거짓 믿음과 그걸 이용하여 민초를 고달프게 만드는 온갖 사이비들이 넘쳤소. 공자는 그런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수많은 가르침을 내렸지만, 민초들은 불구하고 계속해서 헛된 미신에 빠졌지. 처음에 자칭 전생자의 말도 공자께선 그저 미신에 빠진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걸 안타깝게 여기셨나보오.”
“그랬지요.”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맞장구였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천무백의 표정이 퍽 진지했기에 공융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전생자뿐 아니라 횡행하는 미신들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공자께선 오히려 미신들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소. 그래서 세상 모든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모으셨소. 그런 와중에 당시 어느 한 도인을 만났다고 하오.”
“도인 말입니까?”
“공자께서 전생자의 얘기를 언급했는데, 도인은 비슷한 게 있다고 하며 한 갑골문으로 적힌 축문(祝文)을 내놓았다고 하오.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되는 의미를 담은 축문이라 하는데…….”
이쯤 되니 천무백은 공융이 무슨 말을 하는가 짐작됐다.
도인이 넘겨준 축문(祝文).
일전의 선근경의 구결을 외운 것만으로도 천무백은 성물의 선기를 흡수했다.
문장에 담긴 힘.
곧 성물의 힘이었다. 천무백의 눈이 빛났다.
“그 축문이 심법이겠군요?”
“맞소. 축문에 적힌 내용을 연구했고, 공자께선 그걸로 신공을 만드셨지. 알고 있겠지만, 당시 무림과 민간이 따로 구분되던 세상은 아니었으니까. 공자께서 호신을 위해 무공을 익혔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오. 오히려 무공도 학문이라 여겼으니까.”
공자가 만든 신공.
“재생신공(再生神功)이오.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후인에게 기운을 넘겨주면, 후인의 중단전에서 다시금 재생하는…….”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가 간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천무백이 기억하는 공자는 중단전을 아예 활용하지 않았으니까.
‘나와의 만남 이후에, 그런 신공을 만들어 낸 거였어.’
새삼 공자에 대한 감탄이 들었다.
유가의 종주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천무백이 봐 온 수많은 천재 중 가장 압도적이지 않을까.
삼재검성이 무림을 열었다는 건 은유적인 표현일 뿐, 무림과 민간이 구별되지 않던 시대.
즉 단전이 제대로 개발되어 내공을 쌓는다는 개념이 부족하던 시대에 축문에 적힌 문구를 보고 신공을 만들어 내다니.
“유가의 종주에 무학에선 대종사의 경지라.”
중얼거림을 들은 공융이 쓰게 웃었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셨지. 그대가 심법을 원한다고 하나, 애석하게도 난 줄 수 없소. 그대가 날 죽인다면 모를까.”
천무백은 내심 실소했다.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상대가 악독한 마인도 아니고, 현 연성공이 아닌가.
제아무리 천무백이어도 그런 짓은 못 한다.
“그러니 이곳에 데려왔소. 저 비각에, 축문이 남아 있을 거요.”
“…….”
“차마 유가의 테두리 안에 품을 수 없는 것들. 천하의 모든 미신과 잊혀진 전통과 풍습, 사라진 신화와 설화 그리고 전설, 도가와 불가의 그것들까지. 공자께서 천하를 유력(遊歷)하시며 모은 당시의 모든 것들. 그것들이 정리된 곳이 바로 여기, 비각이오.”
“그렇기에 숨긴 곳이군요.”
“유가의 가치에서 멀어지고, 공자께서 그리도 멀리하고자 하셨던 숱한 미신들이 저 안에 모두 있소. 심지어 진시황의 분서갱유에서도 살아남은 상고의 지식이지. 비록 유가의 학문과는 멀더라도.”
이제는 사라진 공자가 살던 시대의 모든 것.
유가의 테두리 안에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지식.
천무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저곳은 그 누구도 관리하질 않았소. 처음이야 공자가 남기신 거니 관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유가의 가치와는 먼 내용이니 차츰 잊히고 멀어지게 됐소.”
오히려 당시의 공자는 상당히 깬 사람이었다.
제자백가의 모든 학문을 공유하는데 망설임이 없었으니까. 하나 시간이 워낙 많이 흐른 지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번 잘 찾아보슈.”
“······.”
어쩐지 말투가 변한 느낌에 천무백은 골이 아파졌다.
내심 고소를 머금은 표정이 눈앞에 스쳐갔다.
“말이 됩니까.”
“불가에선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는 법이라 하지요. 도가에서는 연이 닿는다면 결국 이뤄지리라고 하지. 그것과 같소.”
“어째 유가의 종주가 할법한 말씀은 아닙니다만.”
“재생신공과 공가 무학의 후계자로서 하는 말이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천무백이 원했던 건 성물이다.
다만 성물에서 재생신공이 비롯됐다고 하니, 오히려 무인으로서 천무백은 상당히 욕심이 났다.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비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혹시 그 전생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얘기가 상당히 흥미로웠나 보오. 궁금한 걸 보니.”
눈을 동그랗게 뜬 공융은 실소를 머금곤 말을 이었다.
“수많은 미신과 도학과 불가의 모든 것을 공부하고, 이해한 공자께선 참람되게도 전생자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지.”
“그래서 답을 찾았답니까?”
“글쎄. 그게 답일지는.”
공융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참으로 간단한 이치인지라. 삶이 재생되는 걸 막을 수 없는 것이, 정녕 도가에서 말하는 상제의 뜻이라면, 아니면 지옥 염라의 뜻이라면, 상제와 염라를 베어 버리라고, 기록을 남기셨더군.”
차마 공자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말하기 껄끄러운지, 공융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한데 이내 그의 얼굴엔 미미하게 의문이 떠올랐다.
천무백이 웃고 있었으니까.
“그렇군. 상제와 염라를 베어 버려라……. 그렇지. 어쩌면 그게 가장 간단한 이치겠지.”
“……그게 그리도 궁금하셨소? 과거의 재밌는 이야기일 뿐인데.”
천무백이 가볍게 웃었다.
“전생자가 만일 이번 시대에서도 새로 전생했다면, 그 얘기를 전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만일 지금도 전생해서 살아 있다면, 참 재밌는 일이겠소.”
공융은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웃었다.
천무백도 마주 보며 웃었다. 다만, 천무백의 웃음은 공융과는 다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