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13화>
213. 맨 주먹의 사내
적수공권(赤手空拳).
여러 의미가 담겼고, 많은 용도로 사용되는 말이다.
하나 무림에서는 단순한 의미였다.
맨손과 맨주먹의 무인(武人).
곧 권(拳)이었다.
지이이이잉!
파열음. 대기가 압축되고 찢겨지며 비틀리는 특유의 굉음이 귓가에 파고듦과 동시에 천무백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천무백이 피하자마자 있던 자리의 대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일렁이며 압축됐다.
신기한 광경이다. 육안으로 보였다. 대기의 표면에 균열이 가는 진귀한 장면. 하나 신기하다고 쳐다볼 수는 없었다. 균열은 유리처럼 깨져나가며 주위를 휩쓸었으니까.
쩌저저정!
‘과연, 제대로 익혔군.’
천무백이 나직이 감탄했다.
만일 피하지 않았다면, 휩쓸려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천무백이 감탄을 내뱉었음에도 공융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또 피했다고?’
파열권은 단순한 권법이 아니다. 주먹을 휘둘러 내공을 발출한다.
일종의 권강을 이용한 고강한 무공이다.
내공이 주먹을 통해 발출되는 속도는 그야말로 찰나!
사람의 시간개념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촌각.
주먹을 휘두르면, 원했던 장소의 대기가 파열음을 내며 찢어지는 건 정말 눈 깜짝할 새.
‘운이 아니다!’
벌써 두 번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처음엔 운이라고 여겼다. 극한에 이른 감각이 반응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내공을 끌어내어 막는다면 모를까.
공융은 침음을 삼켰다. 상대가 검객이면서도 검을 들지 않아 얕본 마음도 있다.
그는 뼈저리게 반성했다.
‘검객이 검을 쓰지 않고 주먹을 쓴다는 건…….’
당연히 날붙이를 손에 들고 있는 게 강하다.
무림이 태동한 이래, 아니 상고시대부터 인간이 싸움과 전쟁을 시작한 역사를 보면.
당연히 손에 날카로운 무기가 들린 게 더 강한 법이다.
그런 상식은 상대도 당연히 갖췄을 터.
하나 자신만만하게 두 주먹으로 나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융이 꽉 다문 잇새로 숨을 토하듯 내뱉었다.
“어마어마한 고수!”
천무백이 웃으며 응수했다.
“그것이 나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당당한 대답. 공융은 뭐라 더 반박할 수 없었다. 인정해서가 아니다. 지금껏 피하기만 하던 천무백이 단숨에 쇄도했다.
공융이 화들짝 놀라 수도(手刀)로 내리찍었다.
‘제법!’
급박한 상황에서도 천무백의 궤도를 예측하는 공격.
엄청난 동체시력이 바탕이 된 훌륭한 판단과 반응 속도다.
공격해 들어갔다가 오히려 중심이 무너지는 반격기.
다만 상대가 천무백이라는 사실을 고려치 못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수도가 뒷덜미를 내리찍는 순간, 천무백의 신형이 탄력 있게 솟구쳤다.
천무백의 손이 먼저 공융의 팔꿈치를 잡았다.
“……!”
뚜둑!
청각이 통각보다 예민한 것일까.
귓가에 꽂히는 섬뜩한 파열음보다 먼저 팔꿈치로부터 강렬한 극통이 뇌리에 사정없이 박혔다.
지이이이잉!
공융은 반사적으로 왼 주먹을 휘둘렀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보였다. 내기의 흐름이.
‘역시, 옛날에도 느꼈지만 특이해.’
중단전에서부터 이어지는 내기의 흐름이 거침없이 발출되며 파열음을 낸다.
주먹을 통해 발출되는 강기가 천무백을 찢어버릴 듯이 파고들었다.
천무백은 손을 거둬들이며 뒤로 물러섰다.
단숨에 공융의 팔꿈치를 꺾어 버리며 상체를 제압하려 했지만, 공융은 훌륭한 반격을 통해 시간을 벌었다.
“크읍.”
우두두둑!
공융은 신음을 씹어 삼키며 반쯤 비틀린 팔꿈치를 억지로 맞췄다.
섬뜩한 광경에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저게 어디 봐서 학자의 모습인가.
“독해도 너무 독하군.”
“독하지 않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던 게 바로 내 조상님이셨지.”
“인정하오.”
그 말을 끝으로 공융이 쇄도해 왔다.
공가의 무공은 오로지 권각(拳脚)에 바탕을 뒀다.
적수공권이란 의미를 가장 잘 살린 무공이다.
‘좋은 무공이다.’
지이이잉!
천무백은 공방을 이어 가며 그리 생각했다.
사실 무림에서 권법과 각법은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공에 접목하느냐에 따라 충분한 위력을 내는 데 효과적이긴 하나, 주가 되기에는 어렵다.
경지에 오른 이들은 내기의 수발이 자유로워 호신강기를 충분히 펼쳐 낼 수 있고, 권각만으로 깨부수고 상대를 죽인다는 건 쉽지 않으니까.
결국, 많은 무인이 자연스레 무기를 들게 되었다.
하나 천무백은 공가의 무공에 적잖이 감탄했다.
‘만류귀종이라더니, 경지에 오르면 권각만으로도 이만한 위력을 낼 수 있군.’
약 200년 전.
산동검호로 찾아왔던 때보다 더 강렬했고 위력적이었다.
공부가 아무리 학문을 닦는 곳이라고 해도, 공자의 적손만큼은 꾸준히 무공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 세월이 무려 천 년을 넘는다.
‘긴 세월 동안 오로지 하나만을 발전시키고 닦아 왔으니까.’
강호에선 수많은 무공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새로운 무공이 창안되고, 오래된 것들이 사라진다. 후인을 남기지 못하고 죽고, 기습에 당해 죽고, 사문이 멸문당하고.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무공이 어디 한둘인가.
하나 공부의 무공은 그렇지 않다.
천하 학문의 전당이라는 거대한 성벽.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은 공자의 핏줄.
대대로 전해져 오는 하나의 무공.
사라질 수도 없었고, 역설적으로 한 무공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수 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다른 건 몰라도, 공융이 펼쳐 내는 권각은 일세의 무공임이 틀림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지이이이잉!
또 한 번 파열음이 귓전을 때렸다. 어느 순간 기회를 엿본 공융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하나 이어지는 광경은 이전과는 달랐다.
“……!”
공융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천무백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역으로 돌진해 왔다.
무게중심을 낮춘 채, 낮은 자세로 대기가 찢어지는 부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며.
단숨에 공간을 압축하며 도달한 천무백이 손을 휘둘렀다.
공융의 손목이 덜컥 잡혔다.
“어딜!”
공융은 당황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손목을 비틀었다. 오히려 역으로 천무백의 손을 잡아 꺾어 버릴 속셈이었다.
내기가 일순 손목에 실리며,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어마어마한 유연성이 빛을 발했다.
하나 천무백은 애석하게도 공융과 달리 경험이 많다.
이미 예측했다는 듯이 천무백은 침착하게 빙공을 주입했다.
쩌저적!
“크읏!”
순식간에 치밀어 오르는 냉기에 공융의 손목이 둔해졌다.
급히 기운을 밀어내어 냉기가 치미는 건 막았지만, 움직임이 둔화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천무백의 손이 빠르게 손목에서 올라오더니 팔꿈치, 그리고 팔뚝을 굳게 잡았다.
‘아아!’
공융의 눈이 아득함이 스쳤다. 이대로 팔이 부러진다면, 아예 비틀려버린다면. 무공은 둘째 치고, 앞으로 붓도 잡지 못하지 않겠는가!
“……!”
공융은 몸이 둥실 떠오르는 부유감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천무백의 발등이 발목을 밀어냈다. 중심을 일순 잃어버렸다. 발목에 냉기가 치미며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이내 세상이 뒤집혔다. 하늘이 아래로, 땅이 위로 솟구쳤다.
쿠웅!
“컥!”
척추에서부터 짜르르 울리는 격한 고통에 단발마의 신음을 터뜨렸다.
단숨에 몸의 중심을 엎으며 패대기친 천무백은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이대로 안면을 주먹으로 때리면 사실상 끝이다. 하나 엄연히 비무였기에 천무백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점혈을 짚었다.
패대기쳐진 채 공융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완벽한 무력화.
“……어떻게.”
공융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사실 당당하게 비무를 나선 건 그만의 계산이 따랐다.
상대의 허리춤에 검이 없다는 점을 노렸다.
짧은 시간 조사한 결과, 천룡검협은 오로지 검 하나로 강호를 진동케 한 검객이었으니까.
물론 검을 잡지 않는다고 해도, 단순 체술로도 뛰어나겠지만.
공융은 자신만만했다. 공자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오는 권각의 깊이는 중후했으니까. 똑같은 적수공권이라면 자신이 유리하다는 치밀한 판단이었다.
“경험이 많다 보니, 주먹으로만 싸운 적도 많아서 그럽니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매 반복되는 삶에서.
천무백의 수많은 적은 말했다.
‘그가 검을 놓치게 하라.’
그 말은 검을 잡은 천무백은 곧 무적이며, 상대할 수 없다는 적들의 비명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검을 놓아야만 그나마 상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의미기도 했다.
실제로 수많은 적이 천무백이 검을 놓치게끔 몸을 던졌고, 생각보다 통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때가 되면 적들은 하나같이 웃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는 건 천무백이었다. 검을 놓쳐도, 천무백은 승리했다.
검을 놓친 적수공권의 검신.
맨주먹의 사내.
그것이 곧 천무백이다.
* * *
싸움은 끝났다. 천무백에게 상처 하나 못 입혔으며, 자신은 무기력하게 완벽히 제압당했다.
이 상황까지 돼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융은 입을 다물었다.
무공으로써 겨뤄 본 것도 처음이니, 이게 첫 패배였다.
어쩌면 그에게 가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첫 비무의 상대가 천무백이었으니까.
천무백은 공융에게서 느껴지는 그 패배감을 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왜 당대 연성공이 귀한 공부가주를 내놓으면서도 산동검호를 청했는지 알겠습니까?”
“…….”
“뭐든지 고이면 썩는 법입니다.”
그 말에 공융이 발끈했다.
“고이지 않았다. 수없이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다. 공자께서 남기신 유산을 그리 고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것이 문젭니다. 무공은 학문이 아니니까요.”
“……!”
“강호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유자들이 무림인을 그저 싸우기만 좋아하는 무도한 무뢰배들이라고 여기는 것도, 그것만이 무림인이 무림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죠.”
“……공부의 무공이 고였단 말인가.”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무공은 고여 있지요. 분명 발전했을 겁니다. 과거보다 더 위력적이고, 함축적이며, 폭발적이겠지요. 하지만 그럼 뭐 합니까. 경험이 미천한데.”
“…….”
천무백이 지적하는 바는 정확했다.
공융의 경험이 미천하다는 것. 아니, 아예 없음을 지적했다.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한들, 무공을 사용하는 이의 경험이 부족하다면 모든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법이다.
물론 단지 그저 스스로 익히고, 닦아 온 정도로 천무백을 상대했다는 것만으로도 공융은 대단한 이다.
문무겸전의 천재라는 칭호가 절대 아깝지 않은 위인이다.
다만 그가 순전히 입신지경의 경지에 올랐음을 고려하면, 실제 실력이 그에 미치는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만일 오늘 이 자리에서 천무백이 검을 들었다면, 어쩌면 이보다 더 시시하고 빠르게 끝났으리라.
솔직히 말해서.
‘아쉽군. 저 무공이 아까울 정도야.’
권각만으로도 이처럼 위력적인데. 제대로 된 경험이 덧붙여졌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으리라.
그저 추측이 아니었다.
‘실제로 공자는 저 주먹 하나로 중원을 주유하며, 가르침을 전했으니까.’
평범한 민초에서 강도로 돌변하는 이들과 수많은 마적, 중원 바깥의 야만인들까지.
모든 역경과 어려움을 주먹 하나로 이겨 내며 가르침을 전했던 게 공자다. 당시 공자가 선보인 무공이 얼마나 강했으면, 흑도의 최강자인 자로가 단숨에 고개를 숙이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겠는가.
그만큼 경험이란 중요했다.
공융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생각이 많아진 건 천무백도 마찬가지였다.
천무백은 불현듯 여동빈을 떠올렸다.
개인의 수양을 중요시하여 강호에 나서지 않고, 검선의 자리에 올라 신선이 된 자.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오로지 수양으로만 높은 곳을 바라본 사내.
‘여동빈이여.’
그가 검극에 이르렀기에 신선이 되었으리라 여겼다.
하나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과연 검극에 닿았을까. 치열한 싸움과 피비린내를 피하면서.
‘너는 검극에 이르렀는가?’
과연 검극과 우화등선은 상관이 있을까.
모른다. 그의 마지막 길이 어떠했는지는 모르니까.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우화등선 따위. 그의 삶에서 중요하지도 않다. 아니, 가당치도 않다.
천무백이 바라는 건 하나다.
‘검극.’
아득한 그 너머에 닿아 윤회의 굴레를 끊는 것.
오직 그것만이 목적이었다.
그때였다.
“가지.”
“……?”
갑작스런 공융의 말에 천무백이 빤히 쳐다봤자. 공융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부의 심법은 전해 준다고 전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오. 선택을 받아야 하거든.”
“선택?”
“직접 보면 알 것이오.”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공융은 등을 돌렸다. 천무백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