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12화 (212/318)

<검신재생 212화>

212. 공가(孔家) 파열권(破裂拳)

벽면에 가득 꽂힌 빽빽한 서책.

코끝을 찌르는 먹물과 종이 특유의 향.

누가 봐도 학자의 서재였지만, 서재를 가득 메운 공융의 기세는 학자가 아니다.

촛불 하나에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학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인의 눈이었다.

천무백이 발을 들어선 순간,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훑어보는 시선은 칼날과도 같았다.

온몸을 샅샅이 뜯어보는 듯이 날카롭고, 내부까지 꿰뚫어 보는 투명한 시선.

“그대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소?”

천무백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공융은 학자로서가 아니라, 무인으로서 천무백을 맞이했다.

천무백도 무인으로서 그를 대할 것이다.

“내 정체를 물어보지 않는 걸 보니, 그건 궁금하지 않나 보군요.”

“공부의 저력을 의심하지 마시오. 적어도 공부, 아니 산동에서 공부의 시선은 관아보다 더 깊고 넓은 법이니.”

잘 안다. 천무백이 한때 산동에서 활약했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공부가 만일 역심(逆心)이라도 품었다면, 산동에서 나라를 세우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이 은연중에 퍼져 있지 않은가.

그만큼 산동에서 공부가 가진 저력은 강력했다.

“천룡검협 천무백. 홀연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소림을 구하고, 화산과 종남을 이겼으며 무당마저 구해 낸 협객. 하남에서는 병자를 치료하여 하남신의란 명성을 떨치고, 양민을 괴롭히는 흑도를 벌해 하남협객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지.”

“많은 걸 알아보셨군요.”

“내 평생을 학문을 닦고, 미지에 대한 탐구심으로 살아온지라 호기심이 많소. 그대는 어찌 공가의 무공을 아는 것이오?”

“공부가 무공을 익혔음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공융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없다는 힘 빠지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더 진해졌으니, 천무백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렬한 안광이 쏘아졌다.

“이미 나를 자극해 놓고선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그대는 알고 있잖소. 공부에 무공이 전해져 옴을. 난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소. 아무도,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니까.”

“정녕 아무도 모릅니까?”

천무백의 의미심장한 말에 공융은 뭐라 반박하려다 순간 퍼뜩 드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천년이 넘어가는 세월 동안 외부인이 단 한 번도 몰랐던가.

아니다.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

“산동검호 위천악!”

공융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얼마 전 그에게 전해진 서찰에 남겨진 건 산동검호임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당신이, 그 서찰을 보낸 사람인가? 하면 그대가 산동검호의 진전을 이었는가?”

공융의 목소리가 떨렸다. 산동검호라면. 한때 산동을 무대로 명성을 떨쳤던 산동검호라면 공부의 비밀을 알 법하다.

당장 공부에 남겨진 기록만 해도, 당대 연성공과 비무를 겨뤘단 얘기가 수두룩하니까.

천무백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무언(無言)은 곧 긍정이니.’

침묵은 곧 무언의 인정이라 여긴 공융은 허탈한 웃음을 내비쳤다.

“산동검호의 후인이 공부를 찾다니…… 대체 무슨 목적이오? 또 천하논전이 끝나면 따로 부르겠다고 했었는데. 어찌 이리도 조급하시오? 공부와 산동검호의 후인이 서로 만남을 즐기기엔…… 그대가 진전을 이었다면 알 터인데. 공부와 산동검호의 사이가 매끄럽지 않음을.”

“매끄럽지 않다고요?”

순간 천무백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매끄럽지 않다니. 공융이 말하는 어조를 보면, 숫제 껄끄러운 불청객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한데 천무백은…….

‘내가 공부하고 사이가 안 좋았었나?’

글쎄.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시 산동검호 위천악으로 활약했을 때, 천무백은 강호를 크게 종횡하지는 않았다.

산동을 주무대로 삼으니, 자연히 공부를 여러 번 찾게 되었다.

‘그때 제법 친밀했던 것 같은데.’

당대 연성공은 호탕하기 짝이 없었다. 학문으로서도 대성했지만, 무(武)에서도 무림의 제일고수들도 혀를 내두를 법한 실력자였으니까.

천무백은 자주 공부를 찾았고, 당대 연성공도 반겼으니까.

한데 저 반응은 대체 뭐란 말인가. 천무백의 영문 모를 얼굴을 보곤 공융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끙. 당시 산동검호가 공부가주를 전부 다 마셔 버린 건 후인에게 안 전했나 보군.”

“…….”

“어디 객잔에서 파는 공부가주가 아니라 진짜배기 공부가주를 그리도 퍼마시니. 공부의 재정이 그때 악화하여서, 회복한 게 근래의 일이니. 오죽하겠소.”

“…….”

천무백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가주(孔府家酒).

공부에서 빚는 술을 이른다. 공부에서 만들어 명성을 크게 얻니, 산동 어딜 가도 흔히 마실 수 있게 되어 그리 귀한 술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 제대로 된 공부가주는 다르다. 공부 안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별한 제조방법이 있으니까.

공자의 제례에 사용하는 술이니, 희소성은 이루어 말하기도 힘들다.

‘……정작 줄 땐 거침없이 내주더니, 막상 그리도 아까웠나.’

새삼 골이 상한 천무백은 절로 퉁명스러워졌다.

“원한다면 선대가 마신 술값만큼은 계산해 드리지요.”

“허. 됐소.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내가 궁금한 건, 그대가 어찌 이곳을 찾아왔는가요. 더구나 하필 천하논전에서, 공부의 비밀을 밝히려고 하면서 말이오.”

공융의 눈이 타올랐다.

어쨌건 제갈설아를 통해 공자가 무림인이었단 사실을 밝히려고 했으니, 공융의 입장에선 썩 탐탁지 않았다. 천무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필요한 게 있습니다.”

“필요한 것?”

“정확한 명칭이며, 어떤 물건인지, 어떻게 생긴 건지, 또 무엇인지 전혀 모르지만. 공부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르는 물건이 공부에 있으니, 그걸 달라는 것이오?”

공융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천무백도 종리홍에게서 성물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접하지 못했다.

그저 공부에 있다는 것만 알았다.

하지만 의심되는 건 있었다.

‘공부의 무공은 천하제일의 절세 무공이라고 보긴 힘들다.’

분명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훌륭한 무공이긴 했다.

공자가 중원을 주유하며 수많은 위협 속에서도 꾸준히 가르침을 전할 수 있던 건, 어떤 위협에서도 이겨 낼 수 있던 무공 덕택이다.

무공의 가치를 논하면 분명 훌륭한 무공이다.

‘당장 눈앞의 공융은 입신지경의 절대고수다.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인 만큼 익히긴 했지만, 실전경험은 극히 적을 터. 단지 내려오는 무공을 익힌 것만으로 입신지경에 접어들었다?’

의아한 일이다. 천무백의 지론 상, 불가능은 아니지만, 극히 어려운 일임은 틀림없다.

십중팔구는 불가능한 일이다.

십중팔구가 불가능이라면, 십 분의 일 정도는 가능하다는 얘기와 같다.

십 분지 일의 가능성은 바로 무공에서 나온다.

‘단순히 익히는 것만으로도 절대적인 경지에 접어들 수 있는 절세의 무공이라면 가능하지.’

가령 지금 천무백이 익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낸 천둔검법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공부의 무공이 과연 그러한가?’

천무백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훌륭한 무공임은 틀림없다만 천둔검법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면 연성공이 절대고수가 된 이유가 있을 터. 천무백의 눈이 꿰뚫어보듯 공융의 전신을 관통했다.

“……공부에 전해져 오는 심법이 필요합니다.”

* * *

“끝내 산동검호의 후인은 공부와 적대하기로 한 것이오?”

공융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냉랭하다 못해,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비록 공부가 학문을 닦는 곳이나, 분명한 무(武)를 이었소. 강호에서 사는 그대가, 타인에게 무공을 내달라는 것이 얼마나 흉악한 짓임을 알고 있을 텐데?”

“압니다. 그러나 필요해요.”

“불가하다면?”

“협박하기 싫습니다.”

“협박이라?”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융의 눈이 번뜩였다. 협박. 어렵지 않다. 어떤 협박인지 공융은 단번에 이해했다. 상대는 공자가 무림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증거도 있을 것이다. 공부의 무공을 아니, 더 확실한 증거를 내세울 수 있으리라.

적당히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당신네 무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비밀을 엄수하는 대신 성물을 받아 가는 것.

하나 천무백은 그런 치졸한 짓까진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의미가 없겠군.’

적어도 두 눈으로 마주한 공융은 공부의 당대 연성공의 자격을 갖춘 이였다.

연성공.

학문뿐 아니라 무도(武道)로서도 충분한 자격을 갖춰야만 앉을 수 있는 자리.

그만한 자격이 있는 자다. 가진 무공의 실력이 입신지경이고, 학문의 경지가 높고, 하물며 가문에 대한 자부심마저 뚜렷이 느껴진다.

천무백은 공융에게 어쭙잖은 협박 따위는 통하지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적어도 천무백이 보기에는 학자였지만.

‘무도인으로서의 눈빛도 갖춘 이다.’

그만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내다. 하나 천무백이 원하는 건, 필연적으로 충돌을 동반할 터.

“심법을 원한다고? 대체 어째서? 그대는 이미 훌륭한 심법을 익히고 있을 터인데. 심법이란 게 좋은 게 있으면 갈아 끼우기 쉬운 게 아님은 그대는 알고 있지 않소?”

“심법을 갈아치우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새로 익히려는 것이지.”

“새로 익힌다?”

공융의 눈동자가 떨렸다.

단전에 내공을 쌓는 것이 곧 심법이다. 한데 갈아치우는 게 아니라 새로 익힌다니. 의미심장했다.

이미 익히고 있는 심법에, 또 하나의 심법을 더한다는 것인가?

하나의 단전에 두 개의 심법을 공동으로 사용한다고?

그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두 개의 심법을 스스로 합쳐서 새로운 심법을 창안할 만큼 대종사의 경지란 말인가?

아니면…….

순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공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 설마.”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중단전에 쓸 생각이지.”

“……!”

공융의 눈꼬리가 씰룩였다.

도저히 놀람을 감추지 못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그의 놀람은 천무백이 중단전을 연다는 것에서 온 게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내공심법은 하단전에 내공을 쌓는 용도다.

단전이라 하면, 하단전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한데 천무백은 정확히 알아봤다.

공융의 심법이 중단전에 머무르고 있음을.

‘대체 어떻게?’

어떻게?

내공심법은 극비다. 공가의 파열권 같은 무공이라 외부로 표출되니, 산동검호의 후인이라면 알 법하다. 그러나 내공심법은 전혀 아니다.

그동안 공부가 무공을 익혔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중단전의 무공.’

중단전에 쌓인 내공이기에, 단지 경지가 더 높다고 한들 그걸 엿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결과 오랜 시간동안 내공을 숨겨 올 수 있었다.

한데 천무백은 중단전의 심법임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 말인즉슨, 자신보다 경지가 훨씬 높으며, 중단전에 쌓인 내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극히 기감이 예민하다는 의미.

공융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하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딱 하나는 확실했다.

“불가. 심법은 내줄 수 없소.”

“그러면 설득해야겠군요.”

“설득이라…….”

공융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대가 양민들을 구하고, 병자를 치료해 줬다는 소문과 명성이 없었다면 난 당장 그대를 내쳤을 것이오. 설득 따위는 받아들일 생각조차 없소.”

천무백이 씩 웃었다.

“애석하게도 난 무인으로 왔고, 연성공께서도 무인으로 내 앞에 있지. 설득이란 곧 대화고, 무인에게 대화란 곧…….”

공융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하지. 내가 이기면 그대는 단념하고 떠나시오. 또 공부의 비밀을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뱉지 마시오.”

“……반대로 내가 이기면?”

“그대가 원하는 걸 내어드리리다.”

천무백이 웃었다.

곧장 밖으로 나온 공융과 천무백은 아무도 오가지 않은 아늑한 정원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융은 천무백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검협이란 별호가 있는데, 어째 허리춤에 검이 없소?”

“검을 들고 어찌 공부에 들어오리까. 검이란 곧 손의 연장선이니 문제없습니다.”

공융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상대는 강하다. 공융은 직감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무인의 강함은 단지 내공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손에 잡힌 무기에서도 나오는 법.

천무백의 주무기가 검인 건 당연했다.

“적수공권이라, 내가 아무리 학자라 해도, 내 몸엔 연성공의 피가 흐르고 있소. 지금의 강호는 애들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인세의 지옥에서 가르침을 전한 공자의 힘이 전해지고 있단 말이오.”

“말했잖습니까. 검은 손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그러니 내 손이 짧은 검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

공융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강호에 나서지 않았으니, 곧 내가 강호 후배겠지. 하니 후배에게 선공은 양보하겠소?”

“물론.”

그 말과 동시에 공융의 주먹이 허공을 꿰뚫었다.

지잉!

대기가 찢어질 듯 요동치며, 마치 유리가 깨어져 나가듯 허공에 커다란 균열이 일었다.

공가(孔家) 파열권(破裂拳).

파열음을 내며 대기가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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