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11화 (211/318)

<검신재생 211화>

211. 비밀이오

공자의 적손이자 당대 가주에겐 나라에서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작위를 내려 줬다.

바로 연성공(衍聖公).

당대 연성공인 공융은 논전이 시작되고 재석건에게 감탄했다.

‘제갈세가를 끌어들이다니.’

완고하고 꼬장꼬장한 학자인 재석건의 선택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 시원하게 한방 제대로 먹었다.

‘좋은 수다.’

분명히 좋은 수다. 무공이니 무림인이니 강호인이니, 그저 무도한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점이 존재한다.

고서에 적힌 묘사를 보고도, 곧 무공과 연관됨을 쉬이 깨닫지 못한다. 애당초 살아온 세계가 다르니 당연했다.

하나 재석건은 논전에 학자가 아닌 무림인을 데리고 오며 맹점을 파고들었다.

‘그것도 제갈세가의 사람이니, 학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보기도 힘들다.’

전대 연성공. 아버지와 제갈선의 논담은 꽤 유명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저 무림인들은 무도하고 칼만 숭상하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학계에서, 무림에도 의견을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특히 여러 고서에 언급된 몇 번의 묘사를 직접 무공으로 보여 주며, 학자들의 눈을 트이게 하는 장면에선 공융은 솔직히 혀를 내둘렀다.

‘많이 준비했구나.’

그래도 공융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그만은 중심은 잡았다.

‘모두 노심초사하지 마라.’

공자의 핏줄을 이은 몇몇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도, 공융만큼은 중심을 꽉 잡았다.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수십, 아니 수백, 아니 천 년이 넘어가는 세월.

오랫동안 숨겨 온 무공이다.

고작 저 선동이나 다름없는 논리에 드러날 리가 없다. 공융은 자신 있었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천하의 공융도 이어지는 장면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

“할, 할아버님!”

“저, 저 여인이 어찌 저걸?”

공부에서도 무공을 익힌 이는 아주 소수다.

방계가 아닌, 오로지 직계, 그것도 적손만 익힐 수 있게끔 전해져 온 독문무공.

지금 제갈설아가 펼쳐 내는 무공을 알아보고 경악하는 건 단 셋이었다.

‘공가…… 파열권.’

공융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부동심(不動心)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제아무리 수십 년 학문을 닦고, 무공을 닦아온 공융도 격동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설아가 펼쳐 내는 건 믿기지 않지만 분명했다.

공가(孔家) 파열권(破裂拳).

공부에만, 오로지 공자의 적손에게만 전해져 오는 독문무공.

현 시점에서 익힌 사람의 숫자는 공융이 정확히 셀 수 있다.

본인과 자신의 장남, 그리고 장손.

정확히 셋이다.

‘어떻게? 어떻게 제갈가가 공가의 파열권을?’

천하에 고작 세 명만이 알고 있는 무공이다.

한데 어떻게 시연하고 있단 말인가.

‘고서에 파열권이 사용되면서 적힌 묘사가 있던가?’

지금 제갈설아는 수많은 고서에 적힌 묘사를 무공으로 시연하고 있다.

그러면 파열권은?

‘없다! 파열권은 절대로 없다!’

공융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타 보여준 장면은 무공이라기보단 기술에 가깝다. 내공만 있다면 활용할 수 있는 수법들에 가까우니 제갈설아가 고서에 적힌 표현만 보고 따라 하는 건 쉽진 않지만 이해가능의 영역이다.

파열권은 명백히 다르다.

엄연히 초식이 있고, 묘리가 담겨 있으며, 체계가 완벽하게 잡힌 절세의 무공이다.

그건 따라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니다. 하물며 따라할 묘사도 없다. 수많은 책을 섭렵한 공융에게도, 파열권을 묘사한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직접 보는 것으로도 할 수 것도 아닌데, 눈앞에서 펼쳐지는 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물론 완전하지 않다. 많은 게 생략되고 오히려 일부는 좀 더 옛날 것과 유사했다.

‘어찌…….’

지이잉!

‘……!’

그때 머릿속을 찌를 듯한 강렬한 기세에 공융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실수였다.

사실 이전부터 그의 직감을 계속해서 건드리는 무언가를 진작 느꼈다.

하나 공융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기……!’

내기였으니까. 자신이 내기에 반응하는 걸 보여 준다는 건, 곧 자신이 내공을 갖췄음을 입증하는 바니까.

하나 지금 이 순간까지 무시할 수 없었다.

제갈설아가 보여 준 파열권.

그리고 머릿속을 찌르는 강렬한 기운.

수많은 학자의 시선 사이로, 자신을 노려다보는 듯한 투명한 시선에 공융은 침음을 삼켰다.

그가 웃고 있었다.

‘공가(孔家) 파열권(破裂拳).’

‘……!’

‘끝까지 전부 보여 드리리까?’

머릿속을 파고드는 전음에 공융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간 억겁의 세월 동안 숨겨 온 공부의 비밀.

‘알고 있다. 그것도 완벽하게.’

공융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 * *

천무백은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논전은 늦은 밤이 되고서야 마무리됐다. 본래 모든 학자가 모이는 논전이 열리면, 연성공이 직접 논전에 참여한다. 보름마다 행해지는 이유다

그러나 공융은 이번만큼은 예외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논전은 흐지부지 마무리가 됐으며 보름 후를 다시 기약했다.

몇몇 학자는 재석건 측의 논리에 밀린 것이 아니냐는 말은 했지만. 사실 완벽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거야 상관없는 일이고.”

“상관없어요? 제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천무백의 중얼거림을 들은 제갈설아가 울상을 지었다.

“아니, 덕택에 많은 도움이 되었소.”

정말이었다.

제갈설아가 논전에서 열심히 해 주는 바람에, 공융이 끝내는 반응하고 말았으니까.

지금 천무백에게 온 연락도 그것이다.

“먼저 저쪽에서 급한 기색으로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까 말이오.”

“정말, 무림인이 맞군요.”

“자신들만의 독문무공을 보여 줬으니, 그럴 수밖에.”

그 말에 제갈설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은 노골적이기까지 해서 천무백마저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 정도였다.

천무백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시오?”

“사실 제가 무공을 제대로 사용한 것이라기보단, 그냥 흉내만 낸 거잖아요?”

그랬다.

제갈설아가 후기지수 중에서도 충분한 재능을 지녔다 해도, 하루아침에 무공 하나를 뚝딱 익힐 수는 없는 법이다.

논전에서 보여 준 파열권은 지극히 흉내만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흉내만 내서는 눈치챌 것이다. 상대는 다른 이도 아닌 공부의 가주가 아닌가.

흉내만 내선 속여 넘길 수는 없다.

그러니 즉.

“제게 알려 준 부분이 핵심이란 말이죠. 핵심만 흉내 내서, 그럴듯하게 보이는 거잖아요?”

“그야, 그렇소.”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겨요. 어떻게 천 공자님은 공부의 독문무공을 알고 있냐는 것이죠!”

“…….”

“무공에서 핵심을 안다는 건, 곧 그 무공 자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묘리를 파악했다는 뜻이니까요.”

천무백이 말이 없자 제갈설아는 짐짓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천무백도 답하기 골치 아픈 문제였다.

수많은 전생을 거쳐, 그러니까 공자가 살아 있던 시절에 견식했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

또 산동검호 위천악으로 살면서, 그 무공과 부딪치며 샅샅이 파헤치고 분석했다는 말을 또 어찌할까.

‘뭐,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숱한 전생을 살아오다 보면, 이렇게 답하기 곤란할 때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럴 때마다 천무백은 능수능란하게 그 상황을 벗어났다.

방법은 간단했다.

“비밀이오.”

뻔뻔해지기로.

“…….”

제갈설아는 황당한 얼굴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비밀이라고 말하니, 뭐라 더 말할 게 없지 않은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비밀이라니.”

“미안하오, 소저. 무림인은 늘 실력의 삼 할을 숨기는 법이니, 개인적인 비밀이 하나둘쯤은 있으니 말이오.”

“…….”

짐짓 제갈설아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실제로 섭섭했다. 굳이 자신에게도 숨길 비밀이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걸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하나 이어진 천무백의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제갈설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비밀을 말하게 된다면, 소저에게 가장 먼저 말할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오.”

그게 어떤 의미로 전해졌을까.

제갈설아는 언젠가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부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천무백도 곧 그 점을 생각하고 있다고.

제갈설아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다.

“……섭섭했던 적 없어요.”

천무백이 빙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소.”

“……음, 몸조심하세요.”

천무백이 공융과 대면하기 위해 나가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무슨 출근하는 지아비 배웅하는 마누라도 아니고…….”

* * *

익숙한 길이다.

그리고 익숙한 장원이고, 낯설지 않은 전각이다.

‘몇 번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이백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천무백의 눈이 날카롭게 주위를 파고들었다.

논전에 참여하면서 공부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연성공이 머무르는 전각에 오는 건 이번 삶에선 처음이었다.

천무백이 무인으로 살면서 갖춰야 할 자세라고 여기는 게 몇 가지 있다.

삶을 거치면서도 단 한 번도 잃지 않은 자세.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고, 오연하게 높이 서서 강호를 내려다볼 때도 변하지 않는 명제.

‘주위 환경을 모조리 파악한다.’

천무백의 눈이 날카롭게 주위를 훑었다.

돌로 이뤄진 길이며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 그리고 전각 사이의 간격까지.

어쩌면 의미 없어 보이는 요소까지 전부 다.

‘만일 몸을 피한다면 저쪽이 유리하겠어. 그리고 기습을 한다면 이쪽 방향에서 하는 게 낫겠군. 바람이 전각 사이로 몰아치니, 저기에서의 싸움은 웬만해선 피해야겠지. 전각의 지붕을 밟으면 여차하면 무너질 부분이 보이니 저길 함정으로 이용하면…….’

천무백의 인생은 매번 칼과 피로 점철된 삶이었고, 역경과 아수라 속에서 천무백은 살아남으면서도 이기는 방법을 수없이 연구하고 몸으로 체득했다.

압도적인 무공? 절대적인 내공? 그것만으로 승리를 장담하고 생존을 희망하기엔 강호란 곳은 냉혹하며 잔혹하다.

때론 약자가 강자를 도모하고, 악인이 선인을 짓밟는 곳이 바로 강호다.

그런 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강호란 곧 삶이었고 터전이었으며 도전하고 이겨 내야 할 거대한 벽이었다. 그렇게 살았기에 천무백은 철저했다. 천무백의 두뇌는 매번 복잡한 계산을 수도 없이 해 왔으며, 모든 환경을 자신에게 이롭게 꾸몄다.

병법이다.

‘내게 유리한 환경과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싸운다.’

천무백은 지금 이곳에서 가능성을 봤다.

‘싸울지도 모르지.’

공융과의 만남이 원활하게 이뤄질지는 모른다.

성물은 말 그대로 성물이다.

공부에서 보관중이라면, 분명 연유가 있으리라.

그저 창고에 처박아 놓고 잊어버린 물건이라면, 전해받기 어렵지 않겠다만.

만일 그들 역시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라면?

‘가져가기 어렵지.’

하니 천무백으로선 만약의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싸워서 가져가야만 할지도 모른다.’

만일 상대가 그저 학자이기만 했다면, 천하의 천무백도 그런 방법은 택하지 못하리라.

아무리 천무백이어도, 무림과는 관련이 없는 이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으니까.

하나 상대는 문무겸비의 천재이자, 공자의 무공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대대로 익혀 온 이.

천무백은 직감했다.

제갈설아조차 감히 엿볼 수 없던 공융의 경지.

‘입신지경이라……. 무림이 이 사실을 알면, 천하십대고수의 자리 하나가 뒤바뀌겠어.’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공융의 서재에 들어섰다.

들어선 순간, 숙였던 고개가 들어올려지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한 시선이 쏘아졌다.

“그대는…….”

공융의 입이 나지막하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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