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10화>
210. 장하다, 제갈설아
사실 천하논전이 엄청 대단하다고 체감된 건 아니다.
공부의 외원(外苑)이나 전각. 심지어 거리에서까지 학자들이 모여 얘기하고 토론하는 광경은 놀랍긴 했다.
하나 이미 정의맹에 몰려든 무인들의 뜨거운 열기를 체감했던 제갈설아에게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 않았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말이다.
“…….”
제갈설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음…… 어.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전부 학자들이란 말이죠?”
대체 공부 안, 어디에 있었을까.
모든 학자가 모여 있는 광경은 보기 드문, 일대 장관임이 틀림없었다.
수효는 대략이나마 이천 명.
하나같이 얼굴에 완고함이 깃든 학자들의 모습에 제갈설아는 일순 머리가 아찔해졌다.
저들 사이에서 발언하고,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면서도 반응을 끌어내야 하니.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감의 무게가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턱.
그때였다.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천무백의 손길에 제갈설아는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바람처럼 스치듯이 파고드는 내기.
“……후우. 고마워요.”
"준비한대로만 하시면 문제 없을 거요."
천무백의 가벼운 미소는 묘하게 믿음직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제갈설아는 비교적 편안한 얼굴로 논전이 열리는 광경을 지켜봤다.
논전은 거의 일방적이었다.
공부 측의 학자, 아니, 거의 대다수라고 표현할 만한 절대다수의 학자들이 재아의 서책 내용을 극렬히 부정했으며, 오히려 재아의 학문에 공격을 가하면서 논점을 돌렸다.
와중에 공부의 가주는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다른 학자들의 논리에 재석건 측의 논리는 힘을 잃고 있으니까.
‘공부의 가주…….’
사실 제갈설아는 많이 고민했다.
천무백에게 많은 비화(祕話)를 들었고, 발언의 방식에 조언도 받았지만.
과연 가능한가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나 이곳에 와서 공부의 가주를 목격한 순간.
제갈설아의 머릿속 고민은 사라졌다.
‘무림인.’
확실하다. 희미한 내기의 흐름이 눈에 보였다. 공부의 직계 후인들은 크기가 다를 뿐 명백한 내공이 단전에 쌓여있었다.
다만 가주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부의 가주가 나보다 더 높은 경지라는 거겠지.’
설마 했던 것이 눈앞에 진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천 공자께서 말한 대로만 해도 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석건 측은 계속해서 서책에 적힌 내용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나섰지만, 공부 측은 절대적으로 부정했다.
‘재석건은 공자가 무림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기시키지만, 공부 측은 그 가능성마저 격렬하게 부정하고 있어.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서.’
이러한 흐름을 지켜보던 제갈설아에게 발언 차례가 돌아왔다.
‘후웁, 후.’
한차례 심호흡을 한 제갈설아는 벌떡 일어났다.
제갈설아가 일어나며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이천 명의 학자 중에 유일한 여학자였으니까.
상대는 이쪽의 명확한 증거와 논리를 내놓으라며 맹렬하게 공격한다.
그렇다면.
제갈서아가 눈을 번뜩였다.
“공자가 무림인이 아니라는 증거와 논리를 제시들 해 보시죠.”
선동과 날조의 시작이었다.
* * *
천무백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장하다.’
논전이 시작될 때는 끙끙 앓더니, 막상 발언 차례가 돌아오자 제갈설아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거침없이 논리를 펼쳐 냈다.
그녀의 논리는 간단했다.
왜 재석건 측이 공자가 무림인이라는 증거와 논리를 준비해야 하는가.
오히려 공자가 무림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당신들이 내놓아야하는 게 맞지 않은가.
애당초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점 자체를 뒤바꾸는 논리였다.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학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 발언권은 제갈설아에게 있었고, 제갈설아는 아무런 방해 없이 제 생각을 마음껏 풀어 놓았다.
물론 아예 방해가 없던 건 아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림의 제갈세가가 학문으로도 명성이 높은 건 이해하나, 과연 천하논전의 한자리에서 유가의 종주와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별안간 터져 나오는 큰 목소리.
발언권을 얻지 못한 사람은 끼어들 수 없는 걸 생각하면, 명백한 규칙위반이었다.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기세 좋게 이야기를 펼쳐 내던 제갈설아의 말문도 순간 턱 막혔으니까.
천무백이 미간을 좁혔다.
50대의 장년인으로 보이는 학자.
공부의 인사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더 공부의 직계후손처럼 강렬하게 재석건 측을 비판하던 학자였다.
‘논리를 반박하기 힘들면, 그 논리를 펼치는 사람을 공격하라더니.’
전형적인 수법.
그러나 꽤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제갈설아 소저는 본인이 인정한 학자입니다. 충분한 학식을 갖췄고, 이 자리에서 학문을 논할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소!”
재석건이 직접 일어나소리쳤다.
저 학자의 공격은, 제갈설아를 이 자리에 세운 재석건을 공격하는 말이었으니까.
하나 상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인정하겠소! 하지만 난 재석건 공의 저의가 의심됩니다!”
“저의라니! 내가 다른 생각이 있단 말이오?”
“무림의 제갈가는 학문에만 매진하는 가문이 아니지요! 어쨌거나 그들의 근거지는 무림에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논전에서 거짓되고 그릇된 논리를 펼쳐도, 무림으로 돌아갈 사람이니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재석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것참. 쉽지가 않네.’
제갈설아가 준비한 바가 선동과 날조였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논리를 파훼할 수 없으면, 논리를 펼치는 주체를 공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전형적만큼 가장 효과적인 법
학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무림에 대한 비토감이 강렬했으니까.
“나는 저 여인의 논리와 발언을 애당초 들을 가치도 없다고 여기며, 과연 이 자리에서 발언할 자격 자체가 있는지 의심되구려!”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애당초 무슨 말을 할지를 막아 버리면, 이건 천무백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끙. 공부는 철저하게 침묵하고, 감추고 있군.’
천무백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공부의 가주, 그의 단전에 꿈틀거리는 거대한 내공이.
문제는 평생을 대대로 숨겨 온 만큼, 웬만한 일에도 꿈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숨기는 데 타고났다. 천무백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했다.
천무백이 아까부터 은근히 내기를 흘려보내 자극하고 있는데도, 이쪽을 쳐다도 안 보니 오죽하겠는가.
제갈설아의 선동으로 논전에서 그의 심리를 흔들고, 그 사이 천무백이 파고들 생각을 했던 만큼.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조금 강하게 나가야하나.'
방법은 몇 가지 더 있다. 당장 천무백이 아는 게 많았으니까. 하나 성물을 강탈하기보단 평화적으로 얻어 내길 원하는 천무배로선 공부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을 일으키기 꺼렸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계획은 물거품이 될 터. 천무백은 목을 가다듬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누가 학문을 논하는 것에 자격이 있고 없고를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 흡사 무림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목소리였다.
학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쏠렸다.
그곳에는 작은 키의 노학자가 강렬한 안광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갈설아에게 반박하던 꼬장꼬장한 장년의 학자를 노려보면서.
노학자의 얼굴을 본 순간,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학문을 논하는 자리라기에, 내 직접 광서성에서 올라왔는데, 내 눈에 보이는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정녕 공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맞소이까?”
“유, 유공(公)!”
“어디 유가의 학문을 파고들어야만 학문을 논할 자격이 생기더이까? 누구의 제자가 되거나, 서원에서 공부해야만 학문을 논할 자격이 생긴답니까? 도대체 누가 그 자격을 정한답니까? 공자가 정해 두셨답니까?”
“그, 그야…….”
“참으로 한심하외다! 누구나 학문을 논할 수 있다고 역설한 자가 곧 공자요! 어찌 공자의 뜻을 섬긴다는 자네가 그딴 소리를 내뱉으며, 천하논전이란 이름을 무색케 하는가!”
단숨에 상황을 제압하는 말이었다.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제갈설아도 당황해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노학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란 눈을 떴다.
“난 제갈가의 학문과 무림인이 그저 무도한 무뢰배만임이 아님을 두 눈으로 보고 믿소. 그러니 계속 발언해 주시오.”
딱딱한 어조였지만, 곁에서 드러나는 건 명백한 호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천무백이 산동으로 오는 뱃길에서 해적들로부터 구해 준 학자였으니까.
그것도 대단한 명성을 지닌 학자였는지, 말 한마디에 모든 학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천무백은 슬쩍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니까.’
암. 그렇고말고.
* * *
한번 멈칫했지만, 제갈설아는 거침없이 논리를 펼쳐 댔다.
특히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더 강조했다.
비단 재아의 서책뿐 아니라, 수많은 고서에 남긴 묘사를 직접 보여 준 것이다.
여섯 개의 비도가 춤을 추듯 떠다녔다.
순간 기시감을 느낀 학자들은 급히 내용을 찾아봤다.
재아의 서책을 따로 옮겨 적은 종이.
‘여섯 개의 꽃잎이 허공에서 춤을 추니, 강도로 돌변한 무도한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보시다시피 서책 속에 남긴 공자의 묘사는 모두 이와 같은 무공과 똑같습니다.”
“허어…….”
학자들로선 사실 상상하기도 힘든 묘사가 고서들엔 분명히 있었다.
학자들도 낯선 서책들의 내용을 언급하며 제갈설아가 직접 보여 주니 점점 말에 힘이 실렸다.
계속해서 펼쳐지는 논리에, 공부 측은 처음 제갈설아가 말했던 것처럼 오히려 공자가 무림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세워야 할 지경이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학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경향이 보였다.
천무백이 준비하고 다듬은 내용인 만큼, 또 제갈설아가 직접 무공으로 표현해 주며 확실한 증거를 눈앞에서 보여 주니 흔들리는 사람이 생겼다.
모든 학자가 그저 공자는 무림인이 아니라는 사실에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많은 학자는 여전히 깨어 있으며,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어 가자 공부의 학자들 얼굴에서 흔들리는 기색이 보였다.
천무백은 공부의 가주를 쳐다봤다.
여전히 침묵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까?’
제갈설아가 말하는 모든 내용은 진실이다. 정말 고서에 언급된 내용이거나, 묘사된 부분이었다. 진실을 얘기하면 선동은 되더라도, 날조는 아닌 법.
‘선동은 어느 정도 됐다.’
긴가민가했던 재석건 측뿐 아니라 중립적인 학자들까지.
제갈설아의 논리에 휩쓸렸다.
그렇다면.
‘이젠 날조지.’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던 공부의 기류가 요동쳤다.
그럴 수밖에.
‘아무도 모르는 내용들이니까.’
지금 제갈설아가 보여 주는 건 단순한 무공이 아니다. 어느 고서에도 기술되지 않은 내용.
제갈설아가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자 대류가 찢기듯이 요동치며 화광이 번뜩였다.
꽈앙!
“오!”
“이것도 서책에 언급된 내용입니까?”
제갈설아는 대답 대신 계속해서 무공을 시연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어느 정도 선동에 휩쓸린 학자들은, 제갈설아가 보여 주는 것 역시 분명 어느 서책에는 기술되어 있다고 생각할 거니까.
그러나 아니다. 어느 것에도 기술되지 않은, 오로지 천무백만이 알고 있던 것들.
그리고 공부의 직계만 알고 있는 무공.
천무백은 끊임없이 내기를 흘려보내 공부의 가주를 자극했다.
제갈설아가 고서에도 적히지 않는 무공을 펼치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천무백의 전음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공가(孔家) 파열권(破裂拳).’
‘……!’
찢어질 듯이 부릅떠지는 가주의 눈동자.
천무백이 웃었다.
‘끝까지 전부 보여 드리리까?’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