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09화>
209. 그때 그 시절
“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라…….”
제갈설아는 천무백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당당한 선동과 날조.
“그게 대체 뭔데…….”
제갈설아가 울상을 지으며 탁자에 이마를 콩 박았다.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서로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다른 이가 그리 말했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타박을 했겠지만.
“천 공자님이 괜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
이마를 들어올린 제갈설아의 얼굴은 퍽 진지했다. 물론 이마에 남은 빨간 흔적을 보면, 조금 웃기긴 했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생각에 잠겼을까.
별안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쉬고 계시오?”
천무백이었다. 제갈설아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색을 살폈다.
‘다행이야. 잠옷은 아니야.’
다행히 아직 낮이었고, 저번처럼 잠옷 차림도 아니었다. 조금 편한 복장이긴 했지만, 잠옷 바람으로 대화한 저번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제갈설아는 부랴부랴 정리하고, 단정하곤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은 뒤 말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이세요?”
“내일 논전에 관해 얘기할 게 좀 있어서 그렇소.”
순간 제갈설아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건 본인이 느끼기에도 굉장히 이상한 감정변화였다.
‘아쉬워? 뭐가? 뭐가 아쉬워?’
당연히 방에 직접 찾아올 일이, 앞으로 해야 할 일 얘기 말고 또 있나.
대체 자신이 속으론 무슨 기대를 했는지, 아쉬움을 느끼는 건지 제갈설아는 애써 당황함을 억눌렀다.
“네, 들어오세요.”
“쉬고 계시는 데 미안하오.”
“아니에요, 이것저것 고민 좀 하고 있었거든요.”
그 말에 천무백이 흘깃 시선을 내렸다.
탁자와 그 위에 놓여 있는 몇 가지 책. 그리고 붓과 종이들.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할지, 아무래도 얘기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저도 마침 고민 중이었어요. 그…… 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하고요.”
“말 그대로요.”
천무백이 씩 웃었다.
“말 그대로라고요?”
“재석건 측의 목소리는 작소, 숫자도 적고.”
“맞아요. 그렇긴 하죠.”
“반면 공부 측의 목소리는 크고, 세력도 많소. 아니, 대다수가 공부의 의견을 지지하지. 결국엔 재석건 측의 내용은 일축되고 논리는 무너질 것이오. 그사이 공부의 가주는 침묵할 거고.”
추측이지만 제갈설아는 깊게 공감했다. 천무백의 말대로 될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렇다고 금방 끝날 건 아니고, 시간이 꽤 걸릴 거요. 학자들의 논담이란 게 일찍 깔끔하게 끝나는 게 아니니까.”
“시간이 걸릴수록 천 공자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도 더 시간이 걸릴 테고요.”
“맞소. 결국, 선택지는 두 가지요. 천하논전을 일찍 끝내서 가주가 약속한 대로 나와 만나거나, 아니면 논전에서 진실을 바탕으로 가주를 압박해 자리를 마련하는 거지.”
“가주를 압박한다고요?”
“공부의 가주가 천하논전을 연 이유가 뭐겠소.”
“그야 논란이 되는 내용이니…….”
그렇게 말하던 제갈설아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뭔가 이상했다.
‘그냥 일축하면 끝이잖아?’
물론 학자인 만큼 그냥 일축한다는 건, 학자가 지녀야 할 자세가 아니다.
공부의 가주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천하논전이란 거창한 걸 개최할 필요가 있는가?
사실 강호 역사상 천하논전이란 게 있기나 했는가.
“설마 천하논전을 열어서, 명분을 얻는다는 건가요?”
천무백이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서 제갈설아는 어쩐지 무언가 칭찬받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괜히 어깨가 들썩였으니까.
“어차피 한번 불거진 내용이니, 공자가 무림인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계속해서 퍼져갈 거요.”
확신 어린 목소리였다. 제갈설아는 한 가지 깨달았다.
“공자가 무림인이라고 확신하시네요.”
“그렇소. 정확히 무림인이란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지. 그때는 무림과 민(民)과 관(官)이 따로 구분됐던 시대가 아니니까.”
“음. 그렇다면, 공부의 가주는 천하논전을 열어 공의(公議)를 얻겠다는 뜻이군요.”
제갈설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천하논전에선 결국 공부 측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재석건 측도 함부로 강하게 주장 못 하는 이유가 있네요. 공자가 무림인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만일 그리 공격한다면…….”
“그렇지. 재석건도 계파와 학풍이 다를 뿐,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의 학문을 이었으니까.”
“어렵네요.”
“이대로 논전이 지루하게 쭉 이어지면, 결국 공의는 공자와 무림은 관련이 없음으로 결정 날 확률이 높소.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그저 가주와 대면만 하면 되니까.”
사실 아닌 밤중에 몰래 담벼락을 넘는 것도 생각했다.
허나 일단 천무백은 객(客)인 법이고, 성물이 공부 어딘가에 있는지 모르니, 정당하게 인수 하여야 깔끔하고 확실하다.
그런데 담벼락을 넘은 무림인에게 공부의 가주가 순순히 넘겨주겠는가.
자리를 마련해서 일대일로 대면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이대로라면 천 공자님이 공부의 가주를 통해 목적을 이루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요.”
“그러니 저쪽이 날 먼저 만나게끔 압박해야지.”
“그게 선동과 날조고요?”
어쩐지 탐탁지 않은 기색에 천무백이 웃으며 말했다.
“거짓을 주장하진 않을 거요.”
“네?”
“그때 그 시절은 피와 야만의 시대였소. 도심을 벗어나면 약탈과 살육, 강도가 빈번했지. 잠깐 머무르는 마을도, 사람들이 곧장 돌변하여 칼을 들고 습격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게 부끄러운 시절도 아니었소.”
“……워낙 옛날이니.”
“그런 야만의 시대에 공자는 중원을 주유했지. 그리고 가르침을 전했소. 인과 예는 모르는 무도하고 흉악한 사람들을 상대로. 불쌍한 양민들? 그런 양민들이 여행자들을 습격해 모든걸 뺏고 심지어 인육까지 취하는 세상이었소. 어찌 말로만 가능할 것 같소? 강도와 범행으로부터 몸을 지키면서 그 험한 중원을 주유할 수 있던 이유가 있겠지.”
“……어. 그러네요.”
“공자는 9척 장신이었고, 그의 아버지도 무장이셨지.”
“……!”
“무림과 당시 군문은 딱 나누어져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장군이라 하면 곧 무인이고, 무림인이었소.”
“그러면 공자도 무공을…….”
“배웠겠지. 공자의 제자 중 자로(子路)를 아시오?”
“네. 유명한 건달이었다가 공자에게 감복 받아 가르침을 받고…….”
“그때의 건달이라면 지금의 흑도나 다름없지. 중원 전체에 악명이 자자한 건달이라면, 굳이 지금으로 따지면 태룡방의 독고패와 유사한 사람이요.”
“……!”
“독고패 같은 사람이 무슨 말 한마디로 감복 받아 학자가 될 사람처럼 보이오?”
“아니, 아니요.”
“그렇소. 공자는 힘으로 자로를 제압했소.”
“어…….”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
“그리고 교화시켰지.”
“……교화.”
제갈설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자신이 생각하는 교화와는 다른 의미였으니까.
“수많은 제자를 이끌고 그 험한 중원을 주유했소. 어째 그 모습이 조금 상상되지 않소?”
9척 장신의 공자와 그에 못지않은 험악한 자로. 그 외에 수많은 제자를 이끌고 다니는 모습.
“어쩐지 천 공자님 말씀 들으면, 강한 무림인을 동경하고 추종하는 무인들이 뒤따르는 장면이 떠올려지는데요.”
“좋은 직관력이시오.”
이건 분명히 추측이다. 하지만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말에서 묘한 신뢰가 느껴졌다. 마치 그 시대를 직접 보고 왔던 사람처럼 생생함이 역동했다.
“그래도 유학자인 공자가 무림인이라니…….”
“다시 말하지만, 그땐 굳이 무림인이란 구별이 없었으니, 굳이 따지면 무림인이 아니오. 학자지. 다만 무예에도 뛰어난 학자. 문무겸전을 타고난 학자. 소저처럼 말이오.”
제갈설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당시 9척 장신이라면, 흔히 말하는 타고난 무골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9척 장신이 어디 흔한가.
“생각해보면 이상할 게 없소. 불가의 무림인 소림이 있고. 도가의 무림인 무당도 있소. 유가의 무림이라고 없을 이유가 뭐겠소?”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갈설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주관적인 생각과 추측이 아니다.
천무백은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고서의 내용을 하나씩 되짚으며, 사실성을 입증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그럴듯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야 제갈설아는 천무백이 말하는 정정당당한 선동과 날조가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당당하게 진실을 바탕으로, 조금 더 부풀자는 거지요. 그러니 당당한 선동과 날조가 아니겠소. 거짓으로 날조하는 게 아니니.”
“…….”
뭔가 궤변인데…….
더욱 그럴듯해서 제갈설아는 차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 선동하고 날조하는 거라면 모를까.
진실을 바탕으로 그걸 좀 더 강하게 주장하고, 논리를 펼치는 것이라면.
나름 당당한 선동과 날조가 아닌가.
‘……나 무슨 생각 하고 있지.’
뭔가 자신의 사고관이 바뀌어버린 기분에 제갈설아는 샐쭉하게 천무백을 쳐다봤다.
“더구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학식 깊은 무림인이니 그럴듯하게 느껴질 거고. 분명히 존재하는 고서들을 바탕으로 부풀어서 강력하게 주장하면, 의견에 힘이 쏠리겠지.”
“아…….”
“오로지 진실만 입각해 상대의 논리를 하나씩 파훼하는 건 우리의 특기가 아니오. 그건 저쪽을 이길 수 없지.”
이제 어떤 뜻인지 완벽하게 파악했다. 지금 천무백이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적당한 양념을 더 해 주위를 선동하자는 것.
‘그럴듯한데?’ 같은 반응만 끌어내도 충분하리라.
“그러니 소저께서 내일 발언을 해 주시오.”
“제가요?”
제갈설아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많은 학자 앞에서 날조하고 선동하라고?
순간 제갈설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한다고 한들, 세상에서 제일가는 지식인들 앞에서 발언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하나 천무백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쩐지 그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제갈설아는 황망한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소저께선 똑똑하시니까.”
“똑똑한 거면 공자님이 더 똑똑하신 것 같은데.”
“흠, 그럼 정정하겠소. 소저가 아름다우니까 이 일을 맡아 줘야겠소.”
“……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제갈설아는 천무백을 빤히 바라봤다.
하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게 무슨…….”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기운에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천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에서 여류학사를 보신 적 있소?”
“……아뇨.”
천무백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무림과 달리 이 완고한 유림(儒林)에서 여학자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러니 그대가 당당하게 발언하면, 모든 이목이 쏠릴 거요.”
“아……. 하면 공자님은 그사이 공부의 반응을 살펴보겠다는 건가요?”
“정확히 말해서는 소저께서 선동과 날조를 열심히 할수록, 침묵하던 공부의 가주도 꿈틀거릴 거요. 그때 한번 내공을 흘려보내면서 압박할 생각이오.”
“그렇군요. 진실을 알고 있으니, 그걸 빌미로 만남을 유도하게끔 하신다는 거죠?”
천무백이 살짝 감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진실을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을 압박할 것이다. 무림인이라는 걸 내공으로 압박하며 은근히 밝히면서 자신은 공부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학자라는 점도 강조할 거고.
그러면 공부의 가주는 부랴부랴 천무백과 만남을 주선할 게 분명하다. 입막음할지, 뭐라도 하기 위해서.
이제야 이해가 된 제갈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오물거리다 겨우 열었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말은…….”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언은 아니오. 아무리 학문만 파고든 완고한 학자들도, 아름다운 미녀가 조리 있게 말하면 아닌 척하면서도 쳐다보고 귀를 기울이거든. 내가 살아온 삶의 지혜요.”
“……치, 얼마나 많이 살았다고.”
저보다 어리면서.
하나 제갈설아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어쨌거나.
‘이쁘다고 말해 준 거잖아?’
얼굴이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