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08화 (208/318)

<검신재생 208화>

208. 정정당당하게

유가(儒家)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일까.

많은 가르침이 다 중요하지 않겠냐마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가치가 있다.

바로 효(孝)다.

이번 논전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서책의 진위는 확실하오.”

“역시……!”

재석건의 발언에 학자들이 유자답지 않게 주먹을 꽉 쥐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만일 체면을 생각하는 유자들이 아니었다면, 서로 얼싸안고 소리라도 질렀으리라.

“이로써 이 서책이 제공(齊公:재아의 작위)이 저술한 서책임이 입증됐소.”

“하면 우리의 주장에 힘이 실리겠군요.”

한 학자의 희망 어린 말에 재석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공부에서는 책의 진위를 입증했을 것이오. 우리가 한 것인데, 공부가 못할까.”

그 말에 학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맞는 말이다. 공부의 인력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식의 학자들이라면 이미 진위는 파악했을 터.

그런데도 이런 논전이 벌어지는 이유는 책의 진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내용이 문제지요. 상기된 내용을 보고 공자가 무도한 무림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여지가 분명 있소.”

사실 재석건은 과대해석이라고 여겼다.

시대가 어떤 시대였던가.

피와 야만의 시대였다. 인과 예는 없으며, 오로지 본능과 욕심만이 존재하던 시대가 아니던가.

그런 시대에서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평범하게 강론으로 교화하고, 가르침을 줄 수 있겠는가.

“그 시대에 중원을 주유하는 수많은 제자백가의 허리춤에 칼이 있던 건 당연한 시대였소. 시대의 선각자들, 시대의 학자들, 시대의 거인들도 모두.”

분명 자위(自衛)의 수단이다. 아마 무공을 연상케 하는 표현도, 몸을 지키는 호신술 정도이리라.

다만 몇몇 부분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해석이 묘한 부분도 있었다.

유가에서 멀리하고 혐오하는 무림인처럼 바위를 가르고 단숨에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재아의 학풍을 이은 학자들과 후인들도 그 내용이 탐탁지 않은 건 당연하다.

재아의 학풍을 이었다고 한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공자로부터 시작된 학문이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용을 부정하려면, 결국 재아가 썼다는 일기를 부정해야 하며, 곧 책을 저술한 재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안 그래도 재아는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미움받은 이로 유명했다.

공자로부터 도덕을 모르고 인을 모른다고 매도당한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은가.

공부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학풍의 학자들은 재아와 공자 사이의 관계를 되짚으며, 이 서책이 진본이라고 한들, 내용만큼은 믿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것이 이번 논전이 벌어지게 된 화두였다.

“그러니까 저들은, 제공이 공자를 모함하기 위해 거짓 내용을 적었다는 것이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스승과 아비는 곧 같을진데, 사실상 제공을 아비를 모욕한 패륜으로 몰고 있는 거 아니겠소!”

재아의 학풍을 계승한 계파와 재아의 직계후손들은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단순한 사실 입증이 아니다.

그들의 학파와 조상에 대한 명예가 걸린 문제였으니까.

효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유가에서는 이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비단 제공의 서책뿐 아니라, 당시 상황을 비슷하게 묘사하거나 기술한 내용이 또 다른 서책에 남아 있을 게 틀림없소.”

재아의 학풍을 이은 수좌이자, 재아의 직계후손인 재석건의 발언에 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재석건은 느껴지는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학자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렵겠지.’

재아처럼 노골적으로 묘사한 사료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곡부능가?”

“예. 곡부능가에서 영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재석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곡부능가라면…… 한림학사를 7대를 이은 가문이 아닌가? 지금 가주께선, 음. 능조 공(公)이 날?”

“정확히는 능조 공(公)의 자제분이 뵙기를 청했습니다.”

“흐음.”

재석건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곡부능가라면, 공부 측의 인사다. 이번 논전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알겠네. 지금 만나보지.”

아무래도 만나봐야 목적을 알 터. 재석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하는 시종이 오가자, 이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응?’

재석건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들어온 사람의 면면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누가 우두머리야?’

젊은 남녀 셋과 얼굴에 상처가 그득한 장년인.

‘셋은 학자처럼 보이는데…….’

재석건은 누구와 대화를 나눠야 할지 고민하는 가운데, 그중 젊은 청년이 입을 열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에서 선한 인상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재석건 공(公)되십니까?”

“그렇소. 내가 재석건이오.”

“여기 두 분은 곡부능가의 자제분이시고, 여기 소저와 저는 능가에서 짧게 가르침을 받은 적 있는 천무백이라고 합니다.”

“능가의 자제와 가르침이라…… 그래, 어쩐 일이시오?”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도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도움말이오?”

천하논전이 벌어지는 공부의 전각.

여기서 도움이라는 건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하나일 터.

재석건이 묘한 눈빛으로 쏘아봤지만, 천무백은 흔들림이 없었다.

‘제법…… 담대한 사내군.’

재석건은 나직이 감탄했다. 어떤 유자라도, 자신의 앞에 서면 부동심을 갖추기 어렵다. 재석건은 천하 학문에서도 가장 큰 계파 중 하나를 이끄는 거유(巨儒)였으니까. 어린 유생이야 흠칫 굳어버리기 일쑤였다.

“무슨 도움을 말하는 것이오?”

“논전에서 공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논전에서? 그대는 곡부능가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 않소? 공자의 후손이란 점만 틀릴 뿐이지, 그대들은 공자의 직계나 다름없는 학풍인데?”

재석건의 경계심이 한층 강화됐다.

아예 학풍이 다르고, 성씨만 공 씨만 아닐 뿐. 사실상 공자의 직계나 다름없는 능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자신에게 도움을 준다고?

재석건의 입장에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천무백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

순간 뒤통수를 후려치는 강렬한 충격이 머리를 흔들었다.

담담하게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그저 단순히 넘길 수 없었다. 아니, 넘기기 어려웠다.

재석건은 머리가 찡하고 울렸다.

진리를 탐구하는 것.

‘……그것이 학자의 본분이지.’

천무백을 바라보는 재석건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학자의 본분이고, 학문을 닦는 이유다. 붓을 들고 책을 펼치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 아니던가.

한데 재석건은 저 밑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고작 학풍과 계파에 얽매여 진리를 감추고, 유리한 사실만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나?’

천하논전은 어쩌면 학자들에게 가슴을 뛰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중원 모든 학자가 모여, 학문을 논하고, 서로 배움을 청하다니.

한데 지금의 논전은 어떠한가?

‘학풍과 계파로 나뉘어, 진리를 감추고 서로의 의견만 내세우고 있다. 오로지 자신이 속한 학풍과 계파의 이익을 위해서만.’

재아가 남긴 일기의 내용을 입증하는 것이 곧 진리일 텐데.

재석건은 어찌했는가?

공부의 논리에 맞선다는 생각뿐이지 않던가.

‘맙소사. 난 본분을 잊고 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재석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진리.’

학풍과 계파가 무슨 소용일까. 진리만 결국 드러내면 될 터인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도움을 못 받을 건 또 뭐가 있겠는가.

“그래, 어떤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오?”

새삼 천무백을 대하는 재석건의 태도 역시 변화했다.

알게 모르게 날 서 있던 경계심이 누그러졌고, 엄연히 같은 학자를 대하는 것처럼 목소리엔 정중함이 깃들었다.

감정의 변화를 눈치챈 천무백이 씩 웃었다.

“간단합니다. 제공의 서책의 내용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려면, 공부의 후인들이 무공을 익혔는지를 확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걸 어찌.”

“무림인은, 무림인이 잘 아는 법이지요.”

“…….”

재석건이 고개를 갸웃했다.

천무백이 웃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강호무림에서 천룡검협이란 과분한 별호를 얻은, 천무백이라 합니다.”

* * *

재석건과의 대화를 마친 뒤 나오는 천무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오래 같이 다닌 능허야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능곡과 제갈설아의 시선은 심상치 않았다.

능곡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천 공자님께선 무도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공부가 깊으십니다.”

“어쭙잖게 책 몇 권 읽고 흉내 낸 것뿐이오.”

겸양 어린 말에 능곡은 뭐라 말하려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천무백을 바라보는 눈빛에 기이한 열기가 떠올랐다.

‘책 몇 권이라고?’

재석건과의 대화에서 천무백은 아낌없이 식견을 뽐냈다.

무림인이라는 정체를 밝히자 재석건은 경기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거부감을 피력했는데, 천무백은 거기서 학문적 성취를 내보이며 재석건을 설득했다.

‘재석건 공이야 그 학명이 자자하신 분이 아닌가.’

천하논전에 참여했다는 것만 해도 이미 학문적 성취는 입증된 셈.

하물며 재석건은 엄연히 한 학풍과 계파의 수좌로 인정받는 대학자다.

그런 재석건의 날카로운 질문과 논담 속에서도, 천무백은 거침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몇몇은 능곡도 대답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중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없는 식견이 가득했다.

‘대체 그런 고사를 고작 몇 권 읽고 뜻풀이까지 하며 말할 수가 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건 평생을 책을 읽은 학자의 완숙함이었으니까.

‘이들이 정말 무림인이 맞나?’

능곡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천무백뿐만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제갈설아에게도 능곡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유학적 지식이 아닌 다른 학문의 내용을 끌고 와 재석건의 말에 대답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으니까.

거부감을 피력하던 재석건 공도 어느 순간부턴 나직이 감탄하며, 그 논담을 즐기지 않던가.

결국, 재석건은 둘을 인정했다.

무림인이되, 학식을 갖춘 무림인이라고.

“협객의 정신과 군자의 마음, 그리고 학자의 태도를 갖춘 사람들이오.”

재석건의 인정은 확인사살이었다.

이틀 후 열릴 논전에서 재석건 측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저 견식할 자리라고만 여겼던 능곡은 발언권까지 얻었던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라면 논리를 정리해 발언을 할 수 있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어렵다. 기라성 같은 학자들 앞에서 말 한마디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새삼 입술을 질끈 깨문 능곡은 천무백의 등을 쳐다봤다.

‘무림인이라고 모두 무도한 건 아니고, 형님이 이들과 함께 다니는 이유가 있구나. 과연…….’

한편 제갈설아 역시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금 의아한 점도 있었다.

“천 공자님은 어쩐지 공자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에 거의 확신을 가지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이오?”

“네.”

천무백이 대답하지 않고 씩 웃었다.

제갈설아에겐 신기한 일이었다. 재석건 측의 논리를 들어보면 이쪽이 그럴듯하고, 또 공부 측의 논리를 들어보면 그쪽이 그럴듯하다.

한마디로 어디 하나로 확신을 내릴 수 없는 논리들의 연속.

그런데 천무백은 마치 공자가 무림인이다. 라는 확신을 가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거침없이 재석건 측을 도와주겠다고 한 거고.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확신을 가진 걸까.

확신이 있으니 저리 나설 터.

제갈설아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건 학자로서의 길을 걷던 제갈설아가 가지는 호기심이었다.

대체 어떤 논리를 준비할까? 그저 심계가 깊은 무림인이라고만 여겼던 천무백이, 어떤 논리를 보여 줄까?

“어떤 내용을 준비하실 건가요?”

“그야 정정당당하게 논리를 반박해야 하겠지요.”

맞다. 상대는 공부다. 천하 학문의 중심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지식인들. 그들이 내놓는 논리에 맞서려면, 거짓 하나 없는 정정당당한 논리를 내세워야 하는 법.

“정정당당하게…….”

“그렇소.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를 봐야지.”

“……네?”

어쩐지. 서로 안 어울리는 단어가 같이 쓰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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