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07화 (207/318)

<검신재생 207화>

207. 이 얼마나 허황된 소린가

천무백과 제갈설아는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능허와 능조의 대화는 밤낮이 바뀌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됐다.

중간에는 거친 고성과 욕설이 쏟아지기도 했고, 때론 조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간 간혹 작지만, 웃음소리가 나기도 했다.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18년간 서로 쌓아온 벽. 그것이 어찌 한순간에 풀리겠는가.

천무백은 그저 기다렸다.

‘능허도 어린아이는 아니니.’

천무백의 눈에 누가 어리게 보이지 않을까.

검후마저도 곰곰이 생각하면 어리게 느껴질 정도인데. 능허라고 다를까.

그래도 지금 능허는 산전수전 다 겪고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사람이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다시 중천쯤에 오를 때야, 능허는 피곤한 기색으로 방에서 나왔다.

바싹 메마른 피부와 눈 밑에 그림자가 짙었다. 피곤함 속에 묘한 열기가 숨겨져 있었으니, 천무백은 내심 짐작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잘됐냐?”

능허가 애써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붉은 눈시울을 보니, 제법 울었나 보다.

“잘될 게 뭐가 있소. 그냥 속에 응어리진 것만 조금 풀었을 뿐입니다.”

말은 그리 했지만 홀가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무백은 웃으며 말했다.

“지금 검을 잡고 휘둘러 봐라.”

“지금요?”

“조금은 검로가 다르게 보일 거다.”

“…….”

능허는 잠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의 조언은 금과옥조나 다름없음을 진즉 깨달았으니까.

“아, 아버지께서 찾으십니다. 천하논전에 대해 얘기했더니, 직접 대화를 해 보고 얘기해 주겠다는군요.”

천무백이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 * *

“못난 아들놈에게 얘기는 들었소. 곡부능가의 능조라 하외다. 보잘것없는 명성의 유자요.”

천무백이 포권을 취했다.

“하남 청성표국의 천무백이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대해 주시고, 쉴 곳과 음식을 내주었으니 감사합니다.”

자세와 태도가 꽤나 인상적이었을까.

기품 있고, 예의가 깃든 절도 있는 자세에 능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껄렁껄렁하게 변해 버린 자기 아들과는 달리, 무림인 치곤 헌앙한 자태가 아닌가.

“듣기론 못난 놈의 주군이라 들었소. 무림의 세계에 아는 바가 없어 지식이 짧아 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보잘것없는 무식한 무부이니, 그저 편히 말씀하시지요.”

반듯한 품행에 능조는 작게나마 감탄했다. 겸양스런 태도였지만, 당당함 역시 갖췄다.

‘호걸이구나.’

무복을 차려입은 천무백의 모습은 말 그대로 헌앙(軒昂)이란 단어가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더구나 품행까지 예의 바르고 절도가 있으니, 능조는 혐오하던 무림인이라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겸양할 필요 없소. 듣기론 무림에서 큰 명성을 갖춘 협객이라니, 비록 나는 붓을 들고, 그대는 칼을 들지만, 명성을 갖췄으면 그만한 인품을 갖췄다는 뜻이겠지요. 못난 자식놈에게 들었소. 천하논전에 참여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애석한 일이지만, 나는 논전에 참여할 생각이 없소.”

“…….”

천무백은 성급한 반문 대신, 조용히 침묵하며 능조를 응시했다. 능조는 또 한 번 그런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꽤 진중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능조는 말을 이었다.

“이번 논전은 어처구니가 없는 주제요. 어찌 그딴 허황한 내용으로 논전을 펼친단 말인가?”

“주제 말입니까? 이번 화제가 된 건, 제자의 일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재아(宰我)의 일기 덕분이지. 재아에 대해 알고 있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능조는 빠르게 천무백을 훑어봤다.

당황할 법도 한데, 천무백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공자의 문인 중 한 명이며, 노나라 출신의 공문십철 중 일인입니다. 변론의 달인으로 평 받지만, 도덕을 가벼이 여기고 공자로부터 인(仁)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요.”

“……그렇소.”

능조가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그의 눈빛에는 놀람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 답변을 기대하고 내민 질문은 아니다. 상대는 무림인이니까. 적어도 제법 책을 읽은 학식이어야만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이었다.

‘하긴, 무림인이라고 어찌 다 칼만 잡을까. 학식을 갖춘 선비와도 같은 협객도 있겠지.’

천무백에 대한 호감이 조금씩 차오르는 걸 느끼며, 능조는 말을 이었다.

“재아의 일기에선 공자를 매도하고 있소.”

“매도 말입니까?”

“그렇지. 그 내용이 허황되고 믿을 수 없소. 공자에 대한 비난 조는 아니지만, 그 내용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지금껏 전해져 온 공자의 품행과 태도에 모두 흠을 내는 내용이니까.”

“하면 논란이 될 법하지 않습니까.”

“흥. 진위야 그렇다 쳐도, 일기의 주인이 재아요. 재아. 공문십철 중 유일하게 공자에게 미움받은 사람이지요.”

“그 말인즉슨, 공자에 대한 반감으로 재아가 일부러 헛된 내용을 적었다는 의미이신지요.”

능조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리 쉽게 받아들이고, 곧장 해석을 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공자와 그의 문하인 재아와의 관계를 알아야 하니까.

둘의 관계를 알려면, 두 사람의 일화가 적힌 수많은 고서를 읽어야 한다. 그런 책을 읽으려면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분석할 줄 아는 독해력도 갖춰야 한다.

뿐이랴. 말뜻에 숨겨진 오묘한 이치를 되새기고, 그걸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능조가 나직하게 감탄했다.

“혹시 책을 좀 읽으셨소?”

“아닙니다. 부족하게나마 조금 읽고 학식을 쌓았을 뿐이지요. 가주님이 보기엔 일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언행과 태도가 퍽 진중했다. 진중한 자세와 목소리엔 진심이 담기기 마련이다. 능조는 새삼 감탄했다. 정말 스스로 책을 얼마 읽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고서야 저런 언행을 할 수나 있겠는가.

분명 겸양이다.

능조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능허 이놈이, 웬 어린놈을 주군으로 모신다더니. 그래도 무림인 중에도 제법 호걸이 있구나.’

능조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사실 천무백이 상세한 내용을 아는 이유는…….

‘꽤 소문 자자했지. 두 사람 사이 안 좋은 건.’

그 시대를 살았던 산증인이었으니까.

하여간 천무백에 대한 호감이 깊어진 능조는 살짝 미소까지 띄웠다.

“평생 학문에 정진한 학사라면 모를까. 검을 잡고, 험한 강호를 주유하는 무사에게 그 정도의 학식이라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오. 어깨를 펴시오.”

“하하…….”

“여하튼 나는 그 내용이 일고의 여지도 없는 허황되고,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생각하오.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겠지. 그런데 그걸로 논전을 연다고? 그 말인즉슨 재아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긍하겠다는 증거지. 하여 난 논전에 아예 참여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군요.”

“하지만…… 능허 녀석에게 들었소. 그대가 한낱 흑도의 거렁뱅이로 살던 저를 끌어 주고, 강호에서는 제법 협객이라는 정의로운 명성을 얻게끔 도와줬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천무백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독안사란 별호 역시 협객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인 건 분명했다. 만일 천무백을 만나지 않았다면, 능허는 혈사문에 들어가 마인이 되었을 테니까.

능허 역시 그 점을 잘 알았고, 능조에게 그 점을 강조했다.

사실 능조는 그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여전히 무림인은 무도한 칼잡이라고만 여겨졌으니까.

그러나 막상 대화해 본 천무백은 달랐다.

‘품행이 바르고, 기도가 범상치 않다. 외모는 헌앙하며, 눈엔 힘이 있고,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있다. 알게 모르게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분위기를 가졌다. 타고난 선한 사람이다.’

거기에 빗나간 아들을 적어도 협객으로 만들어 주고, 가정을 이루게 만들어 줬으니.

능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제 아들을 엇나가지 않게 도와준 사람이다.

나이가 어린 게 무슨 대수인가.

분명한 은인이다.

하면 충분한 보답을 해 줘야 할 터.

“나는 비록 참가하지 않지만, 곡이 녀석에겐 수많은 학자가 논전을 펼치는 광경이 큰 공부가 되겠지. 곡이를 보낼 테니, 같이 가 주시오. 어린 녀석이니 제 형과 뛰어난 무사들이 곁에서 큰 힘이 되어 주시오.”

“이를 말씀입니까. 감사합니다.”

“모두 내 문하의 사람들로 이름을 올리겠소. 괜찮겠지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데, 그 허황된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비록 견식하는 자리라지만, 어느 정도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여쭙습니다.”

“좋은 태도요. 비록 논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흐름은 알아야지. 재아의 일기에 적힌 내용은 참으로 무도한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능조는 잠시 뜸을 들였다. 과연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도 싫다는 듯, 끔찍한 얼굴을 하고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자를 칼 찬 무뢰배처럼 묘사하다니. 그게 말이 되겠소?”

“……칼 찬 무뢰배요?”

“그렇소. 지나가는 산적을 인과 예로서 교화시킨 내용을 칼을 써서 무릎을 꿇려 놓고 칼을 목에 들이대고 가르침을 내렸다는 내용이 허다하오. 어찌 공자를 그런 무도한 칼잡이로…… 흠흠. 그대를 앞에 두고 미안한 말이지만, 어찌 공자를 무림인처럼 묘사할 수 있단 말이오. 이게 허황된 내용이 아니고 뭐겠소.”

천무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능조는 무림인인 천무백이 보기에도 황당한 내용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흥. 공자를 무림인이라고 말하다니. 이 허황된 내용으로 논박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그냥 잡설이고 거짓이오. 쯧. 어처구니가 없어서…… 공자가 무슨 무림인이야.”

* * *

“그거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인데요?”

제갈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 믿을 수밖에 없는 게, 그게 바로 지금 논전의 주제였다.

천무백은 능곡과 함께 공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곡부능가의 문하제자라는 증표는, 두꺼운 공부의 빗장을 열어젖혔다.

천하논전은 무슨 비무대회처럼 단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다.

기약은 정해지지 않았고, 모인 수많은 학자가 서로 붙잡고 치열하게 논박하며, 하나의 주장이 성립되면 보름에 한 번 공부의 가주가 직접 나와 그 내용으로 토론한다.

능곡이야 아직 저 대단한 학자들과 논전하기엔 부족함이 있었으니, 그저 학자들의 논담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허. 정말 그 말을 믿는 학자들이 있네요?”

학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실제로 그 주제로 불타고 있었다.

“크게 보면 이러네요. 공부 측은 허황된 내용이라며 일축하고 있고, 재아의 후인들과 재아의 계파를 이은 학자들은 그 내용에 대해 진실하게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요.”

“대체로 공부 측의 숫자가 더 많지만, 재아 측의 목소리도 크오. 뭔가 확실한 구석이 있는 거지.”

공부 측에선 당연히 부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인과 예로써 사람에게 가르침을 내린 게 아니라, 칼을 차고 억압하며 가르침을 내렸다니.

이건 숫제 조상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하나 그것을 거짓이라 하면, 재아의 후인들은 제 조상이 거짓말쟁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니 자연히 논전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상의 명예가 얽힌 문제였으니까 유자들로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수밖에.

“이틀 후에 공부의 가주가 직접 나와서 논전을 펼친대요.”

“그때가 기회군.”

공부에 들어왔지만, 공부의 가주와 대면하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니 천무백은 이틀 후, 펼쳐지는 논전이 기회라고 여겼다.

다만 일대일로 대면해야 하니, 천무백은 어찌할지 고민스러웠다.

“공자가 무림인이라면, 아마도 공자의 후인이라는 공부의 사람들도 전해 내려져 오는 무공을 익혔겠죠?”

제갈설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그 말에는 단순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으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가 알 수 있겠네요. 무림인인지, 아닌지.”

“응?”

“내공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아…….”

순간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공부의 가주와 대면하는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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