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06화 (206/318)

<검신재생 206화>

206. 부전자전이라더니

비단 무림인이 아니어도, 한 분야에서 업적을 이뤄낸 사람에겐 범인과는 다른 무언가 있다.

그것은 긴 시간동안 쌓아온 연륜에서 나오는 분위기 또는 기세였다.

그 기세가 방안을 가득 채웠을 때, 능허의 아버지, 능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싸늘함이 깃든 목소리가 방안에 퍼져나가는 순간, 사위가 꽁꽁 얼어붙었다.

“참으로 장하구나. 장해.”

겉은 칭찬이나 뜻은 그렇지 않다.

노기가 어린 목소리는 메마르기 짝이 없어 비아냥임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 없었다.

표정변화 하나 없는 굳은 얼굴에선 한스러운 빛마저 어려있었으니까.

“…….”

능허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오랜 시간. 정확히는 무려 18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본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새하얗게 변해 버린 머리칼과 그 아래로 드러난 자글자글한 주름.

무림인이 아니고, 운동은 멀리하기 때문인지, 더 빠르게 늙은 아비의 모습이 보였다.

능허가 침묵하자 능조는 냉소를 지었다.

“그래, 이 못난 아비처럼 되지 않겠다고 뛰어나가더니, 끝내 그 목표는 이뤄냈구나.”

“사내라면 자고로 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법이지요.”

그것이 단지 능조의 말에 대한 반박일까.

아니다. 능조는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면서도, 한켠에선 쿡쿡 쑤시는 아픔이 밀려왔다.

‘아비처럼 되지 않겠다고 나가더니, 한낱 무도한 칼잡이가 되었더냐.’

그래, 결국 제 말은 지켰다. 아비 같은 학사가 아니라, 다른 세상의 무림인이 되었으니까.

하나 능조는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자신은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해서 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으니까.

‘그랬지. 나도 내가 뱉은 말은 지켜내지 못했지.’

능조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한 마음이 피어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독한 혀였다.

“그래. 네놈은 아비와는 달리 뱉은 말은 지켰구나. 군자의 모든 예와 인의를 저버리고, 무도한 칼잡이가 됐어. 네놈 꼴을 보거라. 눈은 어디로 갔고, 오른팔은 대체 어떤 무도한 건달이 잘라 냈느냐?”

흠칫.

그리 쏟아 낸 능조는 문득 방의 구석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옮겼다.

왜인지 자신의 말에 흠칫한 듯한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별안간 능조는 골이 났다.

‘미련한 자식. 칼 찬 무림인이 되는 것도 어리석은데, 하물며 저 어린 무사의 수하라고?’

막내인 능곡에게 듣자 하니, 저 어린 청년을 주군이라고 부르더란다.

책을 집어치우고 칼을 잡은 것도 화가 나는데. 심지어 어린아이의 수하라고?

그런 못마땅한 시선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법. 능허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미소였고, 웃음이었다. 다만 주위를 밝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는 아니다.

지독한 냉소(冷笑)였다.

능조를 똑바로 바라보는 능허의 눈은 불같이 타올랐다.

“18년 만에 만난 자식을 앞에 두고, 할 말이 그런 것들밖에 없습니까. 잘린 팔에 대한 걱정보다, 팔이 잘린 제 꼴을 비웃으시는군요.”

“…….”

틀린 말은 아니다. 능조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능허를 노려봤다.

능허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숨이 막힐 듯한 신경전이었고, 방에 같이 자리한 능곡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렸다.

제갈설아가 천무백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떡해요? 이건 화해시킬 수 있는 그런 게 아닌데요? 부자지간이 아니라 원수지간처럼 보여요.’

‘그러게 말이오.’

생각보다 태연한 반응에 제갈설아가 흘깃 천무백을 돌아봤다.

걱정스러운 자신과는 달리, 천무백은 태연자약했다. 아니, 오히려 눈을 빛내며 하나라도 놓칠세라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구경해요?’

마치 재미난 구경거리를 지켜보는 눈이 아닌가.

천무백이 멋쩍게 웃었다.

‘으흠, 조금 흥미진진하지 않소. 일단 더 지켜봅시다.’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하네요.’

솔직히, 조금 흥미롭긴 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온 것이냐? 강호의 삶을 접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이냐?”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나 이전과는 달랐다. 약간의 기대감과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매섭고, 강팍한 얼굴이었지만, 천무백은 그 얼굴 너머에서 점멸하는 수많은 색의 채도를 봤다.

‘좋은 말은 못 하는 전형적인 쑥스러운 아버지군.’

속으로는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아마 18년 동안 그리워했을 것이다. 혈연이란 말로써 끊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니까. 어쩌면 죽은 것으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18년 만에 만났다. 얼굴에 번지는 빛무리는 애틋함과 반가움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잔뜩 날이 선 독한 말들이다.

그 괴리감에 또 한 번 자책하는 빛이 점멸한다.

천무백은 속내를 짐작하곤, 그래도 저 부자지간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냉랭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이곳을 밟을 생각이 없었지요. 우연히 곡이를 만나지 않았다면요.”

“한때 유학을 배웠다고, 그래도 효(孝)를 행하겠다는 것이냐?”

“곡이의 간절한 부탁이 아니었으면 그깟 효라는 덕목은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겁니다.”

“그걸 말이라고!”

꽈앙!

탁자를 거세게 내리친 능조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네놈은 곡부능가의 장자다!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 오고, 대대로 한림원에서 학문으로 뜻을 높인, 이 능가의 적장자란 말이다! 그런데 강호에서 무도한 삶을 계속하겠다고?”

“곡이가 있지 않습니까.”

“네놈이 장자란 말이다! 그런데 계속 무림인으로 살겠다? 인과 예는 저버린 채, 세상 모든 게 그저 그 무도한 칼로만 되는 줄 아느냐?”

끊임없이 쏟아지는 분노와 칼날처럼 싸늘한 말에도 능허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말아 올라간 입꼬리에서 느껴지는 건 경멸이었다.

“그리도 대단한 유학을 익혀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저 황궁에서 유유자적하게 글월만 읽으셨으니, 그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긴 아쉬웠겠지요. 평생을 함께한 학문으로, 높은 벼슬을 받아 황궁에서 유유자적하는데, 어머니의 병세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

“공자님 말씀으로 안 되던 일들이, 칼로 하면 저절로 명성이 따라오고 돈이 따라오니, 오히려 세상이 더 즐겁더이다. 내 어릴 적, 차라리 칼을 들었으면 어머니를 좀 더 편하게 모셨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천무백은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아무래도 복잡한 가정사엔 능허의 어머니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였다.

‘어머니의 죽음에 아버지가 큰 죄를 지었다고 여기는 것인가.’

그래서 젊은 시절, 집을 뛰쳐나오고 말이다.

물론 더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다만, 생각보다 갈등의 골이 더 깊은 듯했다.

속내는 어쩔 줄 몰라도, 외부로 표출되는 건 첨예한 갈등.

저런 날 선 갈등이라면 속내는 감춰지고, 계속해서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이러다간 서로 상처만 되고, 영영 쳐다도 안 볼 거예요.’

제갈설아가 다급한 전음을 보내곤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비교적 여린 마음을 지닌 제갈설아는, 능허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만.

그래도 같이 다녔다고 정이 생긴 건 당연했다.

이왕이면 가족끼리 행복한 게 좋지 않겠는가. 제갈설아는 진심으로 그리 바랐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능허 아저씨는 그리 무도한 삶을 살지 않았어요.”

“……소저는 누구신가?”

별안간 끼어드는 제갈설아에, 능조는 능허 대하듯이 분노를 토할 수는 없었는지 조금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쳐다봤다.

제갈설아는 정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명문세가의 훌륭한 가르침을 따른 예의가 엿보여서, 일순 능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인사가 늦었어요. 제갈세가의 제갈설아라고 합니다.”

“제갈세가라……!”

눈이 동그랗게 뜨인 능조가 일순 입이 막히자, 분위기가 환기된 걸 느낀 제갈설아가 곧장 말을 이었다.

“유가에서 중요한 것이 수신(修身)부터, 제가(齊家)를 거치는 것이죠? 능허 아저씨는 수신하여 훌륭한 협객으로 강호에서 명성을 얻었고, 제가하여 정인과 새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가졌으니 무도한 삶을 살지 않았어요.”

스스로 몸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다스리는 것.

유학의 가르침에서 가장 기본적인 얘기였다. 글자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제갈설아의 의도는 충분했다.

그저 무도한 무림인이 아니라, 충분히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의도.

그것이 통했을까.

거침없이 능허를 쏘아붙이던 능조가 일순 멈칫했다. 어색한 침묵이 방안에 가득 찼다.

능조가 묘한 눈빛이 능허에게 꽂혔다.

“……애가 있느냐?”

“……아직 배 속에 있소.”

능허는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능조의 얼굴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굳어 있었으니까.

“어떤 여자냐.”

그 질문에 능허는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어쩐지 능조의 목소리에 조금의 따스함이 깃들어져 있음을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인제 와서 시아버지 노릇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신붓감으로 괜찮은지,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려는 걸까.

능허는 뒤틀리는 마음에 비죽이며 쏘아붙였다.

“기녀입니다. 왜요, 마음에 차십니까?”

대답은 곧장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런.’

천무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완고한 지식인이라 그런 걸까.

기녀라는 말이 나오자, 능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화산처럼 시뻘게지는 얼굴.

그리고 끝내, 터졌다.

“니런, 썅! 이런 개자식이!”

“…….”

능허는 두 눈을 감았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건 감추기 어려웠다.

“이런 썅놈의 자식이. 뭐? 18년 만에 돌아와서 하는 소리가 뭐?”

썅놈의 자식이면, 본인이 썅놈이라는 거 아닌가.

천무백은 한편으로는 끝내 터져버린 능조를 보며 묘한 생각을 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능허의 입담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네.’

고매하고 완고한 학자가 저렴한 욕설을 내뱉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부전자전이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능조는 체면을 모두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기녀라는 이유만으로, 저리 분노하는 걸까요?’

제갈설아의 안타까운 전음에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7대가 한림학사를 지낸 뼈대 깊은 학사 가문이니.’

‘결국, 능허 아저씨는 화해하기 어려운 걸까요.’

‘……지금으로선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소.’

아무래도 저 찢어진 갈등을 봉합시키기란 어려워 보였다.

천하의 천무백도, 남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방도는 없다. 가족간의 갈등은 결국 구성원들이 해결해야하는 문제니까.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이, 내가 너를 그리 키웠더냐? 장남이란 녀석이!”

“어차피 절연했으니, 뭐가 문젭니까.”

능허 역시 능조의 반응에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자 능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주먹을 꽉 쥔 볼품없는 양팔에서 핏줄이 불거지며 부들부들 떨렸다.

능허는 능조의 반응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하진 않았다만, 결국 저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무엇일지는 짐작 됐다.

‘기녀 며느리라니. 인정하겠나. 어쩌면 절연한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겠지.’

능허는 조금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능조를 쳐다봤다.

능조의 입에서 불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미련한 놈! 장남이란 놈이, 학문을 익혔다는 놈이, 칼 찬 무사란 놈이, 어? 여인과 정을 맺고 애를 뱄는데, 어? 임부(妊婦)를 홀로 내버려 두고 여길 찾아와?”

“……응?”

“이 머저리 같은 자식아. 애 아비가 같이 있어 줘야지. 곁을 지켜 줘야지!”

“……네?”

“이 답답한 자식아. 너는 임부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런데 한가롭게 산동까지 와?”

뭔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능허는 멍한 얼굴이었다.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능조는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며 어수선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응? 며늘아기와 같이 외유를 나오던가! 어찌 혼자 내버려 두느냐! 차라리 같이 와서 이 늙은 애비에게 소개라도 해 줬어야지! 잠깐만, 창고에 내 임부에게 좋은 약재가 꽤 있는데…… 곡아! 곡아! 근방 약재방 좀 다녀와라! 아니, 아니다. 이런 건 내가 직접 가야겠다.”

“……대체.”

“으이그. 이런 나쁜놈. 어찌 임부를 홀로 내버려 두고. 무림인이라면 다 그리 무도하더냐? 그래. 하남이라고 했지? 차라리 내가 하남으로 가는 게 낫겠구나. 그게 더 낫겠어.”

“아니 무슨…….”

붉어진 얼굴로 허둥지둥하는 능조와, 그걸 넋 놓고 바라보는 능허.

‘노인에게는 손주를 안겨주는 게 최고의 효도라더니.’

그 광경을 보며 천무백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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