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03화>
203. 형님!
학사는 단호하고 꼿꼿한 어조였지만, 단 조금도 무례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중했다.
명백한 거절 의사였지만, 듣는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게 할 정도로 깔끔한 태도와 목소리였다.
“이번 천하논전이 마무리되면, 그때 가주님께서 만나 뵙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천하논전이라…….”
천하논전(天下論戰).
작금 곡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학자들이 많았던 거네요. 저희 같은 무림인들은 하나도 없고.”
객잔에 칼 찬 무인들은 이질적인지, 점소이가 흘깃흘깃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때문에 제갈설아는 목소리를 낮췄다.
“처음 봐요. 학자들이 이렇게 모여서 논전을 펼치는 거.”
“그러고 보니 해적들이 잡은 인질 속에 제법 꼬장꼬장해 보이는 학자가 있었지. 먼 광서성에서 왜 산동으로 가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보오.”
천하논전은 말 그대로였다.
천하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여 논전을 펼치는 것.
천무백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무수한 전생 동안 천하논전이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단순한 학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아무리 학문과 무림이 서로 호감을 느끼진 않더라도, 천무백은 서찰에 산동검호의 표식을 남겼다.
서찰을 전달하던 학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표식에 대해 아는 게 틀림없었다.
현 공부의 가주에게 전해졌음은 확실할 터.
그러니 출입을 가주가 거절했다는 건, 거짓이 아닌 게 분명했다.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야. 주군이 당당하게 나선 일 중에 안 풀린 건 처음 보오.”
능허가 신기한 기색으로 말할 정도였다. 시종일관 조용하던 능허는 이대로 공부에 못 들어간 걸 오히려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진짜 공부에서 사람이라도 때리고 강도질이라도 했나.’
천무백이 침묵하자, 제갈설아가 마치 위로라도 하듯이 어깨를 두들겼다.
당당하게 나섰다가 일이 틀어지자 상심한 것처럼 비친 듯했다.
“제가 듣기로 원래 공부에는 칼 찬 사람들은 절대 들어갈 수가 없대요.”
칼 찬 사람들.
즉 무림인은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건 비단 무림인뿐이 아니다.
“황실의 관군도, 장군도, 관리도 칼을 찬 무사를 대동할 수 없다고 할 정도니까요.”
그만한 위세를 가진 곳이 바로 공부다.
천하 학문의 중심지.
그런 곳에 애당초 무림인이 접근할 방법은 극히 적다.
“아마 무당의 장문인이시나, 소림의 방장님은 가능하실 거예요. 아니면 우리 할아버지요.”
“단순 무림인이 아니라, 학문의 권위자로 볼 수 있으니 그렇겠소.”
무당의 장문인은 도학이란 측면에서 보면 최고 권위자다. 소림의 방장도 마찬가지. 불학 측면으로 보면 중원 제일의 권위자니까. 모든 학문에서 두루 뛰어난 제갈선은 두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만남은 허락한 거잖아요? 천하논전이 끝나면 만나겠다고.”
제갈설아는 오히려 그게 더 대단하지 않냐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능허가 그 광경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무슨. 하나도 상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저렇게 열정을 다해서 위로하냐.’
능허는 알았다. 천무백은 상심하지 않았다고. 그저 얼굴에 떠오른 건 짙은 의문일 뿐이었다. 그냥 궁금한 것이다.
한데도 상심한 사람을 위로하듯 하는 모습이라니.
그 다정함에 능허는 부러움이 불쑥 드는 한편, 하남이 그리웠다. 정확히는 연화루의 설영이가.
‘보고 싶다, 설영아…….’
어쩐지 옆구리가 시렸다.
“이보게, 주인.”
천무백은 객잔 주인을 불렀다.
아무래도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곡부는 작은 도시고, 무림과는 관계가 없고, 또 기루도, 술집도 없다 보니 하오문도, 개방도 없었다.
그들의 정보를 구하려면 다른 도시로 가야 할 터.
차라리 현지인에게 정보를 구하는 게 훨씬 빠르고 정확하리라.
보기 힘든 무림인의 등장에 조금 멈칫하던 주인은 영업용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띄우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혹시 요리가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그건 아닌데, 물어볼 게 있소. 천하논전은 대체 무슨 일이오?”
“아, 논전 말씀입니까?”
객잔 주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말했다.
“한낱 무식한 장사치가 무얼 알겠습니다마는, 듣기론 학자님들 사이에서 무슨 큰일이 벌어져서, 싸움이 났다고…….”
말꼬리가 조금 길게 늘어졌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눈을 보니 천무백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다.
천무백이 웃으며 품에서 은전을 꺼냈다.
“요 며칠 머무를 거요. 가장 큰방 세 개 내주고, 요리도 가장 비싼 거로. 잔돈은 필요 없소.”
객잔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모든 주문을 다 합쳐도 은전 하나에 못 미친다. 객잔 주인은 허리를 크게 숙였다.
“아, 제가 듣기론 말이죠…….”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학자가 아닌 일반 양민이기에, 더 정확하고 확실한 사실은 없었지만, 대략적인 개요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객잔 주인이 물러서자, 제갈설아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공자님은 되게 강호 경험이 풍부하신 것 같아요.”
“표국에서 자라서 그러오. 돈의 위력을 알거든.”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지만, 제갈설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강호에 출두한 지 몇 년이나 됐다고……. 4년이나 됐나?’
심계가 깊었고, 강호 경험이 녹록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고작 은전 하나 내주고 정보 듣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냐마는, 나이를 생각하면 그렇다. 더구나 제갈설아는 명문세가의 자녀들을 친우로 뒀고, 그들 대부분은 하인이나 호위무사를 시켜서 일을 처리하지, 직접 저렇게 사람을 구슬리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너무 많은 돈을 준 거 아니에요?”
은전 하나라면 꽤 큰돈이다. 적어도 저 객잔 주인에겐 사나흘은 가게를 열어도 되지 않을 정도.
“해적들이 양민들을 쥐어짜 번 돈인데, 다시 양민에게 가는 게 뭐가 문제겠소.”
“그렇긴 하네요.”
뭔가 궤변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부에 들어가시려고요? 지금 상황을 들어보면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천하논전이 열린다는 건, 곧 모든 학자가 모여 논담할 주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가 남긴 일기가 도화선이 됐다는 걸 보아하니…….”
다름 아닌 공자의 제자가 남긴 기록이 발견됐다.
공자와 중원을 주유하며, 그가 본 공자를 일기를 쓰듯 담담한 필체로 써 내려간 서책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공자에 관한 내용이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
그간 학계에 이어져 온 내용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수도 없이 많았다.
객잔주인은 거기까지 자세하게 알진 못했다. 하나 어쨌든 서책의 진위부터 시작해서, 그 내용에 대한 논박이 거세게 일어났다.
제법 심각한 문제인 듯, 공부에서는 중원의 모든 학자가 모여서 논의하자는 골자로 천하논전이라는 걸 연 것이다.
“천하 학자가 모여 논전을 펼친다…….”
“무림으로 따지면 천하의 고수들이 모여 천하제일을 꼽는 자리겠죠?”
“그러니 당장 만나기가 요원하군.”
아마 공부로서도 사력을 다해 논전을 준비해야 하리라.
천무백이 제아무리 산동검호 시절의 인연을 내세웠다고 한들, 일의 우선순위가 다른 법이다.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제갈설아가 동감했다.
“그렇겠죠? 얼마나 많은 논리와 또 그 논리를 다시 반박하는 새로운 논리. 무인들의 비무처럼 딱 끊어서 누가 이겼고, 누가 강하고 증명하는 게 아니니까요.”
천무백이 생각한 시간은 한 달.
그 안에 성물을 차지하고, 수리가 끝난 철신고검을 가지고 하남으로 복귀하는 것.
기존 계획이었다.
천하논전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으니 천무백으로선 고민스러웠다.
차라리 상대가 어디 무림방파라면, 그냥 도장 깨기 형식으로 칼 하나 들고 몸을 던지겠다만.
무려 공부가 아닌가.
한참 침묵하자, 제갈설아가 답답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공부의 가주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제갈설아 역시 천무백이 공부에서 성물을 찾는 건 알았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받아 내냐는 것.
만나서 달라고 하면, 냅다 내주겠는가?
제갈설아가 지켜본 천무백은 심계가 깊다. 무슨 일을 하든, 대충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미 한 수, 두 수 앞을 미리 내다보고 행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교묘하게 맞물리는 과정을 보고 소름이 돋았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그래서 잔뜩 기대 어린 눈빛으로 천무백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나 이어지는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야 한판 붙으려고 했소.”
“……네?”
“한판 붙고, 이기면 성물을 달라고 하려고 했지.”
순간 정적이 가라앉았다. 능허도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하는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고, 제갈설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그러니까 학문으로 논전을 펼치겠다는 말씀이세요?”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에게 유학에도 성취가 있냐고 물어본 건가?’
순간 난처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할아버지 제갈선도 논전에서 패배했다. 자신이 유학에 조예가 깊은 건 사실이지만, 어찌 공부의 가주에게 앞설 수 있겠는가.
세삼 자신에 대해 신뢰가 깊다는 것에 감동하였지만, 제갈설아는 짐짓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다.
하나 이어지는 대답에 부담감 대신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난 무림인이고 검객이오. 그럼 검으로 싸워야지.”
“……어 공부의 가주는 학자인데요.”
“난 무림인인데.”
“…….”
제갈설아는 순간 자신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헷갈렸다.
천무백의 담담한 표정을 보면, 어울리지 않게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제갈설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려 능허를 쳐다봤다.
능허 역시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제갈설아와는 달리 혼란스러워하기보단…….
‘체념?’
그랬다. 그냥 한숨을 내쉬며 체념하는 얼굴이었다.
제갈설아는 황당함을 애써 억누르고 천무백에게 더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도에 그쳤다.
어느 순간부터 객잔에 들어와서, 유심히 이쪽을 바라보는 젊은 학사가 있었다.
깔끔한 복색의 학사는 객잔에 들어올 때부터 시선을 천무백에게 두고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무림인이라 신기해서 쳐다보는가 싶었지만, 무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얼마나 시선이 뜨거웠는지, 제갈설아가 천무백과 대화를 잇지 못하고 노려볼 정도였다.
하나 학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이쪽 탁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아는 사람이에요?”
제갈설아가 흘깃 흘기며 천무백에게 그리 묻자, 천무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오.”
“근데 왜 이쪽으로 오지?”
학사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더니, 창백한 얼굴로 입을 뗐다.
“……형님?”
“응?”
“어?”
그러니까 학사의 손이 올려진 어깨는 다름 아닌…….
“능 형님? 형님이십니까? 정녕, 형님이십니까?”
능허였다.
능허는 경악한 얼굴로 젊은 학사를 바라봤다. 학사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형님! 이 아우를 왜 몰라보십니까?”
“…….”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요지경은 또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