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02화 (202/318)

<검신재생 202화>

202. 출입 거절

“종리홍이 거짓부렁 늘어놓은 거 아닙니까? 무슨 도교의 성물이 유학의 성지에 있습니까?”

능허의 말은 일견 합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원 도교의 성물과 유학의 성지라고도 일컫는 곡부와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였으니까.

하나 천무백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종리홍은 오히려 내가 성물을 찾길 원하는 눈치였다.”

“왜요?”

“내가 모아 놓으면 언젠가 중원도학의 명맥을 이었다는 명목으로, 종남파가 넘겨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

명백한 오해였지만, 그럴 만했다. 종리홍은 천무백이 혈귀곡의 위협으로부터 성물을 지키려고 움직이는 거로 알았다.

종리홍 입장에서는 도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무인이 선기를 느끼거나,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에서 추론되는 결과였다.

어차피 혈귀곡의 손아귀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라면.

그리고 언젠가 종남이 성물을 모두 취하려면.

차라리 천무백이 혈귀곡으로부터 성물을 보호하게 내버려 두고, 나중에 모든 일이 잘 해결된 뒤에 넘겨받으면 될 일 아닌가?

그것이 종리홍의 의도였다. 괜히 순순히 얘기한 게 아니다.

“하긴, 종리홍도 야심가긴 하죠.”

스스로 천하제일이 되려고 하고, 사문 역시 천하제일이 되기를 원하는 야심가.

그런 야심가가 호락호락하겠는가.

“글쎄. 주군 앞에선 호구처럼 보이던데.”

“쓰읍. 강호의 명숙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강호 명숙의 뒤통수를 후린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데.”

“후리긴 뭘 후려. 은인한테 적당히 보답받은 건데.”

능허는 잠시 천무백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네?’

굳건한 신념이라도 새긴 듯한 단호한 얼굴.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능허는 새삼 감탄했다.

‘얼굴에 철판 깔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하긴.

어디 보통 철판인가. 수십, 수백의 전생에 걸쳐 쌓인 세월이란 이름의 철판인데.

어쨌거나 천무백은 곡부에 성물이 있으리라 확신했고, 곧장 방향을 그리 잡았다.

“끄응. 없을 거 같은데.”

한데 능허는 답지 않게 계속 부정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평소 천무백이 결정을 내리면, 투덜대도 성실히 따랐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한 눈치였다.

정말 가기 싫어하는 낌새랄까.

특히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천무백은, 능허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빛무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가기 싫어하네?’

무언가 꺼리는 기색이 가득하다.

“어릴 때 곡부에서 뭐 훔치다가 걸린 적이라도 있냐.”

고향이 산동이라 했으니, 곡부에 가 봤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산동검호 시절로 살 때, 곡부에 여러 번 방문했었으니까.

천무백이 그리 묻자 능허는 흠칫하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후딱 다녀오죠. 후딱.”

무언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 보였지만, 천무백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능허와는 달리 제갈설아는 상기된 얼굴이었다.

얼굴 가득한 기대감이 한눈에 훤히 보였다. 천무백의 시선을 느낀 제갈설아가 밝게 웃었다.

“곡부라니.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었어요.”

“꼭? 무림인이 굳이 곡부를 찾아가는 경우는 못 본 것 같은데.”

“하지만 중원 유학이 집대성된 장소고, 중원 제일의 거유들이 매일같이 학문을 논하는 곳이잖아요?”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천무백은 새삼 눈이 이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갈설아가 곡부에 가지는 기대감은 순전히 학문적인 측면이다.

“하긴. 곡부엔 굳이 유학뿐 아니라, 중원의 모든 학문을 공부할 수 있으니까.”

“맞아요! 황실의 서고보다 더 많은 학문이 밤하늘의 별처럼 가득하다고 들었어요.”

비록 유학의 성지라지만, 중원의 모든 학문을 논하는 장소기도 했다.

공자의 직계후손이 머무르는 만큼, 비단 유학뿐 아니라 많은 학자가 논담을 위해 곡부에 모여들곤 했는데, 유학의 이치와 논리를 반박하고 논담하기 위해 모여들고, 또 곡부에선 반격하기 위해 상대의 학문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니 중원의 모든 학문이 모여든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가 보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순수한 토론에서 져 봤다고 했어요.”

제갈설아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그녀에게 있어 태상가주 제갈선은 스승이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다.

아니, 비단 그녀뿐일까.

아마 무림인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하리라.

“저는 당연히 유학에 관해서만 토론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니래요. 세상 모든 지식에 관해 얘기했대요.”

그건 어린 제갈설아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 줬다.

제갈선은 무(武)에도 대종사나 다름없었으나, 학문에서도 능히 하나의 학문의 종파를 만들어 낼 만한 천재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할아버지가 순순하게 패배를 시인했던 자.

“공자의 직계후손이라고 했으니까요. 꼭 한번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할아버지처럼 토론 같은 건 아니어도, 가르침은 받고 싶었죠.”

어차피 제갈세가의 가주 자리는 그녀의 오라버니가 이을 것.

천재로 어린 시절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제갈설아는 애당초 학문의 길을 걸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왜 강호인이 되셨소?”

“……확실히 길을 정하지 않고 고민 중이었는데, 혈귀곡 애들이 나타났거든요.”

제갈설아는 천무백을 흘깃 바라보곤 고개를 홱 돌렸다.

정확히는 검왕곡에서 천무백에게 구함을 받던 그때.

제갈설아는 고민을 접었다.

혈귀곡이 강호에 출몰해서? 아니다.

‘학자가 되면 만날 수가 없잖아.’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제갈설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물론 얼굴을 감춘다고 해도, 천무백의 선안에 붉은 빛무리가 번지는 걸 알았다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으리라.

“무인으로 살면서 학자로도 살 수 있소.”

“문무겸전이 얼마나 힘든데요.”

“가능할 거요. 소저는.”

“……!”

천무백의 담담한 말에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이 목까지 번졌다.

그저 농담으로 빈말이라도 하는가 싶었지만, 말에는 힘이 담기기 마련이고, 그 힘에는 뜻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리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확신이 새겨진 목소리에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천무백을 바라봤다.

어째서 저리도 확신을 두고 말할까.

어쩐지 자신에 강한 믿음이 느껴지는 거 같아서, 제갈설아는 가슴이 뛰었다.

* * *

곡부는 큰 도시가 아니다.

서두르면 하루 정도에 도시를 다 둘러볼 정도니까.

때문일까.

천무백 일행이 곡부의 성안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정말 비좁다는 생각이었다.

“……뭐 축제라도 열린답니까?”

곡부에 올 때까지 말 한마디도 없이 조용하던 능허가 혀를 찼다.

그만큼 번잡했다. 아니, 번잡하다고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꽉꽉 찼다.

큰 대로는 마차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빽빽했고, 대로 양편으로 늘어선 가게나 객잔도 빈자리가 없었다.

“여기가 상업으로 발달한 도시도 아니고…….”

물론 공부가 유명하니, 사람이 많이 몰리기야 한다지만.

이건 숫제 성도에서나 볼 법한 번잡함이다. 오히려 성도보다 더한 감이 있었다.

“무슨 여기서 별시라도 본다고 했나.”

슬쩍 돌아보니 학사의 행색을 한 이가 많았다. 그들을 따르는 시종도 많았고.

아무리 곡부가 학사들이 유난히 많은 곳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정도가 과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옆구리에 서책을 끼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허리춤에 칼을 찬 천무백 일행이 극히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어딜 가나 무림인이 늘 있던 강호였기에, 천무백마저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수많은 삶 동안 칼을 안 잡고 책을 잡아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매 삶을 강호에서 살았으니, 곡부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단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확실히 곡부의 상황은 특이했기에 제갈설아가 그리 제안했다.

천무백은 흘깃 능허를 바라봤다.

이럴 때마다 기민하게 움직여 여기저기서 상황을 파악하고 요약하던 능허였다.

한데 능허는 무언가 께름칙한 기색으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마치 얼굴이 팔리기 싫어하는 것처럼.

살벌한 인상을 감추고 싶어서 그럴 건 아닐 거다.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일단 공부로 가 봅시다. 들어갈 수 있는지는 봐야 하니.”

공부로 가는 길은 굳이 찾지 않아도 외부인이라도 다 알 정도로 뚜렷했다.

“……모든 학사가 같은 방향이네요.”

제갈설아의 말대로였다.

공부로 향할수록 학자들의 밀집도는 더 심해졌다. 모든 학자가 다 그쪽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무백 역시 공부로 가는 길이 낯설지 않았다.

산동검호 시절, 이곳을 몇 번 방문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길은 시간이 수없이 흐른 지금도 큰 차이가 없었다.

하나 그때와의 차이점이 있긴 했다.

‘너무 많아.’

본래 번잡함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람들이다.

당시 공부는 조용했다. 엄숙한 분위기가 도시에 전체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지금처럼 많은 숫자도 없었다.

간혹 가르침을 청하는 학자들이 이따금 오갈 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마치 비무대회가 열리는 무림인들 모습 같지 않습니까?”

지금껏 침묵하던 능허의 말에 천무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능허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활력이 넘쳐흐르다 못해 묘한 열기로 가득한 거리.

단호한 얼굴의 학사들 사이에서 흐르는 기류.

평소보다 높은 어조의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뛰는 것도 품위가 없다고 말하는 몇몇 학자들을 떠올리면, 지금은 광경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공부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질감은 뚜렷해졌다.

“무슨 축제라도 열리나…….”

정문 앞에 길게 늘어선 학자들의 줄.

다들 하나같이 공부에 들어가려는 인파였다.

“이거, 들어갈 수는 있을까요?”

제갈설아가 미간을 좁혔다.

수많은 학자가 몰리고 있는데, 과연 무림인인 천무백 일행이 들어갈 수나 있는가.

제갈설아의 걱정은 당연했지만, 천무백은 개의치 않았다.

“걱정 마시오. 들어갈 수 있으니.”

천무백은 공부에 출입을 허락해 달라는 접수를 하면서 동시에 서찰을 공부의 학자에게 건넸다.

학자는 서찰 겉면에 적힌 표식을 보더니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서찰과 천무백을 번갈아 보더니, 화들짝 놀라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산동검호 때의 인연이 있으니.’

산동검호.

천무백의 무수한 전생 중, 몇 안 되는 지명이 붙은 별호다.

그만큼 당시 천무백은 산동성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쳤다.

당연히 곡부와 여러 접점이 생겼다. 단순한 인연이 아니다. 산동검호로 공자의 직계후손들에게 관계를 맺어놨으니. 서찰로 산동검호에 대해 운만 띄워도, 만남이 이뤄지리라.

천무백의 확신 어린 표정에 제갈설아는 웃으며 수긍했다.

‘잘되겠지.’

천무백이 나서서 안 풀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저리도 확신하니, 제갈설아는 곧 공부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반나절쯤 지났을까.

“천룡검협, 천무백 공 되십니까?”

공부에서 사람이 나왔다.

젊은 학자였다. 자세가 바르고 목소리는 또렷한 게 과연 공부의 학자다 싶었다.

정중한 자세를 보니 귀한 손님이라도 대하는 태도였다.

제갈설아와 능허가 경악한 눈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아무리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설마 반나절 만에 이렇게 사람이 직접 나올 줄이야.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제갈설아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할아버지도 만남을 청하고 꼬박 나흘은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리기만 했다고 했는데.’

고작 반나절 만에? 천룡검협이란 명성? 그건 강호에서나 통하지, 이 학문의 전당에서 통할 수나 있을까?

물론 천무백의 장담을 믿긴 했지만, 반나절만에 이렇게 사람이 나온다고?

그런 복잡하고 감탄 섞인 시선 속에서, 천무백은 담담하게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내가 천무백입니다.”

“죄송하지만, 가주님께선 만남을 추후에 약속하시며 용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

출입 거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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