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00화>
200. 가능하지? 얘들아?
송정상단은 절강과 산동을 오가는 정기 배편을 운영한다. 고정 거래처가 있어서 정기적으로 배가 오갔는데, 이왕 정기적인 것 여객 사업도 같이 했다. 여객 사업이 된다는 건 지극히 안전적인 해로라는 의미다.
때문일까. 배에 탄 송정상단의 행수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이 자식들이 미쳤나? 연안까지 접근한다고?”
절강 바다에 해적들이 나오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만, 그거야 타국으로 가는 먼 상행에서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연안을 통해 산동으로 가는 해로에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언제든 관군이 출동할 수 있는 가까운 위치가 아닌가.
해적은 맹렬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노를 저어오고 있었다.
“이런 망할!”
관군이 나타나기 전에 빨리 치고 빼겠다는 뜻인지, 쾌속선이었다.
급히 도망치려 해도 속도의 차이는 명백.
순식간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해적들의 거친 웃음소리와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귀에 생생히 들릴 정도였다.
“놈들은 노예로 삼아 데리고 가고, 사치품이랑 금만 갈취하라! 배는 버려!”
생생하게 들려오는 해적들의 목소리에 혼란과 비명이 가득한 승객 사이로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무백이었다.
“해적이네.”
“해적이네요.”
“절강 바다의 해적이 극성이라는 소문은 얼핏 들었죠.”
능허는 헛웃음을 흘렸다.
해적이라니. 중원 사람이 해적을 만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까.
당장 옆에서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제갈설아를 보면 알 만하다.
‘신기해?’
제갈설아는 바다라는 환경이 그리도 신기하고 신났는지, 해적을 보고도 신기한 눈빛이다. 옆에 있는 천무백은 또 어떤가.
‘왜 웃어?’
잔잔한 미소를 보면, 해적을 만난 사람이 아니라 무슨 가족을 만난 얼굴이다.
좀처럼 두 명의 반응이 특이했다.
‘이야. 이런 데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네. 잘 어울린다. 잘 어울려.’
능허가 그리 하잘것없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상단의 호위 무사들론 못 당할 거 같은데, 처리할까요?”
능허가 당장이라도 갑판을 건너갈 기세로 내딛던 순간이었다.
“아니, 죽이진 말고.”
천무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이진 말고?
저 해적들을 생포해서 뭐 어쩌겠다는 건가? 갈 길도 바쁜데……?
의아함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자 뜬금없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쟤들 해적이니까 힘 잘 쓰겠지?”
“……그야 그렇겠죠?”
“그러면 노도 잘 젓겠지?”
“그렇죠?”
천무백이 씩 웃었다.
“배 하나씩 맡아서 다 제압해. 안 그래도 이 배 느려서 답답했는데, 끌고 가게 하면 되겠다.”
“……”
“하남에서 갖고 온 여비도 슬슬 떨어지는데, 적당히 여비 수급 좀 하고.”
“……”
새삼 하필이면 이 배를 털려고 시도한 저 해적들이 불쌍해진 능허였다.
* * *
“사, 살려 주십시오!”
“그래, 그래. 안 죽여, 안 죽여. 그냥 밧줄로 연결해서 죽어라 노 저으면 돼.”
능허는 단숨에 배 하나를 제압했다. 능허의 솜씨가 대단한 것도 있지만, 해적들의 수준이 그렇게 살벌하지 않은 점도 주효했다.
더구나 작은 쾌속선이라 그런지 타고 있는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배 하나를 제압한 능허는 고개를 돌려 다른 배를 바라봤다.
슬쩍 보니 천무백은 이미 진즉 제압은 끝내고, 밧줄로 배를 연결하고 노를 젓게끔 하고 있었다.
뿐이랴.
“이것들, 이것들, 응응. 그래. 그냥 현금만 옮겨라. 다른 건 무거우니까.”
빠르게 현금만 챙기는 저 용의주도함까지.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안 그래도 여비가 많이 부족해진 상황이다. 청성표국이 닿는 데라면 언제든지 급전을 구할 수 있다만, 절강과 산동성은 아무래도 청성표국의 표행이 오지 않는 곳이니까.
“그렇다고 해적들 돈을 터냐…….”
흑도인 자신도 생각 못한 사실인데. 참.
능허는 제갈설아라도 도와줘야겠단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흑도만큼 거친 해적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더구나 바다 파도가 어디 거친가. 배에서 중심 잡기도 쉬운 일은 아니니…….
“으응?”
배가 이리저리 뒤얽힌 상황이라서 갑판 너머가 훤히 보였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능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애들 왜 얼굴이.”
시퍼래?
어떻게 하나도 빠짐없이 얼굴이 다 시퍼렇고, 피멍이 잔뜩 들었냐.
능허가 제갈설아를 빤히 바라보자, 제갈설아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노는 저어야 하니까, 팔다리를 자를 순 없잖아요!”
“…….”
“그래서 얼굴만 때려서 제압했죠.”
“아…….”
능허의 입에서 신음 같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틀린 말은 아닌데…….
보통 점혈을 짚어서 제압하지 않나? 나도 그렇게 했는데?
한편 그 말을 들은 천무백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훌륭하시오. 얼굴엔 가장 많은 통점이 몰려 있어서 대충 때려도 쉽게 제압당하지. 과연 제갈가의 두뇌는 어딜 가지 않는군.”
“핫, 아니에요.”
얼굴을 붉히고, 몸을 배배 꼬는 게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좋아하는 건지.
아니, 그 옆에서 온갖 피멍이 든 얼굴로 노를 젓는 해적들의 모습을 보니…….
천무백과 제갈설아의 모습에서 자신의 평범한 사고가 어딘가 뒤틀린 듯한 능허는, 그저 해적들에게 은근한 동정심이 들었다.
“쯧.”
“자자. 노를 저어라. 오늘 내로 산동에 도착해야지?”
“아니, 거기를 어떻게 하루만에…….”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지만.
“가능하지? 애들아?”
천무백이 살기를 내뿜자, 해적들은 오줌을 지리면서도 맹렬하게 노를 저었다.
“…….”
흑도보다 더한 자식 같으니라고.
* * *
송정상단의 행수는 입을 쩍 벌렸다.
해가 지고, 바다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밤바다는 위험하다.
그래서 밤에는 조심스럽게 이동해야하니, 속도가 더 느려지는 게 당연하다.
한데 지금 상단의 배는 아주 빨랐다. 볼을 스치는 세찬 바닷바람에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확실히 해적들이라 그런가. 밤눈이 밝네.”
이 밤 속에서도 익숙한 해로인 듯, 거침없이 노를 젓는다.
지칠 법도 한데, 반나절 내내 맹렬하게 노를 젓는다.
“해뜨기 전에 도착하자. 그래야 너희들도 쉬지. 응?”
“끄으으으으으.”
아스라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행수는 혀를 내둘렀다.
‘저게 당근이야, 채찍이야?’
벌써 반나절 동안 노를 저었으니, 아무리 튼튼한 해적이어도 팔이 빠질 고통이리라.
그런데도 해가 지기 전까지 도착하면 쉴 수 있다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라.
“대체 어떤 생각을 흉중에 품어야 해적들에게 배를 끌게 하는가.”
덕택에 상단의 배는 노도 안 젓고, 편하게 가고 있었다.
해적선 세 척이 밧줄로 배를 연결해 끌고 가고 있었으니까.
‘무슨 마차 끄는 말도 아니고.’
배를 끄는 인간들이라니.
조금이라도 느려지는가 싶으면, 여지없이 저 청년은 거침없이 해적들을 압박했다.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프지? 그러면 진짜로 뚝 떨어지면 어떨까?”
그러면서 칼을 스윽 꺼내는 것 보라.
해적들은 기겁하며 노를 미친 듯이 저었다. 그런 광경을 보며 행수는 말을 잃었다.
해적들이……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긴, 그래도 저쪽은 낫지. 저기는 무슨 사람 얼굴을…….’
얼굴 골격이 아예 뒤틀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멍이 든 얼굴들.
세상 순진한 얼굴의 아름다운 여성이 저리 만드는 걸 본 행수는 무언가 머릿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어쨌건 일정보다 일찍 도착하니 다행이다만…….”
불쑥 의문이 들었다.
저렇게 급하게 산동에 도착해야 하면, 굳이 이 배를 끌고 갈 필요가 있는가?
저들의 무력이라면 차라리 해적들의 배 하나를 훔쳐서, 그걸로 가는 게 훨씬 빠르지 않겠는가?
그런데 굳이 왜 이 배를 끌고…….
“아무래도 또 다른 해적들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그럴 겁니다. 행수.”
“아, 유 공(公), 안에서 쉬시지 않고 왜 나오셨습니까. 고초가 심하셨을 텐데요.”
“저 무림인들 말입니다.”
“네? 아. 저희가 고용한 무림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 무림인들 덕택에, 유공 같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선비를 구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요.”
“아니요, 고작 별 하잘것없는 명성의 선비일 뿐입니다. 저들에겐 저보다, 여러분들의 안위가 더 걱정됐을 겁니다.”
“네?”
유공은 50대의 장년인이었다. 해적선에 잡혀 있어서 고초가 심했는지,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행수가 깍듯한 이유는 유림(儒林)에서 꽤나 명성 높은 거유(巨儒)였으니까. 아무래도 한 지역의 명사와 친분이 있으면 상단 입장에서는 좋은 법이다.
당장 그의 제자 중에 입신양명해서 관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어디 한둘인가.
“저 무림인들은 그저 해적들의 배를 탈취해 빨리 산동으로 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 배를 끌고 간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지요.”
“이유요?”
“바로 또 다른 해적들이 출몰해서, 여기 사람들이 잡혀갈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아!”
“본인들의 시간이 급하고, 일이 급한데도, 여기 뱃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저 골치 아픈 일을 손수 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유공(公)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꼿꼿한 대나무로 유명하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사람 대하기 쉽지 않던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지자 행수는 깜짝 놀랐다.
“난 세상의 모든 무림인이, 인과 예는 저버린 그저 무도한 칼잡이로만 여겼습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건 유학이고, 그걸 바탕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한데 세상이 모두 무도한 무림인만 있는 건 아니더군요.”
“……음.”
“하물며 한낱 해적인데도, 목숨을 거두지 않는 저 자비까지. 이 보잘 것 없는 유자(儒子)가 큰 가르침을 받는 것 같습니다.”
행수는 생각했다.
‘저게 자비로운 건가?’
목숨은 살려 줬으니 자비로운 것이겠지만.
죽어라 노를 젓는 걸 보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보이기도 하고.’
어쨌건, 그냥 목적지에만 잘 도착하면 되겠지. 행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 * *
“아침은 산동에서 먹자는 말이 정말 개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능허가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절강에서 한동까지 하루 만에 도착하다니.
능허는 멍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니. 능허야. 넌 아직도 날 못 믿니.”
“……그냥 종교 하나 만드십쇼.”
“아서라. 천마도 아니고.”
“…….”
그냥 한 말인데, 진짜로 받아들이네.
“아, 이것들은 어떡할까요?”
“대충 부피 큰 거 아니면 잘 들고 다녀.”
“네. 뭐 당장 쓸모 있는 건 아니어도, 혹시 모르니까요.”
능허는 여러 보상을 넙죽 챙겼다.
천무백에게 구함 받은 인질들이 성의였다.
해적선에는 몇몇 인질이 잡혀 있었으니까.
“뭐, 과연 쓸모가 있을진 모르겠네요. 저 학자라는 분은 언젠가 광서성에 오면 꼭 찾아오라고, 표식을 줬습니다만. 중원의 최남단인 광서성까지 저희가 갈 일 있겠습니까.”
“혹시 모르지.”
“……끄응. 불안하니 그런 말은 하지 마십쇼. 저 송정상단의 표식이 차라리 도움이 될 겁니다. 적어도 여기 산동과 절강, 강소성에선 활발한 상단이니까요.”
송정상단의 행수도 고맙다고 표식을 전해줬다. 혹여 상단의 도움이 필요할 때. 지부에 가서 표식을 보여 주면 가능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어쨌건 챙겨주면 나쁘지 않을 거다.
천무백은 능허와 제갈설아를 대동하고 곧장 비수현으로 이동했다.
비수현까지 가서 육가 철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디 찾을 필요도 없이 멀리서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그야 어마어마했으니까.
“무슨 철방이…….”
웬만한 거대 장원보다 훨씬 큰 규모.
일하는 장인만 해도 무려 삼백 명이 넘는 거대한 철방이었다.
천무백 역시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에도 엄청난 명성을 가졌지만, 지금의 규모는 더했으니까.
제갈설아가 말을 더했다.
“정마대전 이후로, 규모가 커졌다고 들었어요. 정마대전 당시에 정파에서도 가장 큰 영웅들의 신병이기를 제작한 거로 유명했으니까요.”
무인들이 황금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약이고, 또 하나는 절세의 비급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신병이기다.
육가철방은 그런 신병이기를 만들어 내는 곳으로 유명했으니, 뭇 강호의 무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만큼.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곳이기도 하죠.”
워낙 주문이 많이 밀려 있을 뿐더러, 이제는 웬만한 무인이 아니고서야 병장기를 구매할 수도, 주문할 수도 없는 곳.
제갈설아가 천무백을 바라봤다.
아무리 명성이 높다고 한들, 과연 천무백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천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들어갑시다. 검후의 소개장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