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99화 (199/318)

<검신재생 199화>

199. 검신의 유지

천무백은 절강성을 떠나기 전에 조용히 검후를 찾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후가 자애로운 얼굴로 반겼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시려고요?”

“유검제께서 하는 모양을 보니, 떠난다는 말씀을 드리면, 잔치니 뭐니 떠들썩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딸아이를 구해 주고, 심지어 평생을 안고 가던 병마저 고쳐 줬는데…….”

“충분히 쉬었으니, 조용히 떠나려고 합니다.”

“소용이가 슬퍼할 텐데.”

“잘 다독여 주세요. 좋은 재능과 오성을 타고난 아이니까요.”

“물론이지요. 늘그막에 새로 생긴 손녀의 재롱을 보게 생겼으니, 기쁜 일입니다.”

이후 침묵이 주위를 맴돌았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밤벌레 우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퍼졌다.

애당초 검후를 만나러 온 건, 검후가 그에게 신호를 보내서다.

무언가 할 말이 있었으니 불렀을 터.

천무백은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검후의 얼굴이 다소 안타까운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존, 그 아이를 본 적이 있으신지요?”

생각지 못한 검존의 거론에 천무백은 잠시 멈칫했지만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사백(師伯)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그런가요. 하긴, 아무래도 검존 그 아이도 그대의 존재를 몰랐었나 보오. 검신께서 검존도 모르게 후인을 기르셨다니. 그러지 않았다면 검존이 그리도 힘든 길을 홀로 걷고 있지 않을 텐데.”

“힘든 길이요?”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에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일순 주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천무백의 번뜩이는 안광이 어둠을 꿰뚫고 검후에게 꽂혔다.

검후는 강렬한 안광에 짐짓 감탄하며 물었다.

“천 공자, 역천(逆天)을 아시오?”

“……사백께서 역천을 행했단 말씀입니까?”

검후가 슬픈 얼굴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존, 유백기의 나이는 작금의 검후보다 어리다.

하나 사람에게는 태어난 순간 주어지는 수명이 있다.

검후는 편안하게 주어진 장수를 누리고 있다.

모든 이가 검후처럼 오래 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무림인이 때때로 백 세를 가뿐히 넘기며 사는 건, 바로 어마어마한 내공으로 억지로 수명을 늘리는 것이다.

천무백의 공격에 단전을 잃자마자, 급격하게 노화되어 목내이처럼 바짝 말라 가던 독마가 그 예였다.

하늘이 내준 수명을 억지로 늘린 것이니, 그것이 곧 역천이다.

천무백의 눈초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삼 년 전, 보타문을 방문했던 검존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보였지요. 억지로 수명을 붙잡고 있음을.”

“…….”

“물어보니 이리 대답하더이다. 스승께서 남기신 유지를 수행하는 중이니, 저승으로 갈 수 없다고.”

“…….”

“혹시 천 공자께선, 검신의 유지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천무백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유지라, 그런 걸 남겼었나?

특별히 무언가 거창한 유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은 했었다.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검존이, 도망친 천마를 잡고 떠나셔야 하지 않겠냐고 붙잡기에 그리 말했었다.

스승 그만 부려 먹고, 천마는 네놈이 잡으라고.

‘백기 요놈…… 그 말이 무어라고, 역천까지 행하면서.’

천무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그런 녀석이었다.

고약하고,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스승의 변덕을 잘 받아 주는 아주 정직한 성품의 아이.

때론 어디서 경전을 수없이 읽은 학자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던 녀석.

스승의 말이라면 뭐든지 그저 묵묵하게, 고지식하다 할 정도로 따르던 착한 녀석.

‘쯧. 이럴 줄 알았으면, 실컷 놀고먹고 살다가 미련 없이 떠나라고 할 것 그랬구나.’

천무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지식한 제자가 아닌가.

그냥 죽기 전에 던진 말을 무슨 유지라고 받들고, 역천까지 행하며 새외를 돌아다니는가.

‘천마 놈의 흔적이 새외로 이어지는 거였나.’

천마가 새외에서 힘을 기르는 사이, 혈귀곡이 강호에서 천마가 돌아오는 날을 대비해 세력을 확장하고 준비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천무백은 검존이 천마를 쫓고 있기에, 지금껏 마도가 잠잠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곧 진실임이 틀림없다

‘무려 40년 동안, 내가 죽고 나서도 천마 놈이 움직이지 않고 평화가 유지됐다.’

당시 천마는 강했다.

창천검신이던 시절 천무백이 순수하게 감탄을 터뜨린 괴물이었다.

천무백도 그리 여길 정돈데, 다른 강호인들은 어쩌겠는가?

창천검신이 죽었단 소식이 전해진 직후 천마는 곧장 강호를 재침공했으리라.

아무리 마교의 세력이 처참하게 줄었다고 한들, 천마가 살아 있고 백도엔 창천검신이 없다면 능히 대계를 노려볼 만 하니까.

하나 아무일도 없었다. 백도무림이 과거의 성세를 회복하고 되찾는 동안.

‘백기 녀석…….’

모든 게 검존 덕분이었다.

창천검신의 모든 걸 이은 무인. 오히려 천마를 도주하게 만드는 실력자는 검존밖에 없었으니까.

‘덕택에 강호는 무사했던 거지.’

천무백은 검존 홀로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을지, 새삼 미안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역천의 과정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억지로 죽어 가는 근육을 재생시키고 유지한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육을 내공으로 붙잡는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처참하겠는가.

천무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찌 스승이 되어 제자 놈 혼자 힘들게 모든 일을 떠맡기랴.’

전생에 자신이 끝내지 못했으니, 이번 생에서 직접 끊어 내야 한다.

그래야 검존이 무슨 거창한 유지랍시고, 힘든 싸움을 그만두지 않겠는가.

천무백은 결심했다.

‘최대한 빨리, 내가 천마를 죽여야겠다.’

다만 지금은 무리다.

당장 창천검신 시절의 신위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아닌가.

물론 4년 만에 이만한 경지에 오른 것도 강호 역사상 전무하고, 직전 전생보다 더 빠른 속도였지만 천마를 잡기엔 무리였다.

당시 창천검신 때도 압도했지만, 매번 번번이 놓쳤던 천마다.

그때의 신위로도 승리는 하더라도 확실하게 죽이기엔 힘든 상대였다.

하물며 지금에 이르러선 어떻겠는가?

마도도 대전 당시 엄청난 피해를 보았는데도, 지금 서로 힘을 규합하며 암약하고 있다.

천마의 권위가 그대로란 사실이다. 마교가 처참하게 무너진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는 권위.

마도에선 권위는 곧 힘에서 나온다.

‘마도의 어떤 마인도 범접할 수 없는 고강함이겠지.’

그러니 지금의 천무백으로선 무리다. 비관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냉철한 판단이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다오. 조금만.’

과거의 신위를 되찾는다면, 그리고 종국에는 검극(劍極)에 이른다면…….

천무백이 대답 없이 한참을 굳은 얼굴로 침묵하자, 검후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떤 유지인지, 외인인 이 늙은이는 알 수 없는 것인지요?”

그 물음에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젓고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천마의 죽음, 곧 마도의 절멸(絶滅)입니다.”

천무백의 눈이 새하얗게 번뜩였다.

* * *

“뭐야. 아저씨도 같이 가요?”

“…….”

능허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입만 뻐끔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갈설아는 사람됨이 선하다. 흑도에서 살아온 능허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느 사람이나 존중할 줄 알았고, 명문 세가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거만한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근데 나한테는 왜 이래?’

눈을 가늘게 뜨고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제갈설아를 보라.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능허가 억울하다는 듯이 하소연했다.

“아니, 당연히 주군과 나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데.”

“능허야. 그 말은 조금 듣기 징그러운데.”

“…….”

믿었던 천무백까지 그리 말하자, 능허는 적잖은 배신감을 느꼈다.

제갈설아의 뚱한 눈빛을 보니, 마치 자신이 눈치 없이 끼어든 주책없는 놈 같지 않은가.

‘허…… 참.’

아니, 누군 같이 다니고 싶어서 가나. 저 인간이 놔주질 않는데.

그리고 정작 갑자기 같이 간다고 끼어든 사람이 누군데?

그런 억울함이 불쑥 들어 제갈설아를 노려봤지만, 그 고양이 같은 눈매에 능허는 저도 모르게 힘이 쭉 빠졌다.

‘내가 저 어린 핏덩이하고 무슨 신경전을 펼치냐…….’

한숨을 푹 내쉬던 그에게 천무백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말했다.

“우선 장인부터 만나볼 생각이다.”

“검후께서 소개해 준 장인 말씀이시죠?”

“그래. 육가철방이다.”

천무백의 말에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육가철방이라면, 그 제갈선 그 양반이…… 아니 흠흠, 태상가주께서 이미 고물 검 고쳐달라고 의뢰했다가 퇴짜 맞은 곳 아닙니까? 못 고친다고?”

육가철방.

현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철방이다.

수많은 무림인이 육가철방의 무구를 얻기를 원했지만, 황실에도 납품을 할 정도라 웬만한 신분과 명성으로는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

“검후가 소개해 준 사람은 은퇴한 전대 장인이다. 듣자 하니 망치 들 힘도 없다지만, 검후께서 그것도 모르고 소개해 줬을 리는 없을 테니. 우선 만나 봐야겠지.”

“잠시만요. 육가철방이라면, 비주현에 있으니…… 배타고 곧장 일조현의 항구로 가면 됩니다. 거기서 수운을 이용하면 며칠 걸리지도 않겠네요.”

“…….”

“……왜 그리 빤히 쳐다보십니까?”

“어째 지도를 보지도 않고 경로가 술술 나오네?”

“그야 제가 산동 출신이니까요.”

천무백의 눈이 동그래졌다.

능허가 말했던 경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경로와 똑같았다.

자신이야 한때 산동검호로 살며 산동성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해서 그렇다고 한들.

외지인이 타지로 갈 때 지도도 보지 않고 저리 말할 수는 없었다.

한데 알고 보니 산동성이 고향이었다?

“하남이 고향 아니었냐?”

“누가 흑도 생활을 제 고향에서 합니까.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흘러 다니다 정착한 거죠. 산동이 고향입니다.”

대수롭지 않아 하는 어조에 천무백은 능허를 잠시 보다 말했다.

“그럼 내가 장인을 만나는 동안 본가에 좀 들리지?”

순간이었다.

천무백은 능허의 표정이 찰나 동안 딱딱하게 굳는 걸 놓치지 않았다. 곧장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변했지만, 천무백의 눈썰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됐소, 가족은 무슨. 흑도에게 가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저기 흐르다 흘러 하남에서 흑도 생활 시작한 하류 인생인데.”

목소리의 어조가 평소보다 낮았다

하지만 천무백은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여하튼, 제가 배편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능허는 그리 말하며 먼저 움직였다.

* * *

“와! 확실히 장강하고는 달라요, 바람, 냄새, 파도까지.”

바다 바람에 머리가 휘날리며 천연덕스럽게 수평선을 바라보는 제갈설아의 모습.

천하의 명문인 제갈세가라고 해도, 내륙에 위치해 있는 만큼 바다를 겪어 보는 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때문일까.

제갈설아의 얼굴엔 붉은 파문이 계속해서 요동쳤는데, 기분 좋은 흥분이 가득했다.

천무백은 그 모습이 지금껏 보여 준 것과는 달리 순수한 어린애 같기도 해서 그저 가만히 바라봤다.

“…….”

“예쁘긴 하죠?”

능허가 옆에서 불쑥 그런 말을 하자, 천무백은 시선을 떼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왜 이런 배를 구했어?”

“아니, 발품 팔아서 배 구해 왔더니. 뭔 소립니까. 답지 않게 부끄럽다고 말 돌립니까? 이런 큰 배가 어디 있다고. 바다로 나갈 땐 무조건 큰 배가 좋습니다. 무조건. 장강도 장강이지만, 이 바다의 파도는 큰 배 아니면 어휴, 말도 마십쇼.”

능허가 구한 배는 무척 큰 배였다.

절강과 산동성을 오가는 정기배편이었다. 큰 상단에서 운영하는 만큼 여러 상품을 실을 수 있게 배는 상당히 컸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유람선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배의 장점은 능허가 말한 대로 바다에서도 안정적이란 점. 하나 단점으로는.

“너무 느려.”

“육로로 가는 것보단 빠릅니다.”

“쾌속선 탔으면 이미 도착했겠다.”

능허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출발한 지 한 시진도 안 지났는데…….”

세상 어떤 쾌속선이 한 시진만에 도착해?

느리고 정적이라서, 바다를 구경하는 것도 잠깐이지.

갑갑함이 절로 생길 정도였다. 배의 일부 승객들은 마작판을 벌이기도 할 정도였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 노를 저을 수밖에 없고, 사람이 파도를 뚫고 노를 저으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능허가 그리 말하며 자신이 구해 온 배편을 옹호하는 순간.

“……지루하진 않겠구나.”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그 말에 능허가 휙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 황색의 돛이 불쑥 솟구쳤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바다니까 수적은 아니고…….”

“썅. 절강 바다의 해적이면 귀찮은데.”

능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과 달리, 천무백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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