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98화 (198/318)

<검신재생 198화>

198. 정말 빨갛다.

천무백이 복건과 절강에서 강호를 주유하는 동안.

정의맹은 착실하게 뼈대를 완성했다.

소림과 무당이 참여하는 점만으로도 정의맹은 제대로 된 궤도에 올랐다.

특히 모순적이지만 흑회의 창설이 결정적이었다.

“혈귀곡 놈들도 문제지만, 흑도가 뭉쳤어요.”

“태룡방의 독고패는 무서운 자입니다. 그놈의 손아귀에 녹림과 장강마저 들어갔습니다.”

“하왕이 회주라지만, 아마 흑회를 지배하는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독고패일 겁니다.”

“비단 마인들을 상대하는 것뿐 아니라, 힘을 모은 흑회가 어디로 진출할지 염려스럽군요.”

“그러니 정의맹이 더 뭉쳐야 합니다.”

정의맹의 창설목적은 딱 하나였다.

준동하는 마도에 대항하는 정파.

정마대전 당시 싸웠던 참전 무인들이나, 그들의 후인들이 가장 먼저 모여든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하나 흑회의 창설로 강호에 또 다른 적이 나타난 셈.

특히 흑도의 세력이 큰 지방의 정파들은 큰 경각심을 가졌다.

흑도와 갈등을 빚던 정파들은 정의맹의 등장에 반색했다.

“소림과 무당이 참여한다고?”

“맹주는 그 유명한 투신 곽용이라고!”

“그 원수같은 화산과 종남도 맹에 가입했다고?”

“제갈세가도 참여했다는데?”

물론 마인들과 대적하는 건 무서운 일이지만, 적어도 당장 코앞에 다가온 흑도의 위험으로부터 사문과 가문을 지키려면 더 큰 힘이 필요했으니까.

정의맹에 가입하고자 하는 문파와 사문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러다 보니 예상보다 정의맹의 규모는 가파르게 성장하고 확장됐다.

“우선 조직을 정립하는 게 먼저일 거 같습니다.”

두 팔을 거둬 붙이고 나선 건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여강이었다.

정의맹의 총군사가 된 그는 거침없이 조직을 정비했다.

“세가의 일로 바쁘시지 않겠습니까? 가주께서 세가를 비우시면…….”

그런 걱정도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지만, 제갈여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지키고 계시는데, 오히려 마인들이 쳐들어오면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머리통을 깨부술 겁니다.”

제갈여강은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비록 제갈선에는 못 미친다지만, 엄연히 그도 제갈가의 핏줄.

정의맹은 빠르게 정비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너무 많은 무인이 모여들어 잡음이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아주 젊은 무인들이.

“작은 사문이나, 한미한 가문 출신의 젊은 무인들이 많습니다.”

“하나같이 협과 의를 추구하는 좋은 심정을 가진 친구들이에요.”

“문제는 의기만 강할 뿐, 아직 어리다는 점입니다.”

그저 뜨거운 의기에 이끌려서.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라던 정마대전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

협과 의,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 그 신념 하나로 몸을 내던지는 청년 무인들.

이곳에 모인 정의맹의 수뇌부들은 의기 넘치는 청년들이 많단 사실에 감동하였지만,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이들과 현 정의맹 수뇌부와 괴리감이 심하다는 것이다.

정마대전을 직간접적으로 느낀 세대가 바로 현 정의맹의 수뇌부다.

이들은 마인들에 대해 느끼고 경험한 게 많다.

천마를 중심으로 강호를 침공하던 그때의 공포를 절대 잊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히 신중에 신중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행태가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는 꽤 답답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혈기가 왕성한 친구들이니까요.”

“의기는 넘치나, 때론 그것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정마대전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동경만 품었어요. 그때의 끔찍한 참상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고요.”

우습게도 정의맹 내부에 세대갈등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렇다고 해서 배분과 나이로 억누를 수도 없다. 이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맹에 가입하는 문파와 가문보단, 개인적으로 몸을 의탁하는 젊은 무인들의 비중이 컸다.

“이들은 강호의 미래요, 백도의 미래가 될 청년들입니다.”

“이들을 잘 다독여서 정의맹을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청년 무인들을 규합하고 다독이고, 이끌 만한 인사가 필요해요.”

수뇌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장 정의맹에 모인 인사만 해도 화려했다.

소림의 나한각주 무소선사, 화산 수호검 청현진인, 종남풍검 전현, 개방의 섬서분타주 육걸개, 무당파 대장로 유청,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여강, 그리고 맹주 투신 곽용.

이들이 현 정의맹의 수뇌부였다.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청년 무인들을 규합하기엔 적합한 인사로는 아니다.

“투귀는 어떻습니까?”

“투신의 아들이기도 하고, 실력도 후기지수 중 제일로 치지 않습니까?”

“투귀 곽천후, 그 친구는 지금 어딨습니까?”

“음. 청성표국에 있다는군요.”

“청성표국이요? 거긴 왜? 천룡검협의 표국 아닙니까?”

“객원표사로 일한답니다.”

“……왜요?”

“모르지요. 뭐 듣자 하니 거기 천룡검협의 누이에게 홀딱 빠졌다는 말도 있는데,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투귀라는 명성에, 그 투신의 아들인데요.”

“크흠흠!”

곽용이 헛기침하며 대화를 끊었다.

“동도들께서 내 부족한 자식놈을 크게 봐주는 건 고맙지만, 그 녀석으론 부족하오.”

곽용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제 아들이 젊은 무사들을 지휘하는 직위에 오르면, 사실상 정의맹을 장악하는 거나 다름 없다. 맹주는 곽용이고, 아들은 청년무사들을 휘어잡는 것이니까. 그런데도 곽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싸울 줄만 아는 무식한 놈이지. 어린 애송이들을 규합하고 이끌 만한 그릇이 아니오.”

아비이기에 내릴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냉철한 평가였다.

곽용이 그리 반대하자 다른 인물들이 튀어나왔다.

가령 이 자리에 있는 종남의 전현과 화산의 국보까지 거론됐다.

“저는 그 역할을 감당할 그릇이 안됩니다.”

전현은 본인이 맡기 어려운 역할이라며 손을 저었고, 국보 역시 조금은 아쉽다는 인물평이었다.

“남궁세가의 대공자는 어떻습니까?”

“훌륭한 사람이죠.”

그다음에 튀어나온 건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 평가받는 남궁세가의 대공자.

특히 일전에 안휘성에서 남궁세가와 협력해 비다라를 쫓던 경험이 있는 화산의 청현진인이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정식으로 정의맹에 가입하진 않았으니 문제지요.”

“안휘의 패자(霸者)요, 그 대단한 검성이 남궁세가의 가주니까요.”

“자신감이 있을 겁니다. 그는 안휘성을 휘어잡아 혈귀곡을 쳐 낼 자신이 있을 거예요.”

제갈여강은 미간을 좁혔다.

천하십대고수.

그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검성.

혹자는 어쩌면 그가 창천검신의 제자인 검존에 비견되는 고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 남궁세가의 대공자도 어렵겠고…….”

“이거 참. 저 혈기 넘치는 어린 친구들을 그저 억누를 수도 없고.”

“오히려 우리에게 반발감만 더 심해져서 갈등이 생기겠죠.”

“잠깐만요. 딱 한 명 있지 않습니까?”

“……?”

청형진인의 말에 모든 이의 이목이 쏠렸다.

“저 젊은 무인들이 사문과 가문을 저버리고 그저 혈혈단신으로 마인들과 싸우겠단 의기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그야…….”

“아!”

“천룡검협!”

그랬다.

이토록 혈기 넘치는 젊은 무인들이 모여드는 이유.

“그야말로 상징이니까요. 지금 강호에 나타난 상징.”

무소선사의 묵직한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맞다. 이곳에 모여든 젊은 무인들에게 천룡검협은 그런 존재였다.

홀로 혜성처럼 나타나, 모든 거대 문파도 손대지 못하던 마인들을 추적하고 섬멸하는.

오로지 칼 하나 낀 채로 강호를 주유하며 협의를 이뤄내는.

거대한 사문도, 가문도 아닌, 작은 표국이란 배경에서 만들어 낸 신화나 다름없다.

“그러면…….”

제갈여강이 조금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천 공자를 모셔옵시다.”

“천 공자는 하는 일이 있어 바쁠 텐데…….”

“이번 일도 혈귀곡에 대항하는 일. 천공자라면 거절치 않을 겁니다. 애당초 우리가 이곳에 모여든 이유가, 다 천 공자의 행보 덕분 아닙니까?”

제갈여강이 그리 정리하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그랬으니까.

특히 제갈여강은 확신했다. 천무백만이 지금 가능하다고.

그간 개방을 통해 정의맹은 혈귀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는데, 오히려 혈귀곡보단 천무백의 행보가 더 많이, 더 자세하게 들어왔다.

천무백이 의뭉스럽다고 여기는 제갈여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의맹의 상징이자, 백도 무림의 상징으로서 말이다.

“그러면 개방을 통해 연락합시다.”

그렇게 일이 정리됐다.

……라고 제갈여강은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제가 갈게요.”

“……왜?”

얼마 전에 정의맹에 온 제갈설아의 당돌함에 제갈여강은 말을 잃었다.

“그야 중요한 거잖아요?”

“중요하긴 하다만…… 그냥 얘기만 전하는 거다. 개방을 통해도 문제없어.”

“그저 턱 하니 말만 건네면 천 공자님이 수락할 거 같아요?”

“천 공자님?”

왠지 제갈여강은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칭에서 친근감이 느껴져서다.

제갈설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거절할 수도 있어요. 워낙 하는 일이 중요하고 바쁘시니까요.”

“거절할 수 있다? 그러면?”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가야죠.”

“……그게 너라고?”

“그럼요.”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데…….

제갈여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천무백에게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다. 그저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 협과 의만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한 손익을 계산하고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 제갈설아의 말대로 거부할 수도 있으니, 설득할 필요가 있다.

설득하려면 그만한 무게감이 있는 인사거나, 적어도 안면이 깊은 인물이어야 하니…….

“으음. 안 된다.”

“왜요, 아빠!”

“쓰읍. 안 돼.”

“흥. 이미 맹주님에게 허락받았는데요?”

“뭐?”

제갈여강이 눈을 부릅떴다. 제갈설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니 허락도 받았어요. 다른 어른분들도 허락했고요. 그럼 다녀올게요.”

“아니…….”

제갈여강의 고개가 빳빳해졌다.

* * *

“……그래서 오게 된 거다. 이 뜻이오?”

천무백은 생글거리면서 웃는 제갈설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

어조가 높은 게,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얼굴 너머로 초록빛과 붉은빛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

상당히 흥이 난 상태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그러니까 정의맹의 젊은 무인들을 다뤄 달라, 이 얘기지요?”

“네. 맞아요.”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닌데…….”

천무백 역시 젊은 무인들이 의기에만 휩쓸려 죽어 나가는 건 탐탁지 않다.

“다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우선 그 일을 처리하고 직접 중경으로 가겠소.”

“들었어요. 산동으로 간다고요?”

“어떻게 아셨소?”

“검후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뭐, 여러모로 할 일이 있어서. 정의맹주께 내가 일만 처리하고 가겠다 전해주시오.”

“…….”

제갈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입을 오물거리는 것이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제갈설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런 거 전하는 건 개방을 통하면 알려지는 일이라서, 굳이 제가 안 돌아가도…….”

“……?”

“그러니까 그으…….”

붉어지는 얼굴.

아니, 얼굴 너머로 붉은빛이 번지는 게 아니라, 진짜로 얼굴에 홍조가 띄워지고 있었다.

천무백이 빤히 쳐다보자 제갈설아는 우물쭈물하며 오히려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쳐다보던 천무백은 갑자기 뇌리에 스치는 생각에 물었다.

“아, 소저는 혹시 유학(儒學)에도 밝으시오?”

“유학이요? 그럼요. 제갈세가는 중원의 모든 학문을 배우고 익히니까요.”

천무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말에 제갈설아는 의문이 불쑥 솟구쳤지만, 이어지는 천무백의 말에 의문은 저 멀리 날아갔다.

“그럼, 같이 산동에 다녀오겠소? 소저?”

“……!”

천무백의 시야에 제갈설아의 얼굴이 담겼다.

‘……얼굴이 붉은 거야, 저 감정이 붉은 거야?’

정말 빨갛다.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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