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97화>
197. 상인이셨죠?
능허는 천무백을 빤히 쳐다봤다.
굳이 얼굴 너머로 보이는 색을 엿보지 않아도, 시선에 담긴 감정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탄인지, 어처구니없다든지, 그런 복합적인 감정.
천무백이 퉁명스레 말했다.
“뭐냐. 그 눈빛은.”
“주군.”
“왜.”
“솔직히 말해 보십쇼. 전생에 검만 잡았습니까?”
“아침부터 뜨신 밥 먹고 헛소리를 하냐.”
천무백의 한심하다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능허는 여전히 천무백을 응시했다.
“검만 잡았을 리가 없어. 그치. 상인도 했을 거야. 무슨 여불위도 아니고, 그렇지 않고서야 떡하니 전설 속의 금속이라고만 알던 흑운철을 받아냅니까?”
“고작 조그마한 한 덩어리다.”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아마 황궁에도 없을 겁니다. 그냥 운철도 천하 장인들과 무인들이 환장을 하는 금속인데, 흑운철이라뇨! 전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걸로 무기를 만들 수나 있습니까?”
“간장과 막야가 만들어질 때 쓰인 재료 중에 흑운철이 조금 들어갔지.”
“간장과 막야요? 춘추시대의 간장, 막야 말입니까? 그걸 어떻게 압니까? 문헌에만 남아있지. 전해져 오는 건 없지 않수? 그냥 전설 아닙니까?”
“한때 써봤으니까 알지. 꽤 쓸 만했다.”
“…….”
능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천무백의 대수롭지 않은 투의 말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침묵하던 능허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씨. 진짜 이걸 믿고 있는 내가 호구 같은데. 거 참…….”
“믿든 말든 자유라고 했잖아?”
“끄응.”
능허가 침음을 삼켰다.
사실 누가 믿겠는가. 수많은 전생을 살아온 환생자란 사실을.
더구나 전생들이 하나같이 강호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무인이다.
‘쓰읍. 그때 분위기는 진짜 그랬는데.’
능허는 천무백을 흘깃 쳐다봤다. 평소와는 차원이 달랐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됐다.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강렬한 웅변(雄辯).
도저히 범접할 수도, 쳐다볼 수도, 숨쉬기도 어려운 압박감이 주위를 완전히 짓눌렀다.
만일 품에 안았던 소용의 선기가 아니었다면, 능허는 밖에서 지켜보는 도중에 실신했을 것이다.
그건 어마어마한 내력으로 내리찍는 압박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람이 그런 무게감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능허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간 천무백의 곁을 따라다니며 숱한 고수를 목전에서 마주했다.
소림 방장, 화산 장문인, 무당 장문인, 투신 곽용, 태상가주 제갈선, 그리고 검후까지.
그 외에도 흑도의 독고패와 하왕과 거력왕들도.
뿐인가. 혈귀곡의 어마어마한 고수들도 마주했다.
그들이 내뿜는 기세와 무게와는 차원이 달랐다.
단지 천무백이 더 강해서? 천무백이 더 뛰어나서? 천무백이 가진 내력이 더 농밀하고 진해서인가?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능허는 그리 느꼈다.
절대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무게감.
그것은 수없이 쌓여 온 세월이란 이름의 무게였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한 세월이 겹치고 또 겹쳐져서 이뤄지는 무게.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통함은 능허의 전신을 관통했다.
‘검의 끝자락을 보기 위해 삶을 반복한다고?’
믿기 어렵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그날 봤던 천무백의 모습은 대체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한참 생각하던 능허는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라이 썅! 모르겠다. 주군, 그냥 이전처럼 모시겠수다.”
“……또 왜 이래?”
황당하다는 천무백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능허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전생이고 나발이고, 다 모르겠고. 어쨌건 주군은 천무백이고, 나는 싫든 좋든 같이 따라다니고 있고. 뭐 변할 게 있겠수. 그냥 전 원래대로 하렵니다.”
“원래대로?”
“싸가지 없이요.”
천무백이 짐짓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이야. 우리 능허. 대단해. 내 생각보다 훨씬 자기객관화가 이토록 잘되어 있다니. 넌 볼 때마다 새롭네.”
“제가 늘 생각보다 뭐든지 잘했죠.”
“그래.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거 보니, 나도 새삼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조롱인지 칭찬인지 모호한 말에 능허는 여전히 태연했다.
천무백은 마음 한편으로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끙. 잘못하면 심마가 왔을지도 몰랐겠군.’
독마를 죽일 때를 떠올리면, 천무백은 속에 있는 울분을 토하는 심정이었다.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삶을 거듭하며 쌓여 온 화가 심마처럼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필 내 진실을 알게 된 놈이 이놈일 줄이야.’
만일 언젠가.
심마를 벗어나기 위해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면.
아무래도 천유하나 천문경, 즉 가족에게 털어놨겠지.
전생을 거듭하는 비밀은 함부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하필 능허라니.
“염병할.”
“왜 갑자기 욕입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다.”
“어처구니가 없는 건 저죠, 주군. 검후에게 흑운철을 뺐었고, 뿐입니까? 산동에 있다는 은거한 장인도 소개받았다면서요?”
“그게 뭐? 흑운철을 줬으면 당연히 제련할 줄 아는 장인도 소개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냐?”
“이야. 오래 살면 뻔뻔해진다더니. 새삼 옛말 틀린 게 없네요.”
“주제 모르고 기어오르다가 제 명에 못 산다는 옛말도 있는데 확인해 볼래?”
“아, 그건 그렇고 종리홍하곤 뭔 얘기 했습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모습에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처음만 해도 적당히 겁주면 꼬리를 말고 숙이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머리가 굵어졌다.
“그래도 그렇지. 제가 액면가로는 나이가 훨씬 많은데 머리가 굵어졌다는 건 좀…….”
“됐다. 너랑 하릴없이 말장난하는 것도 지친다. 다음 성물의 행방을 캐 봤다.”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순순히 말해 준답니까?”
“말 안 해 주면 어쩌겠어? 내 말 한마디면 검후한테 목이 잘릴 텐데.”
“…….”
능허가 입을 쩍 벌리곤 천무백을 멍하니 쳐다봤다. 감탄인지, 비아냥인지 헷갈리는 어조가 흘러나왔다.
“이야……. 그 와중에 또 약점을.”
“약점은 무슨, 나 아니었으면 진즉 사문 이름에 똥칠했을 상황인데.”
능허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결국엔 종리홍은 추적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없었다.
유검제의 절강무림뿐 아니라 검후도 쫓아왔었고, 저 멀리 독마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정체가 발각되는 건 막을 수 없던 일이다. 그러니 천무백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게 틀린 말은 아니다.
“자고로 강호에서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하는 법. 그저 다음 성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는 걸로 은혜를 갚으면 싼 거 아니냐?”
……왜 은혜를 강제로 갚게 하는데?
능허는 혀를 찼다. 새삼 종리홍이 좀 불쌍했다.
“……솔직히 말해 보쇼. 상인으로 몇 번 사셨죠?”
“검만 잡았다.”
“하긴. 검 들이대면서 흥정하면, 천하제일의 흥정법이지. 이해했소. 그것이 거상의 비법이라는 거.”
빠악.
능허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뒤통수를 세차게 후린 뒤 천무백은 손을 매만졌다.
“네가 가끔 내 신체가 이성보다 먼저 움직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주는 중요한 일을 해 주는구나.”
“끄으으응. 죄송합니다.”
끝내 한 대 맞고 나서야 능허는 조용해졌다.
“그 어딨답니까. 성물.”
“산동.”
“산동이요? 어라?”
능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다행이네요. 그거 부러진 검 제대로 고치려면 산동으로 가서 장인을 만나야 하는데. 겸사겸사 가면 되겠네요.”
“그래.”
“그, 이번 일만 처리하고 하남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일단은.”
능허의 입에 별안간 미소가 드리워졌다.
왜 그런지 알기에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어여 처리하고 가자. 애 나올 때 아비가 봐줘야지.”
“흐흐흐흐. 아무래도 사내아이가 나오는 게 좋겠죠?”
“그치. 너 닮은 딸아이 나오면 그건 좀 애가 불쌍하니까.”
“…….”
다름이 아니라 능허가 곧 아비가 될 예정이니, 그래도 그땐 강호를 주유하는 건 멈추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독마를 잡았지만, 점조직이니. 별수 없고.’
마음 같아선 혈귀곡의 중심을 쳐서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 절강성의 모든 혈귀곡을 지옥으로 인도하지 않았는가.
하남, 섬서, 호북, 중경, 그리고 절강까지.
무려 다섯 개 성의 혈귀곡을 전멸시켰다.
심지어 최상위 간부인 오성과 육성마저 호북에서 처참히 죽였다.
혈귀곡 소속이 아닌 독마도 죽였다.
지금 혈귀곡은 최소한 절반으로 세력이 쪼그라든 게 분명했다.
더구나 비다라의 개선책을 만들 수 있는 독마가 죽었으니, 당분간 눈에 띄지 않을 터.
무리하게 추적하는 것보단, 하남으로 돌아가 잠깐의 휴식기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차차 정리할 것도 있고.’
검후와 겨루면서 느낀 게 꽤 많았다.
‘검후와 싸워서 호각.’
그것이 천무백의 생각이었다.
하나…….
‘패천성의 흉성이 터진 검후와 전력을 다한다면?’
글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일 거다.
창천검신의 신위라면, 죽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을 터.
천무백이 바라보는 경지는 그보다 더 높은 곳.
수많은 전생을 거듭해도 가보지 못한 검극(劍極)이기에.
아직도 더 욕심을 부려야 한다.
‘성물을 구한 뒤 생각해 봐야 한다.’
종리홍에게 듣기론, 검선 여동빈이 오성물, 정확히는 네 개의 성물과 신녀의 제례를 받으며 우화등선했다는 전설이 종남에 전해져 온다고 한다.
‘어쩌면 여동빈이가 우화등선한 결정적 이유가 성물에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건 성물의 힘으로 천무백 역시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으니, 당연히 찾아야 하는 일.
“마인놈들도 이젠 모습을 숨기는데 급급할 테니, 산동으로 가도 싸울 일은 없을 거다. 검 고치고, 성물 찾고, 곧장 하남으로 간다.”
“흐흐. 알겠습니다.”
천무백은 슬슬 움직이기로 했다.
단전이 다쳐 정양 도중이었지만, 그리 큰 내상은 아니었다.
사실 이미 진즉 털어내고 일어난 지 오래였다.
다만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떠나지 않았다.
“흑회는 어때?”
“이번 일 실패로 회주의 입지가 좀 좁아졌나 봅니다.”
절강성이 아무리 복건과 가깝다고 해도, 지도에서나 붙어있지 실제로 연락을 오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더구나 내부의 자세한 소식을 알려면 더더욱.
한데 천무백은 절강에 앉아 손바닥 들여다보듯 흑회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곡지흠은 이 기회에 확실하게 휘어잡겠다고 하는데……, 따로 명 안 내려도 될까요?”
“됐다. 혈혈단신으로 하오문을 휘어잡은 놈이다. 왕전유 구워삶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 딱히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아서 할 거다.”
곡지흠이 흑회의 감찰당주로 있어서 천무백은 훤히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에 왕전유가 직접 선단을 이끌고 나갔음에도 패퇴했다.
그것도 검후에게 된통 당해 크게 다쳤다.
당연히 회주로서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입지가 좁아진 왕전유는 수적뿐 아니라 다른 세력을 포섭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흑회에서 감찰당주라는 요직에 천무백을 대리하고 있는 곡지흠을 포섭해야 할 터.
곡지흠은 이 같은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흑회를 충분히 장악하리라.
“아, 독고패한테는 그것들 보내.”
“고독 말입니까?”
능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독마를 죽이고 그의 품을 뒤져 얻은 고독들.
“어차피 내가 쓸데도 없고.”
“독고패 그놈이 이걸 악용할 텐데요?”
“하라고 해. 그걸 바라는 거니까.”
“네?”
천무백은 담담하게 말했다.
“고독 따위로 얻는 거짓 충성이다. 그게 언제까지 갈 거 같냐?”
“……!”
“이미 고독으로 효과를 제대로 본 놈이야. 계속 쓸 수밖에 없지. 근데 그게 목을 옥죄는 올가미가 될 거다.”
“그게요?”
“너 흑도잖냐. 생각해 봐.”
“……아!”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능허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도에겐 의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죠.”
물론 회의적인 사람은, 아니 절대다수의 흑도들에겐 말로만 의리지 실제로 의리에 살고 죽는 경향은 거의 없다.
하나 태룡방이라는 거대한 흑도문파를 꾸려 낸 데에는 독고패가 형제라는 이름으로 수하들을 규합했던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
한데 그런 독고패가 고독을 이용해 억지로 충성을 받아내고 있다면?
뿐이겠는가.
“의심하겠죠. 혹시 나한테도 고독을 심어놓은 거 아닌가?”
“그래. 의리는 깨지지. 아무리 상징에 불과하다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위험한 법이야. 큰형님을 자처하는 독고패가 고독을 사용했다? 흑도는 그대로 깨진다.”
“…….”
능허는 침묵했다.
“흑도가 뭉치면 골치 아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찢어지고 분열되는 것이 좋아.”
독고패는 평생을 흑도의 통합을 바랐다.
하나 그런 흑도가 찢어지는 것이 보이게 된다면, 악착같이 통합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터.
그러면 고독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다른 흑도들의 눈에도 드러날 게 분명했다.
그것이 곧.
“흑회의 해체군요…….”
능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앉은 자리에서 흑도연합체라는 흑회의 해체를 운운하다니. 그리고 그것이 가능성이 꽤 크다는 사실에 능허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다행히도 밖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환기됐다.
“천 공자, 밖에 손님이 왔습니다.”
다름 아닌 유검제가 직접 나타나 말해줬다.
하인을 시킨 것도 아니라 본인이.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 유검제가 여기까지 행차하면서 알릴 정도로?
“정의맹에서 사자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