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96화>
196. 강호의 도리는 어디 갔나?
“나 때는 말이지. 사과하려면 응? 무언가 손에 딱 쥐여 주고 미안하다고 하는 게 강호의 도리였는데. 언제 이렇게 도리가 땅에 떨어졌는지.”
허공에 시선을 두고 중얼중얼 되지만,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검후는 입을 쩍 벌렸다.
‘나 때가 언젠데……?’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이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오 분지 일이나 살았을까 싶은 얼굴에서 저런 말을 듣다니.
“천하제일의 검후가 후배와 비무전을 하다가, 단전을 부숴 버릴 뻔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래 놓고 사과랍시고 말 한마디로 입 슥 닫으면, 호사가들이 뭐라 떠들려나.”
“처, 천 공자. 일단 진정하시지요.”
“네? 아, 들렸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혼잣말하는 게 습관이다 보니.”
“…….”
혼잣말이라고? 아니, 당사자가 떡하니 앞에 있는데 혼잣말을 한다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얘기인지, 조금만 생각할 줄 안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허나 알아차린다고 해서, 완전히 머릿속에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검후는 잠깐 넋을 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
‘나, 지금 공갈 협박당하고 있는 건가?’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천하의 검후가 공갈협박을 당하고 있다니.
이건…….
‘내 아무리 주산열도에 있었다고 해도, 듣지 못했던 명성이 아니다.’
거의 새외로 치부되는 곳이 바로 보타문이 있는 주산열도다.
중원을 벗어나 바다 한가운데에 모여 있는 열도가 아닌가.
그곳까지도 천무백의 명성은 자자하게 울렸다. 그만큼 강호에서 천무백이 위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그런데 검후가 관련된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끄응…….’
설마 천하의 검후가 그럴 리 있겠냐는 여론이 생기겠지만.
세상에는 검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기억하는 과거의 인물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
가령 화산파 장문인이나, 제갈세가 태상가주 제갈선, 투신 곽용……. 그들이 말 한마디만 별 생각없이 떠들기라도 한다면.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
이제는 과거 속에 숨겨진 그 악명이 다시 나온다면.
보타문의 명성까지 같이 추락하리라.
검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구나 옆에는 소용이가 허리춤에 팔을 올린 채 똑똑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제대로 사과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또랑또랑한 눈망울이다.
선기가 빠져나가도, 영이 그 누구보다 깨끗한 게 소용인지라.
천하의 검후도 흠칫할 정도로 따가운 시선이다.
“그래.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소, 천 공자.”
“예. 예.”
천무백은 눈을 가늘게 뜨며 턱 끝으로 살짝 끄덕였다.
“…….”
특별히 감정이 풍부한 표정이 아니다. 그저 무심한 듯, 가늘게 뜬 눈. 마치 그게 설마 전부냐, 라는 말을 눈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검후는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불쑥 치솟는 걸 느꼈다.
‘내 마음속의 흉성이 사실은 위기를 느껴서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불쑥 치미는 뜨거운 무언가를 애써 불경을 외우며 가라앉힌 검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후배를 다치게 했으니, 어찌 말로만 사과를 드리리까.”
“…….”
“그 철신고검, 여전히 위력적이나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반 토막 난 철신고검으로 둘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
“운철로 만든 검이었다고 들었어요. 검신께서도 검을 정비하고 싶어도, 재료를 구하기 힘들어 꽤 난처해하는 걸 여러번 봤으니까요.”
운철이라, 그거 엄청 비싼데. 예상치 못한 보상안이었다만 천무백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이미 제갈선에게 검을 받을 때, 재료인 운철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검후가 조금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보통 운철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오랫동안 보관해 온, 신물이나 다름없지요. 흑운철(黑隕鐵)입니다.”
“흑운철 말입니까?”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흑운철(黑隕鐵).
회색빛 또는, 검붉은 빛이 감도는 운철과는 달리 마치 먹을 칠한 듯 새까만 운철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그중에서 아주 극히 얻을 수 있는 운철.
그리고 그런 운철에서도 정말 극악의 확률로 아주 소량만 발견되는 게 흑운철이다.
희귀한 만큼 강도 역시 제련하기가 불가하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아니, 애당초 흑운철로 제련한 무기가 강호에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없다.
흑운철로 제련된 무구라면, 단숨에 역사적인 신병이기가 되리라.
“사실 비단 지금뿐 아니라, 무언가 보답해 드리고 싶었지요. 검신께 몇 번이고 목숨을 구명 받았으니까요. 검존, 고 아이가 왔을 때 주려고 했지만. 그 아이는 이미 좋은 검을 가지고 있다고 정중하게 사양하더군요. 이번만큼은 받아줬으면 합니다. 늙은이가 자칫 강호의 큰 별이 될 사람을 다치게 할 뻔했으니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에 궤적을 틀었지 않습니까? 크게 상할 수도 있는데도. 검후께서는 후배를 위해 그런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다행히도 손이 조금 다친 것으로 끝났지만, 검후께선 큰 상처를 입으실 뻔했구요.”
천무백이 그리 말하자 검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것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천무백이 맑게 웃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검후께선 제 생명의 은인이시나 다름없습니다.”
뚜렷하고 단호한 어조. 입가에 드리워진 깨끗한 미소.
아무런 욕심이 느껴지지 않는……
‘부처가 있구나.’
경천혼공에서 흘러나오는 내기에, 덧씌워진 선기까지.
“그런데도 따로 사과의 의미로 보상을 챙겨주신다는 것에 저는 그저 감사히 받겠습니다. 염치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어쩌면 추후에 퍼질 추문에 적잖이 도움이 될 거니까요.”
“아!”
검후가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맞다. 이번 싸움은 결국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 천무백은 비무 후 정양을 위해 앓아누웠으니까.
소문의 과장성을 생각하면, 여러 오해가 점철되어 아마 검후가 천룡검협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는 얘기까지 나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이란 과거의 악명이 또다시 떠오를 테고…….
“흑운철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 귀한 걸 받을 정도로 제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까요.”
순간 뇌리에 파고드는 생각에 검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면, 일부러 이랬던 거구나.’
천무백을 바라보는 검후의 시선에 따스한 빛이 어렸다.
일부러 체면치레할 정도로만 보상을 바란 것이다. 나중에 괜히 추문에 휩싸이지 않게끔.
그걸 뒤늦게 깨달은 검후는 흑운철을 내어 준다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정녕 검신의 후인이고, 현 강호에서 가장 협객다운 사내다.’
검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그렇다고 해도 흑운철이라도 내주어야 이 늙은이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받아 가세요. 사과의 의미도 담고, 검신께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천무백이 말끝을 흐렸다.
“이왕이면, 흑운철을 제련할 만한 장인도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
검후는 멍한 시선으로 천무백의 태연자약한 얼굴을 바라봤다.
‘이 무슨…….’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검후는 일순 말을 잃었다. 하나 뭐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본인이 사과에 대한 보상이자 은혜를 갚는 거라고 말했으니 어찌 물릴 수도 없다.
“뭐, 저는 굳이 바라지 않았는데…… 검후께서 검신에 대한 은혜까지 갚고자 하시니. 이거 참, 제가 안 받기도 뭐 하고. 그거참…… 하하.”
뻔뻔한 웃음에 검후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검을 틀어버리지 말아야 했었나.’
* * *
검후와의 대화가 끝나고, 정양중인 천무백을 찾아온 건 종리홍이었다.
그간 구금당했다가 천무백의 도움 덕택에 풀려난 종리홍은 뻘쭘한 얼굴로 한참을 침묵했다.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종리홍은 주저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쳐다보는 것뿐인데도 이해 못 할 압박감이 짓눌렀다.
이상했다.
일전에도, 배 위에서 가면을 쓴 채 부딪칠 때도, 그래도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다르다. 그것과는 달라.’
일전에 마주쳤을 땐, 고강한 무공과 내뿜는 기세에서 나오는 위압감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 태상노군이나 부처 앞에 내몰린 느낌이로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
어떤 힘도, 어떤 기운도, 고강한 내공도 담기지 않은 그저 평범한 시선.
투명했다.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투명한 시선이다.
제 속마음, 흉중에 품은 생각, 그리고 지금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까지 모두.
위압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종류.
마치 절대적인 존재 앞에 놓인 것처럼, 종리홍은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종리홍이 굳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천무백의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할 말이 있던 거 아니오? 대장로.”
반쯤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과. 반존대에도 종리홍은 반발하지 못했다.
만일 옆에 태을검객들이 있다면 깜짝 놀라겠지만, 종리홍은 이곳에 혼자 왔단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한참 머뭇거리던 종리홍은 간신히 입을 뗐다.
“고맙…… 소. 천룡검협.”
악연이라면 악연으로 점철된 사이가 아니던가.
하나 종리홍도 도리를 알았다.
이번 일은 자신뿐 아니라 종남이 나락으로 처박혀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유검제에게 종남파의 대장로, 풍운검군이란 별호를 밝힐 때만 해도 도박수를 던지는 기분이었다.
한쪽에 구금당해 머무르는 동안, 천무백의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결국, 말했던 건 지켰다.’
독마와 흑도의 손에서 아이를 지켰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명예마저 지켜줬다.
아니, 오히려 죄를 숨기고 그를 띄워 줬다. 종남은 잃은 게 아니라 얻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소용을 지켜 줘서 고맙소.”
처음엔 화도 났다.
소용이 품은 선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그렇다고 천무백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한 게 없소. 그저 아이를 안고 도망쳤지. 오히려 아이가 정체불명의 힘으로 날 독마의 독기로부터 지켜 주더이다.”
그리 말하니 종리홍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사람이 품을 수 없는 선기다. 그걸 내공처럼 흡수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더구나 쫓기는 와중에 그런 술법을 어찌 알고 펼치겠는가?’
선기란 곧 불가사의다.
그러니 천무백이 저리 말해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수긍하고 말고도 없었다. 종리홍은 그것보단 소용이 무사히 돌아왔단 사실에 기뻤으니까.
오히려 병색이 완전히 가신 밝은 얼굴을 보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대에게 은혜를 입었소. 그대는 나와 종남의 명성을 지켜줬고, 종남의 미래마저 보호해줬소. 오로지 그대의 은공이요.”
속 시원하게 인정한 탓일까.
종리홍은 오히려 속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신녀가 선기를 잃었으니, 언젠간 또 다른 신녀가 나올 터.’
그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동안 나머지 성물을 회수하면 된다. 만일 자신의 대에 이루지 못하면 자신의 후대가 진전을 이으면 된다.
그것들보단 소용이 안전하게 돌아왔단 사실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독마의 손에 들어갔다면 끔찍했겠지.’
정파의 무인들을 비다라로 만든 핵심 인물이다.
그런 악적에게 잡혀갔으면, 무슨 꼴을 당했겠는가.
종리홍은 진심으로 천무백에게 고마웠다.
그간의 악연 같지 않은 악연을 뒤로하고도.
“고맙소, 정녕 고맙소. 천룡검협.”
그러자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별로 한 일 없소. 나도 내 목적을 위해 행동해 왔을 뿐이니.”
겸양의 태도에 종리홍도 불현듯 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생각보다도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소림면패를 들이밀며 겁박하던 그 모습도 곰곰이 생각하면 다 하나의 이유 때문 아니던가?
‘혈귀곡…….’
종리홍이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천무백이 강호를 종횡하며 이루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여기저기 분산된 정파의 힘을 정의맹이란 이름 아래 하나로 모으고 있다.
오로지 혈귀곡에 대항하기 위해서.
‘참으로 대단하다.’
거악을 향해 오로지 신념이라는 칼 하나만 들고 뛰어드는 젊은 협객.
종리홍은 불쑥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저 맹목적으로 강함을 추구하고, 사문의 부흥만 원했던 건 아닌가.
무림의 원로로서, 한 문파의 어른으로서 그것이 과연 옳은 길이었던가.
천무백의 행보를 눈앞에서 보니,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이토록 정도를 걷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종리홍의 얼굴이 푸근해졌다. 풍운검군이란 별호로 종남의 호랑이라고도 일컫던 그의 표정은, 흡사 자애로운 도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따스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다시 바라봤다.
‘으응?’
한데 어쩐지 천무백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살짝 찌푸린 눈, 불만족스러운 표정.
마치 그게 다냐는 듯 말하는 듯한 눈빛.
“그래서 말로만 고맙다는 거요?”
“……으응?”
종리홍이 떨떠름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아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맨입으로 입 싹 닫겠다고?”
“……천룡검협.”
“거참. 강호의 도리는 어디로 갔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구나.”
“…….”
“아이도 구해 줘, 사문 명성도 지켜 줘, 그쪽 명예도 지켜 줘. 납치범이란 악명에서 구해 줘. 그런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있네.”
“…….”
“만일 내가 여기서 진실을 말하면, 유검제나 검후가 대장로를 가만둘런지 모르겠네.”
“…….”
종리홍은 부들부들 떨었다. 능글맞게 능청을 떠는 모습에 종리홍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나 이내 꽉 쥔 주먹을 풀 수밖에 없었다.
“무얼…… 바라오?”
천무백이 씩 웃었다.
조금 전까지 오로지 큰 뜻을 품은 협객이라 봤던 자신의 눈을 뽑고 싶은 심정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