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95화>
195. 정말 다행이다.
절혼오절검.
다섯 초식만으로 영혼마저 절단 낸다는 검후의 독문무공.
다섯 개 초식 모두 무림일절이란 평을 듣기 아깝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절혼오절검의 더 무서운 점은 뒤로 갈수록 초식의 위력이 배가 된다는 점이다.
일 초식, 이 초식을 버텼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다. 그러면 나머지 세 개의 초식에서 반드시 끝내야 했기에, 위력에 극도로 치중된 것이 바로 절혼오절검이다.
지금까지 천무백이 받아 낸 초식은 삼 초.
사 초를 넘어서 오 초까지 받아낸다면, 검후는 말 그대로 싸움에 취할 것이다.
천무백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천패성(天敗星)을 타고난 운명.’
천패성(天敗星).
불길한 기운을 품은 백팔흉성(百八凶星) 중 하나.
모든 이들을 죽이고 피에 취한다는 천살성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천패성도 흉성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과 운명을 말한다.
거칠고 난폭함, 지옥의 염라나 다름없는 흉포한 기운을 타고난 별자리.
강호를 피로 물드는 천살성에 비견할 바는 아니나, 천패성만 해도 능히 강호를 뒤집을 흉성이었다.
천패성을 타고난 검후가 정파의 인물로서 우뚝 설 수 있던 건, 바로 불가의 가르침이었다.
만일 보타문에 입산하지 않고 다른 문파에서 배웠다면, 전대 검후가 거두지 않았다면, 검후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다.
하나 불가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타고난 흉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천무백은 검후가 흉성에 휩쓸리기 전에, 이 싸움을 끝내기로 했다.
쩌어엉!
천무백의 검이 허공을 꿰뚫었다.
파아아아앗.
동시에 새하얀 섬광이 번쩍이더니, 이내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자리처럼 주위를 뒤덮었다.
‘도대체……?’
호승심으로 달아오르던 검후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빛무리.
어둠 속에 빼곡이 박혀 있는 별무리를 보는 듯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은하수의 흐름.
쩌어어어어엉!
검후 역시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전신에 치미는 격렬한 위기감이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리고, 절혼오절검의 사 초식을 꺼내든다.
광륜백하(光輪白河).
검후의 검이 빛무리 사이로 강렬하게 회전하며 파고든다.
가공할 신위.
검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광륜. 하늘을 수놓던 수많은 빛무리가 광륜에 집어 삼켜진다.
하나 아무리 맹렬한 광륜이어도, 하늘을 수놓은 빛무리를 모두 삼키지 못하는 법.
오히려 미친 듯이 모여드는 빛무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광륜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찢긴다.
“……!”
부서지며 흩날리는 새하얀 섬광 사이로, 검후는 눈을 부릅떴다. 천무백의 검이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찔러졌다.
급격하게 틀어지는 검의 궤적과 함께 별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쏟아진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건 창천검신의 검도 아니다.
난생처음이다.
저 새하얀 빛무리.
마치 은하수처럼 무수히 흐르는 별의 강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강기로 이뤄진 바다였다.
‘저것들이 다 강기라고?’
경악과 충격이 연달아 뇌리를 흔들었다.
이것 또한 천둔검법이었다. 경천혼공, 빙공, 그리고 선기까지.
모든 것들을 검에 담고, 검으로 표현하고, 검으로 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릇.
천둔검법이 만들어 내는 별의 바다 사이로 천무백의 눈이 새하얀 안광을 토했다.
‘오 초가 되기 전에, 지금!’
천무백의 검이 비틀리며 격렬하게 궤적을 틀었다.
검후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위기다.
위험하다.
이 지독한 위험은, 어느새 검후를 단순한 비무전이 아닌 생사결이란 인식으로 이동시켰다. 그만큼 위협적이고 맹렬했다. 불법을 닦으며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천패성의 흉포한 기운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휩쓸리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강기로 이뤄진 별들의 대해(大海)
그 순간, 천무백의 눈앞에서 검후의 검이 불을 토했다.
까아아아앙!
부서졌던 광륜이 다시금 팽이처럼 강렬하게 회전하며 불쑥 솟구쳤다.
천무백의 광대가 씰룩였다.
‘광륜멸겁(光輪滅劫)!’
끝내 절혼오절의 마지막 초식까지 나왔다.
천무백의 시선이 검후의 얼굴에 꽂혔다. 자애로운 부처의 얼굴이 사라지고, 드러난 건 천패성의 흉포함.
백팔흉성의 가장 흉악하고 폭급한 천패성은 곧 염라의 얼굴이었다.
‘썅. 불법 좀 열심히 닦지!’
천무백은 투덜거리며 검을 쭉 뻗었다.
바닥에 굳게 박혀 있던 암석들이 깨져 나가며 하늘로 솟구칠 정도로, 강렬한 소용돌이가 주위의 기파를 마구잡이로 휘몰았다.
‘이 할망구, 완전히 작정을 했고만!’
천무백은 이를 악물었다.
40년 전에도, 창천검신의 무위로도 쉬이 대할 수 없던 검객이 바로 검후였다.
수백 년간 전승되는 검후란 별호를 이어받은 자.
도가에서 말하는 백팔흉성(百八凶星) 중 천패성을 타고난 운명.
이 두 가지만 해도, 검후는 작금의 강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고 할 때 빠지지 않는 분명한 이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귀를 찢어버릴 것 같은 파공성.
검을 찌른다고 볼 수 없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광륜은, 주변의 대기를 압축하고, 찢고, 터뜨렸다.
“거, 적당히 좀 하지! 진짜!”
천무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부러 오 초 안에 끝내기 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만, 이것이 오히려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천둔검법이 쏟아 내는 강기로 이뤄진 별의 대해.
검후가 그간 불법으로 억누르고 또 억눌러 왔던 천패성이 깨어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오랜 수양으로도 이겨 낼 수 없단 지독한 위기감.
그 위기감이 천패성의 흉성을 일깨운 것이다.
위기에 달하면 몸이 절로 잠재력을 폭발시켜 초인적인 힘을 내듯이.
지금의 검후가 그런 상태였다.
얼굴에 떠오른 지독히도 붉은 빛. 아니, 그건 숫제 새빨간 용암이었다.
‘오 초!’
마지막 오 초식.
천무백은 이를 악물고 검을 뻗었다.
오히려 쭉 뻗어오는 새하얀 광륜으로 몸을 던지는 모양새.
무수히 쏟아 낸 별의 대해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 압박감이 천무백의 몸을 강타한다.
콰아아앙!
광륜에 휘말려 서서히 죽어 가는 별들의 바다.
온몸의 내장과 뼈를 짓이길 듯한 충격 속에서, 천무백의 철신고검이 번뜩였다.
찌이이이잉!
죽은 별들 사이로, 철신고검이 유난히 빛을 내뿜는다.
보인다.
흉하게 일그러진 검후의 얼굴 속에서, 번져가는 경악성이.
보인다.
붉게 물든 빛무리 사이로 떠오르는 노란 빛무리가.
천패성의 흉포함에 휩쓸린 상황에서도 튀어나오는 강렬한 의문.
천둔검법이 만들어 낸 별의 대해를 모조리 광륜으로 집어삼킨 검후의 공격 사이로, 천무백의 신형이 벼락처럼 쇄도했다.
“불법 좀 더 열심히 닦으쇼! 좀!”
철신고검이 맹렬하게 빛났다.
웅! 웅! 웅!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세 개의 단전으로 이어지는 모든 내력이 담겨 철신고검이 거친 검명을 토했다.
철신고검이 광륜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순간 세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
붉은 빛무리가 점점 옅어진다.
검후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천패성의 흉포함이 떠오르던 검후의 얼굴에 일순 원래의 표정이 찾아왔다.
“으음! 처, 천 공자!”
검후가 입가로 피를 흘리며 급히 뿌연 먼지 사이를 노려봤다.
탓.
뿌연 흙먼지 사이로 천무백의 신형이 흔들리면서도 굳건하게 내려앉았다.
“아…….”
검후가 탄식을 토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양손.
그리고 부러져 검자루만 남은 그녀의 애검.
수십 년을 함께 해 온 애검이 부러진 게 문제가 아니다. 상대가 절혼오절검을 버텼다는 것도 신경 쓸 게 아니다.
검후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불법으로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고 여겼던 천패성.
‘이 무슨…… 내가 닦아 온 수양이 그리도 부족했단 말인가?’
벌벌 떨리는 손을 내려다 봤다.
아니다. 수양이 부족한 게 아니다.
수양이 부족했다면, 천패성의 흉포함에 취해 그녀는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천하악인이 됐을 것이다.
‘분명 즐겁고, 좋은 싸움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흥에 취했다. 좋은 상대를 만났다고. 뛰어난 후배와 손을 섞게 됐다고.
분명 즐거웠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생사결 따위가 아니었다.
한데 어느 순간.
‘사 초 때였다.’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의 광륜으로도 버텨 내지 못했던 강기의 바다.
그건 어떤 강기보다 순수했고, 밝았으며, 폭발적이었다.
‘억눌렀던 천패성이 깨어났다.’
자신이 타고난 운명.
스승께서 거둬 주시고, 불법을 닦게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천하악인으로 만들었을 지독한 흉성.
그것이 깨어났다.
천하의 검후의 정신력으로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온몸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강기로 이뤄진 별의 대해. 집어 삼켜질까 봐. 삼켜져서 갈가리 찢길까 봐. 본능이, 무인으로서 갈고 닦은 본능이 두려움을 느끼고 천패성을 깨웠다.
‘아아…… 난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고, 정말 터무니없구나.’
검후는 슬픈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천 공자. 이 늙은이가 정말 면목이 없구려.”
하나 천무백은 태연했다.
“괜찮습니다.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검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새하얗게 질린 낯빛. 굳건히 서 있으나, 적잖은 충격을 입은 게 분명해 보였다.
한데도 저리 말하다니. 검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내 면목이 없소. 검신과 대련을 할 때도 이리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는데…….”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그야 그땐 창천검신이었으니까.
‘적당히 맞춰 주면서 끝낼 수 있었으니까.’
반면 지금은 달랐다. 천무백도 모든 힘을 쥐어짜야 어찌할 수 있을 정도로 검후는 강맹했다. 그러다 보니 검후 역시 격렬한 위기감을 느끼고 일순 폭주한 것이리라.
하나 그렇다고 수양이 부족한 건 아니다.
‘마지막엔 검후가 광륜의 방향을 틀었다.’
분명 똑똑히 봤다.
충돌하는 순간, 검후의 얼굴에서 떠오르던 수많은 색의 교차를.
당황하고, 급히 검을 틀었다.
그건 정말 과감한 결단이다. 어쩌면 자신이 크게 당할지도 모르는, 희생을 감수하는 각오였으니까.
“그러니 다행입니다.”
“다행이라……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내 손으로, 검신의 후인을 크게 상하게 할까 봐…… 아아. 나무관세음보살.”
다행이다.
천무백은 그리 생각했다.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까.
‘검후가 손을 좀 다치긴 했지만.’
이 정도면 다행이다.
정말로.
천무백은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삼켰다.
‘막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다행이다.’
천무백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 * *
생사결이나 다름 없던 비무전이 끝나고, 검후는 또 한번 큰 위기에 봉착했다.
“할머니랑 안 갈래! 할머니 따라서 안 갈 거야!”
검후는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천무백의 팔에 매달린 채 강렬하게 고개를 흔드는 소용의 모습에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아가야…….”
“할머니 나빠! 오라버니 아프게 했어!”
“그건…….”
검후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하긴, 할 말이 없다.
천무백은 외견상 큰 상처는 없었지만, 단전에 적잖은 충격을 입어서 정양이 필요했다.
천무백은 개의치 않아했지만, 소용이 문제였다.
제자로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던 소용이 검후를 미워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병색이 완전히 치유된 것이기 때문에, 검후는 소용을 거두지 않고 유검제의 슬하에서 자라게 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재다.’
검후의 눈에 욕심이 번뜩였다.
불가의 수양과 가르침으로도 내칠 수 없는 욕심.
바로 무(武)에 대한 욕심이다.
‘벌모세수를 수도 없이 거친 것처럼, 모든 맥이 깨끗하다.’
아무리 아이라도, 노폐물이 쌓이는 건 필연적이다.
한데 소용은 정말로 깨끗했다. 명가에서 어릴 때부터 벌모세수를 통해 키우는 자녀들보다도 더.
‘그야 그렇지. 영에 선기가 담겨 있는데, 속세의 노폐물이 어떻게 쌓일까.’
천무백은 검후의 심리를 읽으며 내심 웃었다.
소용은 다음대의 검후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하나 문제는 소용이 검후를 싫어하게 됐다는 것.
선기를 흡수하며 영과 영으로서 닿았기 때문일까. 소용은 천무백에게 거의 혈육과도 같은, 강렬한 친밀감을 형성했으니까.
검후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소용을 설득했다.
“아가야, 그러면 이 할미가 여기 오라비에게 사과하면 할미를 용서해 주겠니?”
그러자 소용이 천무백과 검후를 번갈아 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그건…… 오라버니가 용서해 주면요!”
그 말에 검후가 환하게 웃으며 천무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미 사과는 진작 많이 받았다. 천무백도 검후에게 큰 악감정은 없었고.
그래도 검후는 사과를 멈추지 않았다.
“내 사과드리오, 천 공자. 정말 이 늙은이가 수양이 부족해 몸을 상하게 했으니…….”
“예, 괜찮습니다. 그런데…….”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천무백이 말끝을 흐리자, 검후의 얼굴에 노란빛이 번진다. 의문이다.
“사과를 보통 말로만 하던가……?”
“……?”
천무백이 능청을 떨며 고개를 훽 꺾었다.
“쓰읍, 강호의 도리라는 게 있는데, 말로만 사과하고 입을 슥 닦는 건, 쫌…….”
뭐지.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지.
“…….”
“사과해서 끝나면 포졸은 왜 있고, 정파도 왜 있나 싶기도 하고. 강호의 도리가 떨어진 거 같기도 하고…….”
검후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맨입으로만 하는 건 좀 검후의 명성에 안 맞는 거 같은데 말이지.”
분명 작게 중얼거렸지만, 다 들렸다.
애당초 조용한 실내였으니 들리지 않을 리가.
천무백의 장난이라 여겼지만, 어째…….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게.
꼭…….
‘창천검신이랑 판박인데?’
창천검신이 검후를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이라고 불렀다면.
검후는 창천검신을 뒤에서 이렇게 부르곤 했다.
‘뻔뻔한 검신.’
어째, 창천검신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