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94화 (194/318)

<검신재생 194화>

194. 그 안에 끝낸다.

검후는 마주 선 천무백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진정 검신의 후인이 맞는가?’

검신은 기운을 갈무리하는 데 능했지만, 존재감을 억지로 숨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패도적인 분이셨으니까.’

보통 무림인은 실력의 삼 할 정도를 숨긴다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강호에서 살아남은 고수일수록, 실력이 뛰어날수록, 심계가 깊을수록 그런 경향이 짙다.

만약을 대비해 삼 할을 숨겨 놓고, 위기의 순간 드러내는 건 흔한 일이다.

반면에 창천검신은 그러지 않았다.

심계가 깊지 않아서?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아니다.

‘애당초 숨길 이유가 없었지.’

삼 할은커녕 일 할조차 숨기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삼 할을 숨긴다는 건 비장의 수다. 위기의 순간 적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반격하기 위한.

문제는 창천검신에겐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그 대단한 천마와 수없이 싸울 때도 마찬가지다. 천마는 그저 패퇴하여 도망칠 뿐, 검신을 위기에 빠뜨리지 못했다.

자신의 모든 걸 공개해도, 누구도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는 그야말로 패도적인 자세.

거만함이라고 헐뜯을 수 없는 당연한 자신감. 누구도 근접하지도, 범접하지도 못했다.

반면 천무백은 모호했다.

‘하단전에 음기가 강하다. 빙공이라니…… 검신께선 빙공을 익히지도 않으셨는데.’

영(靈)에 스며든 선기 탓일까. 중단전에 자리 잡은 선기의 띠 때문일까.

이제는 검후 정도 되는 무인도, 상단전의 대해와도 같은 내기를 짐작조차 못 했다. 그러니 검후로서는 천무백이 그걸 숨기고 있노라고 밖에 여길 수 없었다.

‘독마를 죽였을 정도의 고수에, 삼할을 숨겨놓을 정도로 심계가 깊다. 저 나이에?’

호기심과 호승심이 동시에 치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감정에 묘한 감흥이 일었다.

‘수십 년 만에 몸에 열기가 도는구나.’

잔잔한 흥분. 저 밑에서부터 조금씩 차오르는 강렬한 호승심.

머리를 깎고 불법을 닦아 부처의 품에 귀의했지만……. 그전에 검후는 검후였다. 검으로서 경지에 오른 검의 대가.

검후는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한 흥분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아직 어린아이다. 또 나 같은 늙은이보단, 앞으로 강호에서 큰 역할을 할 친구니…….’

검후는 낮게 호흡을 고른 뒤 말했다.

“이건 생사결도 아니고, 친선 비무전이요. 그러니 승부를 겨루기보단, 서로의 공부를 나눈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지요?”

생사결이 아니다.

뻔한 사실이다.

검후는 일부러 거론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천무백을 위해서.

강렬한 호승심과 흥에 취해 버리면, 검후는 과거 자신의 악명이 고개를 치켜들 것 같았으니까.

‘자칫 내가 싸움과 흥에 취하면, 이 아이가 다치겠지.’

엄연히 서로의 무공을 견식 하는 자리.

“서로 딱 다섯 번의 공방으로 끝내지요. 이 늙은이가 허리가 많이 굽어 그 이상은 검을 휘두르기조차 어렵습니다.”

“알겠습니다.”

천무백은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여전히 반 토막이 난 철신고검.

분명 고물이나 다름없는 검이지만, 철신고검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웅! 웅!

거칠게 울리는 검명.

천무백이 검을 겨누자, 검후는 일순 강렬한 충격이 뇌리에 강타했다.

‘검신……!’

수십 년.

강호의 동료이자, 전우로써 존경했고 경외했다.

검을 잡은 검객으로서 시기하고 질투도 했다.

그리고 여인으로써 그저 뒤에서만 바라봤던.

창천검신.

그가 서 있었다.

* * *

천무백은 차분하게 검을 겨눴다.

‘사십 년 만인가?’

여러 번 검을 섞어봤다. 단순한 비무였지만.

‘글쎄, 저 지독한 성격 맞춰 주느라 죽는 줄 알았지.’

아마 모를 것이다.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이란 악명은 마인들이 붙인 게 아니라, 같은 정파에서, 특히 창천검신이 먼저 붙였다고.

‘곽용이 놈도 검후가 나타나면 혀를 내두르면서 숨었으니까.’

싸움 좋아하는 투신 곽용이 도망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여걸이었다. 호전적이며 광적으로 싸움을 즐기는 여인.

천무백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좋은 기회다. 자신이 갈고 닦은 무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

검후의 검은 전생에서 천무백이 인정할 정도로 훌륭하다.

“사실 공방이라 했지만, 공자께선 버티셔야 할 것이오. 공자의 성과가 대단하지만, 나는 다섯 번의 공방에 최선을 다할 것이니.”

“…….”

“서로가 쌓은 공부를 견식하는 자리지만, 검을 잡은 사람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 잘 알고 계시지요?”

물론이고말고.

내가 한 말이니까.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검후의 얼굴에서 붉은빛이 강렬하게 번졌다. 동시에 검후의 작은 신형이 벼락처럼 쇄도했다.

쉐에에에엑!

아니, 벼락이었다. 하늘을 가르고 내리꽂히는 쾌속한 벼락.

‘이런 썅.’

보인다. 얼굴 너머로 번지는 붉은 빛, 입가에 맺히는 희미한 미소.

‘불법을 오래 닦아서 좀 나아졌다고 하더니.’

막상 싸움에 돌입하는 순간, 여지없이 과거의 모습이 튀어나온다.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 같으니라고!’

생각은 그리했지만, 천하의 천무백도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파아아아앙!

강렬한 벼락이 휩쓸 듯이 스쳐갔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쾌속의 극치.

주르르륵!

강력한 풍압이 스쳐 가며 천무백의 이마가 찢어졌다. 쩍 벌어진 상처로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렸다. 천무백이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머리가 통째로 날아갈법한 강력한 초식.

하나 당황한 건 천무백이 아니라, 검후였다.

“……!”

기세 좋게 검을 내질렀던 검후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졌다.

‘피했어?’

정확히 천무백의 미간을 노리고 찔러 들어간 검격.

일초식인 벽력섬격(霹靂殲激)은 말 그대로 벼락 그 자체였다.

단 한 번의 발출로 생명체를 태워 버리는 가공할 일절.

물론 이 공격에 천무백이 죽으리라곤 생각도 안했다.

창천검신의 후인이라면, 독마를 죽인 신위라면, 충분히 막아내리라, 그리 여겼다.

막지 않았다. 천무백은 눈으로 쫓기도 힘든 벼락을 고개를 비트는 것만으로 피했다.

막는 것과 피하는 건 전혀 다르다. 손에 검을 든 상태. 무언가 위협이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막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피하는 건 쉽지가 않다. 끝까지 상대의 공격을 주시해야 한다. 놓치지 않아야 한다. 주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경로가 어디인지 안다고 해도, 피하고자 반응하는 건 촌각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극도로 짧은 찰나.

찰나 동안 머릿속에서 기민한 판단에 이어 몸이 반응해야 한다는 건.

단순히 오랜 수련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지독한 감각과 판단력! 그리고 언제든 반응할 수 있게 끝없이 단련된 신체!’

검후는 한없이 감탄했다.

“으하하핫, 과연, 대단한 기재요!”

검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잔잔했던 일전의 모습과 달리 기꺼움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호승심과 호전성이ㅣ 느껴졌다.

천무백의 눈은 찌푸려졌다.

‘큰일 났네. 이 할망구.’

얼굴 너머로 점점 더 진해지는 붉은 빛무리.

완전히 흥에 취했다.

‘남은 건 사 초군.’

검후의 상태를 보건대, 그 이상이 되면 정말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이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이제 일 초 끝났습니다.”

“아쉽구려. 사 초밖에 남지 않았다니. 마음 같아선 종일 싸우고 싶은데…….”

“제가 그 수준에는 되지 않습니다.”

천무백은 어째서 검후가 오초를 제안했는지 잘 알았다.

‘절혼오절검(絶魂五絶劍).’

검후의 독문무공, 절혼오절검.

단 다섯 번의 휘두름으로 영혼마저 끊어 낸다는 신공.

“내 다섯 초를 온전히 다 버티신 분은 검신밖에 안 계셨지. 검존이나 투신이나, 그 두 놈은 웬만해선 나랑 안 싸워 줬거든.”

그야 당연한 일이다.

그 다섯 초식을 버티면, 신이 나서 생사결까지 가야 하니까.

‘지금 다섯 초식을 버틸 수 있나?’

어쩌면 터무니없는 질문이다. 무려 검후다. 천하십대고수, 그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절대강자.

그녀가 열손가락에 꼽히던 것도 무려 40년 전의 일이니, 지금의 무공은 얼마나 심오해지고 깊어졌겠는가?

반면 천무백은 이제 이름을 알리는 신진기재.

만일 싸움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백이면 백 불가능하다고 말하리라.

직전 전생 땐 창천검신이어서 문제는 없었다. 정신 나간 것처럼 싸워도, 창천검신의 무위는 그걸 막아 낼 수 있으니까.

아니, 아예 제압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전생처럼 생각 없이 싸우진 않겠지만, 그 특유의 호전성이 튀어나오면…… 죽는다.’

사람이 호전적일 수는 있다. 아무리 호전적이라고 해도, 검후 정도 되는 위치의 인물이라면 그걸 제어할 수 있다.

문제는 보통 호전성이 아니다.

검후가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천하악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르는 운명.

불법으로 한없이 억누르는 그 흉성이, 특유의 호전성으로 발휘된다면…….

이건 단순한 비무전이 아니라 위험한 싸움이 된다.

천무백의 얼굴이 더없이 침착했다.

답은 하나다.

‘사 초까지.’

오 초가 되기 전에.

‘그 안에 끝낸다.’

자신이 먼저 끝낸다.

생각을 그리 먹자 천무백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

철신고검의 끝이 자신을 향하자, 검후의 얼굴에 붉은 파문이 더 진해졌다.

검후는 손끝부터 전해지는 아찔한 느낌에 전율했다.

몇 년 만인가.

이토록 강렬한 호승심이라니.

수십 년 불법을 닦으며 수양을 해 왔지만, 그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무인의 호승심이 거세게 타올랐다.

따라서 봐줄 생각은 없다. 최선을 다한다.

이 짧은 오 초가 아쉽지 않게, 모든 걸 다해서.

까아아아앙!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검후의 검이 눈으로 쫓기 힘든 압도적인 속도로 좌에서 우로 그어졌다.

까가가가강!

그 순간, 천무백의 철신고검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상단을 베어 가던 검이 궤적이 틀어져 허공으로 솟구친다.

검후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번엔 단순히 막은 게 아니라 공격을 아예 무로 되돌렸다!’

뿐만이 아니다.

검의 궤적을 틀어 버렸다. 이건 곧.

‘반격!’

턱밑으로 불쑥 솟구치는 철신고검.

검후는 몸을 비틀어대며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하나 피함과 동시에 검후의 공격 역시 매섭게 이어졌다.

마치 물 흐르듯이, 이미 짜놓은 한 편의 연극처럼 이뤄지는 깔끔한 공격.

“삼 초!”

검후가 호쾌하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강한 충격.

천무백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검후의 얼굴에서 강렬해진 붉은 빛을 본 탓이다.

‘이거야 원, 더 가면 진짜 본성 나오겠는데?’

이미 반쯤 나왔다. 저 호쾌한 웃음이 담긴 검초는 살의(殺意)만 담기지 않았을 뿐, 어떤 고수도 머리를 쪼갤 만큼 강맹했다.

천무백은 집중했다.

‘사람의 심리를 본다는 건 곧 흐름을 본다는 것.’

싸움은 곧 심리전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에서도, 심리전은 곧 바탕이다.

천무백은 여러 색으로 진해지고 옅어지는 빛무리를 보며, 검후의 공격 경로와 방향을 예측했다.

그것은 이미 절혼오절검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던 천무백이기에 심리를 엿보고 곧장 판단하여 전투에 접목할 수 있었다.

까아아아아앙!

“으하하핫! 공자! 이것도 막았구려! 대단해요. 대단해! 검신께서 아주 대단한 후인을 또 한 번 길러내셨어요!”

목소리의 어조가 높아졌다. 검격이 막혔는데도 오히려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묘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눈이 희번득해지는 걸 본 천무백은 이를 악물었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사 초, 여기서 끝낸다.’

웅! 웅! 웅! 웅! 웅!

철신고검이 찢어질 듯한 검명(劍鳴)을 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