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93화>
193.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
꽈앙!
천무백이 마중을 준비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신형이 뚝 떨어졌다.
“염병할…….”
순간 능허는 압도당했다. 착지한 위치가 강렬한 충격으로 땅이 뒤집힌 광경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웠다.
뿌연 흙먼지 사이로 드러나는 강렬한 안광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평범한 승복을 입은 민머리의 노파였지만, 능허는 온몸에 전해지는 무거움에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천하십대고수…….’
천하십대고수에서도 수위.
한 시대에, 검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를 이룩한 여협(女俠)만이 얻을 수 있는 별호.
‘검후……!’
작은 체형이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 여리고, 조그만 체형이다. 천무백의 명치께나 올까 싶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하나 흙먼지 사이로 타오르는 눈빛에 능허는 왜 그녀가 천하십대고수에서도 수위로 꼽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너희는 누구냐!”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운 일갈.
직접 말을 하지 않아도, 어조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검후의 목소리엔 지독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의원으로 분장하여 아이를 납치한 고수들에, 수적들의 왕이자 흑회의 회주, 그리고 독마를 비롯한 혈귀곡의 마인들까지 모여들어 개판을 만들지 않았나.
‘나 같아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니, 누굴 믿을 수도 없겠다.’
지독한 경계심엔 적대감마저 깃들었다.
능허는 조용히 천무백의 눈치를 봤다.
‘이야. 이 상항에서도 태연해?’
감탄이 불쑥 들었다. 검후를 필두로 절강무림의 무인들이 흉흉한 기색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런데도 천무백은 태연했다.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누구냐. 도대체 이 절강무림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냐? 너희도 아이를 노리고 찾아온 것이더냐?”
낮은 목소리다.
마치 할머니가 아이를 타이를 때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나 어마어마한 공력이 담겼기에 능허는 급히 내공을 운용해 단전을 보호해야만 했다.
‘미쳤구나, 미쳤어. 이 정도는 되어야 천하십대고수인가.’
그 대단한 독고패도 천하십대고수였지만, 그마저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무게가 남달랐다.
“아이는 어디 있느냐! 독마하고는 무슨 관계지? 저 빌어먹을 마인들과는 무슨 사이더냐!”
제대로 된 변명을 하지 못하면, 그대로 목을 벨 기세다.
침이 꿀꺽 삼켜지고, 식은땀이 등에 흥건해진다.
‘여기서 말실수는 곧 죽음이겠어.’
능허는 필사의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이 압박감을 좀 해결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다행히도 그런 능허의 바람을 깨달았을까. 천무백이 한 발짝 걸어 나왔다.
“……!”
웅!
순간 검후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기운을 흩트렸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진실을 말하기 마련이다.
검후는 일부러 도착했을 때부터 모든 기세를 내뿜으며 상대를 압박했다.
그런데 천무백은 태연한 얼굴로 걸어 나오며, 그 기세를 단숨에 흩트렸다.
발걸음 하나만으로.
검후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심상치 않은 녀석이로다. 근처에 있는 시신을 보니 마인놈들의 수족 같지는 않다만…….’
어느새 천무백은 계속해서 걸어 나와 검후의 앞에 섰다.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꼭 제가 들었던 것과는 다르군요. 듣기론 검후께선 수틀리면 칼부터 휘둘러 팔다리는 잘라 놓고 질문하는 성정이라고 하셨는데…….”
“……어?”
천무백이 나섰으니 안심하고 있던 능허의 얼굴이 시꺼멓게 변했다.
야…… 왜 도발을 해?
“뭐, 뭐라고?”
“불문의 제자답지 않게 괄괄하다 못해 천하의 여장부라고. 추파를 던지던 웬 사내의 얼굴을 주먹으로 뭉겠던 적도 있다고…….”
검후의 얼굴에 균열이 생기더니, 시퍼런 안광이 불처럼 타올랐다.
“무슨 소리더냐!”
고운 얼굴, 언뜻 보면 부처상처럼 광택이 감돌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하나 능허는 문득, 일그러짐 속에 당황스러움이 깃든 걸 느꼈다.
‘당황스럽다고?’
분노보다,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고?
마치 숨겨온 치부를 들켰을 때의,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듯한 반응이 아니던가.
“네놈이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뽑힌 검이 목이라도 칠 듯이 요동쳤다.
살벌한 기세가 유형화되어 목을 조르는 듯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바싹 마르고 몸이 뻣뻣해졌다.
천무백은 여전히 태연했다.
하나도 걱정 안 하는 것처럼. 오히려 입가에는 재밌다는 듯 잔잔한 미소까지 띠고 있지 않나.
“그저 제가 들은 대로만 얘기한 것입니다.”
그때 검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허리춤에 찬 반 토막 난 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검후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그랬다.
천무백은 계속해서 ‘들은 대로’라고만 말했다.
자신이 젊디젊은 시절의 인물들은 대다수가 이미 귀천한 지 오래.
그리고 저리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반 토막 난 검과 천무백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검후의 얼굴에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사람…….”
그 사람이 쓰던 검.
천하의 명검이며, 한번 휘두를 때마다 검이 울고 마인들이 죽어 나가던 검.
“철신고검!”
반 토막 나고, 처참했지만 분명했다.
늘 감탄하고, 경외하고, 질투하던 그 사람의 검이다.
천무백을 똑바로 바라보는 검후의 눈동자가 떨렸다.
“창천…… 검신?”
“검신의 진전을 이은, 천무백이라 합니다.”
천무백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 * *
“놀라운 얘기로군. 그러면 공자께선 독마를 계속해서 추적해 왔다는 것이오?”
“예. 일전에 중경성에서 태룡방과 혈귀곡의 연관성을 확인하고, 이번 흑회에 잠입했습니다. 그 결과 독마가 절강성에서 소용이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죠.”
“어째서 이 아이를 독마가 노린 것이죠? 독마는 음흉하고 치밀합니다. 악귀와도 같은 작자지요.”
“비다라 때문입니다.”
천무백은 검후의 질문에 그간의 사실을 간략히 요약해 전달했다.
구 할의 진실에 일 할의 거짓을 더하면, 완전한 진실이 되는 법.
“으으음…….”
검후는 침음성을 흘렀다. 검후의 얼굴 너머로 노란색 빛망울이 잔잔하게 번졌다.
몇 번 사람을 관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초록은 편안함, 붉은빛은 다급함과 성급함……. 그리고 노란 빛은 의문.’
설마 검후 정도 되는 사람의 감정이 보일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천무백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상대의 내공 유무와 수준에 상관없이, 선안은 여지없이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 보았다.
천무백은 높은 집중력과 뛰어난 관찰력으로 몇 가지 규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로 세 가지 색이 뚜렷하다.
녹(綠), 황(黃), 적(赤).
물론 모든 감정을 고작 세 가지 색으로 나타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채도로군.’
진하면 진할수록, 연하면 연할수록, 심리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면 아예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겠어.’
급한 건 아니니 차차 시간이 날 때마다 기록하고, 정리하면 되리라.
천무백은 만족스러웠다.
검후의 심리를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파악할 수 있다니.
얼굴 너머로 드러나는 빛망울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점점 연해지더니, 초록빛에 가까워졌다.
‘의문을 접었군.’
과연 정확했다.
검후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독마는 옛날부터 의술뿐 아니라 상고시대의 주술과, 서역의 사술에도 밝았지. 그 작자라면 비다라라는 천륜을 저버리는 짓을 하고도 남지. 그리고 소용이를 이용하려 했다니…….”
“아마 검후께서도 눈치채셨겠지요. 아이는 병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 특이점을 타고 났다고.”
검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전에 여기 유검제 전공(公)께서 도움을 청할 때 느꼈지요. 구음절맥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걸 타고 났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 특이점이, 독마가 비다라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것인가…….”
그제야 검후는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러면 종남의 대장로가 일부러 납치한 게 아니다?”
천무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로께선 제가 섬서성에서 인연을 맺은 이후, 계속해서 혈귀곡을 추적하는 데 협력하고 있습니다. 독마의 정보를 입수한 것도 마찬가지지요.”
“그럼 그대가 독마를 쫓는 사이 풍운검군이 독마의 마수로부터 소용이를 구하려고 했단 얘기이시오?”
“예. 원래는 정말 아이를 치료하려는 목적이었지요. 애당초 독마가 노렸던 건 그 특유의 타고난 병 때문이었으니까요. 한데 독마가 흑도들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대장로는 부득이하게 우선 아이의 안전을 위해 움직였던 것입니다.”
“허어…….”
다시 한번 검후의 얼굴에 노란 빛무리가 번진다. 이번에는 색이 더 강렬했으며, 붉은빛까지 감돌았다.
‘의심이 깊군. 거기에 적대감도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실제로 아이를 납치하고 도주한 건 맞았으니까.
하나 천무백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묘한 기운, 상단전에서 내뿜는 경천혼공 특유의 기운과 더불어 그 위에 선기가 머무르니 불법을 닦는 검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러자 진해졌던 노란 빛무리가 점점 옅어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물론 천룡검협께서 그리 말하니…….”
모든 의심이 해소된 건 아니었지만, 천무백의 말대로라면 그간 뒤죽박죽이었던 상황이 얼추 정리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후는 천무백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의 후인.’
창천검신의 후인이다.
검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람께서도 평생을 마인들과 싸우더니, 그 후인들 역시 뜻을 이었구려.”
따뜻한 눈빛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하나 천무백은 그 말을 그저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후인들?’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검존, 그 아이도 얼마 전 주산열도를 다녀갔지.”
“……!”
“독마의 행적이 남만에서 이쪽으로 향했다고 알려 주고, 북해로 갔지요.”
예상치 못한 검존의 행방에 천무백은 눈을 크게 떴다.
“얼마전이라면?”
“한 3년은 족히 된 것 같군요.”
3년이라면, 혈귀곡이 소림의 불경을 훔쳐서 비다라를 세상에 내보인 시간대와 얼추 일치한다.
아무래도 비다라의 제조에 있어 독마가 중추적인 역할임이 확실한 듯 보였다.
‘다행이군. 당분간 놈들이 비다라를 제대로 쓸 수 없겠어.’
중추인 독마가 죽었으니까. 허나 그것보다 천무백의 뇌리에 박힌 건 검존의 행적이었다.
‘새외에서 마인들을 일일이 추적하고 있는 것인가?’
북해라……. 참으로 먼 곳이고, 지금 갈 수도 없는 곳이다만.
단 조금도 걱정이 들지 않았다.
천무백은 그 누구보다 자기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이다.
오성물 중에 세 개의 성물을 취했고, 선안이란 획기적인 힘 역시 얻었다.
뿐이랴. 세 개의 단전을 모두 활용해 경천혼공과 빙공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경지에 이르렀다.
과거의 깨달음을 되찾고, 천둔검법에 그가 익혀 온 검의 묘리를 담았다.
하여 천무백은 독마를 벴다.
‘전생보다 더 빨리 강해지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있다.’
스스로를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비판적인 천무백이 그리 생각할 정도로, 천무백은 지금 강했다.
독마를 베었던 것이 그 반증이다.
하나 그런 천무백이어도…….
‘내가 아는 그 아이라면, 글쎄. 전생의 내 경지에 닿았을지도 모르지.’
그만한 재능이고, 그만한 실력이었으니까.
하니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가 자신과 같은 뜻으로 한편에 서서 마인들을 때려잡고 있단 생각에, 생각지도 못한 든든함이 진하게 느껴졌다.
덕분일까. 천무백은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검후도 싱긋 웃었다.
“한데 철신고검은 공자에게 있구려.”
“아…… 애석하게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천무백은 씁쓸한 얼굴로 철신고검을 바라봤다.
천유하가 선물해 준, 그간 써왔던 화려한 장식의 검은 애석하게도 독마의 공격을 막으며 깨졌다.
이제 그의 허리춤에는 반 토막 난 철신고검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검신의 애검이었지요. 검신께서 검존, 그 아이가 아니라 그대에게 전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어째 흐름이 이상했다. 천무백은 검후의 자애로운 얼굴 너머로 떠오르는, 약간은 옅은 붉은 빛무리에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랬지. 나이를 먹어 좀 유순해졌지만…….’
한창때는 검후보단…….
‘정신 나간 관세음보살이라고 마인들이 불렸었지.’
검후가 눈을 빛냈다.
“공자, 한번 무인으로서 검을 겨뤄 보는 건 어떠신지요?”
천무백이 씩 웃었다.
“후배가 가르침을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