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92화>
192.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독마는 정마대전 당시에도 늙은 편이었다.
오십 정도였으니 지금은 백 세가 족히 넘었으리라.
사실 무인이라고 무조건 오래 사는 건 아니다.
‘그건 역천이다.’
숱한 삶을 살아오며 천무백은 느꼈다.
사람에게 정해진 수명이 있다고.
하나 지고한 경지에 오른 무인은, 그것을 내공으로 억지로 억눌러 하늘이 정해 놓은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독마는 역천을 했던 것이다.
단전이 깨지고 내공이 사라지자, 그는 버티지 못했다. 피부가 바싹 메마르다 못해 점점 가루처럼 부서지고 찢어졌다.
내공으로 억지로 막아 낸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천무백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죽지 않고 버틴 것이냐.’
역천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천무백도 경험했기에 알았다.
하나 많은 고수가 역천을 스스럼없이 행한다.
단순히 죽기 싫어서가 이유일지도 모른다. 천무백은 이해 못 할 감정이지만.
그러나 그쯤 되는 고수라면 이루지 못한 것이 남았기에 가는 세월이 아쉽기에 붙잡는 것이다.
독마에게는…….
“마도천하가 네놈의 가치였겠지.”
이유는 모른다.
마도에서 태어나 마도에서 살아오며 마도의 뜻을 품은 노인이다.
천무백이 알 이유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독마가 했던 말들이 천무백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늘이 마도천하를 막는다고?”
세상에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늘에게 마도나 백도나 흑도나 그저 군상들의 연극같이 보일 터인데.
하늘이 특별히 마도를 미워하겠는가.
그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애석하게도 내가 다 막아섰다니.”
천무백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마도천하를 이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천무백이 막았다.
특별히 그랬던 이유?
‘그야 마도놈들이 강했으니까. 가장.’
그거다.
예나 지금이나 천무백은 칼이 핏물을 머금어야 성장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에게 강자들과의 생사결은 필수불가결이었다.
천무백이 나아가는 검극(劍極)에 닿기 위해선.
‘목표에는 늘 방해물이 있는 법이지.’
천무백은 이번 삶에서의 방해물은 직전 생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마도라고 생각했다. 혈귀곡으로 대표되는 이것들.
한데 곰곰이 생각했다.
‘과연 고작 저것들이 나의 방해물인가?’
매 전생에서, 천무백은 충분히 방해물을 다 치웠다.
제거했고, 짓밟았으며 부쉈다.
그런데도 전생은 반복했다.
천무백은 수없이 새로운 삶으로 재생했다.
그럼 방해물이 고작 이딴 마도놈들이었을까.
“……어쩌면,”
천무백은 상념은 거기서 멈췄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능허가 품에 소용을 안고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주군…….”
능허의 얼굴에 떠오르는 혼란스런 감정을 보고 천무백은 실소했다.
‘다 들었군.’
우스운 일이다.
천무백은 수많은 전생을 살아오며, 극히 적지만 자신의 비밀을 지인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
물론 그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시 천무백은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가슴 속 응어리진 것이 삼마로 다가왔을 테니까.
아마 지금도 그랬을 것이다.
한데 그걸 들은 놈이, 천유하도, 천문경도 아닌.
저 능허라니.
천무백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믿든 안 믿든 자유다. 네 편한 대로 생각하거라.”
“어쩐지, 애늙은이 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싶었죠.”
능허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한데 그것이 꽤나 능허다운 모습이었던지라, 천무백은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뭐, 전 인생 한번 살고 있는 거니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편히 생각하십쇼. 무인이라면 누구나 무의 정점을 원하는데, 기회가 수없이 주어진다 생각하시는 게 마음 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제가 사정을 잘 몰라서 그냥 지껄이는 겁니다만…… 뭐 그냥 그렇다구요.”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말이었지만, 천무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큰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다.
고작 저런 말 한마디로 응어리가 풀린다기엔 천무백이 살아온 삶의 무게는 어마어마한 것이니까.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새끼. 어디서 먹물 좀 먹었나. 말은 그럴듯하게 해요.”
“흐흐흐. 그러니까 대충대충 삽시다. 응?”
천무백의 퉁명스러운 말에, 분위기가 풀렸는지 능허가 실실 웃었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독마도 죽었고, 혈귀곡도 처리했다.
절강성의 혈귀곡은 사실상 멸절된 것이나 다름없다. 나머지는 검후와 유검제가 다 죽이고 있을 테니까.
천무백은 독마도 잡았고, 절강성에서 혈귀곡을 멸절시킨다는 목표까지 단번에 이뤘다.
이제 남은 건 성물. 천무백이 능허의 품에 안긴 소용을 바라봤다.
“아, 그러면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천무백 할아버지?”
할아버지란 소리를 듣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저절로 반응했다.
그건 정말로 진귀한 일이었다.
천무백은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전생을 통틀어 몇 번 안 되는 경험을 했다.
퍼억!
“네가 진짜 매를 버는구나…….”
여러모로 대단한 놈일세. 그것 참.
* * *
“할아버지!”
다행이도 그 끔찍한 호칭이 흘러나온 건 능허에게서가 아니었다.
소용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아이다. 주위의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던지, 아이의 눈망울은 순진무구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흡사 선녀 같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다.
“흐흐흐. 역시 애들은, 금방금방 배운다더니. 애들 앞에서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닌가 봅니다. 제가 농담 한마디 한 거 그대로 따라 하는 거 보세요.”
그사이 도망치면서 소용에게 정이 든 것일까.
소용을 바라보는 능허는, 흡사 늦둥이를 본 듯한 주책맞은 아저씨의 표정, 그것이었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하나 천무백은 능허처럼 그저 귀엽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순진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천무백은 강한 충격을 느꼈다.
‘능허의 말을 따라한 게 아이다.’
소용은 말 그대로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겉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내면을 보고 있다.
스무 살의 어린 천무백이 아니라, 수백, 수천 년에 이르는 지고한 전생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천무백은 침음을 삼켰다.
‘하긴, 오성물의 힘을 그대로 사람의 몸에 품고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선근경과 신령부, 두 오성물의 선기를 흡수한 천무백이다.
그러나 선기는 내공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내공은 신(身)에 쌓는다. 사람의 육신이 찢어지거나 부서지고, 가루가 되면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하나 선기는 영(靈)에 물든다.
천무백의 육신이 찢어지고, 부서진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선기는 쌓는 게 아니다. 영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니 선기를 사용하여 내공처럼 무언가 파괴하는 물리적인 행사는 불가하다.
하나 천무백은 중단전으로 선기를 발현하는 기연을 얻었고, 그로 인해 상단전과 하단전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유일한 경지에 이르렀다.
천무백의 영에 흡수된 오성물의 선기는, 중단전을 통해 극히 일부만 발현되고 있는 것.
그 전부를 발현한다는 건, 사람의 육체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천하의 천무백이기에 중단전을 이용한 임기응변이 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영에 담긴 선기가 눈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바라만 봐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순진한 눈망울.
천무백이 중단전을 통해 선기를 발현한다면, 아이는 눈을 통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인지,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인지는 잘 몰랐다.
딱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이에겐 저주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과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
그것이 꼭 좋은 건 아니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참혹하고 끔찍한 생각과 사실을 봐야 한다는 거니까.
단순히 선기로 육신이 무너지는 것뿐 아니라, 아이의 영혼 역시 큰 상처를 입으리라.
‘종리홍은 무언가 술법을 통해서 이 선기를 성물에 담으려고 했겠지.’
하나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오성물은 태초부터 오성물인 법. 애당초 선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들.
어떤 물건을 가져와도, 영험하다 싶은 수많은 도가의 물건을 가져와도 아이의 선기를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 영은?’
천무백은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이가 무언가 헷갈린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영은 강하고 질기다.’
그것은 단순한 초인(超人)의 것이 아니다.
수백, 수천.
끝없이 반복되는 수많은 전생의 모든 역경과 고난, 악업과 선행으로 수없이 갈고, 담금질 된.
절대로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겼으며, 세상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한 강철과도 같은.
‘내가 바로 그릇이다. 유일한.’
천무백의 안광이 소용의 순진한 눈망울을 잠식했다.
꼬박 하루가 지났다.
천무백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지식을 헤집었다.
수없는 전생 동안 쌓인 모든 경험과 지식을 총망라했다.
아이의 영에 물든 선기를, 자신의 그릇에 옮겨 담는 일.
어떤 문헌에도, 어떤 기록에도, 어떤 비급에도 적혀 있지 않은 방법.
천무백의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했으며, 수많은 지식을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이제는 사라지고 잊힌 상고시대의 기억과 진리, 지식까지 파헤쳤다.
결국, 천무백은 답을 찾았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사물과 나, 자연과 육신, 객관과 주관, 물질과 정신이 어울려 하나가 되는 것.
천무백의 영과 소용의 영이 육을 벗어나 만나는 것.
추상적인 개념이다.
하나 천무백은 물아일체를 이루는 방법을 알았다.
바로 명상과 무상무념에 이르는 집중력.
일반인이라면 시도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지만 천무백은 가능했다.
경천혼공으로 잠재력을 모두 끌어올리고 있는 상단전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하나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들, 한낱 사물이 아닌 고차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육신을 건너 영으로서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 천무백과 소용이겐 선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증유이자 불가해의 힘인 선기는 물아일체에 이르러서 더 활발하게 움직였고, 빛을 발했다.
그 결과, 천무백은 소용의 영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영에 물든 새하얀 순백의 기운까지도.
천무백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천무백의 선기와 소용의 선기가 서로 얽혀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소용의 영에 물들었던 선기가 차츰 천무백에게로 넘어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작은 영혼이 아니라, 천무백의 영혼을 봤으니까.
더 넓고, 더 강하고, 더 질긴 영혼.
수없이 반복된 전생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강인한 그릇.
천무백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특별히 유도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흐름이고 운명이라면.’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뤄질 일.
천무백은 침묵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림이 끝난 순간.
번쩍!
천무백의 번쩍 뜨인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쏟아졌다.
* * *
눈을 떴다.
물아일체가 끝나자, 소용은 그대로 잠들었다.
얼굴에 흐르던 병색은 사라졌다. 그저 편안하게 웃으며 잠든 얼굴이다.
천무백은 고개를 돌렸다.
동이 트는 걸까. 어렴풋이 밝게 보이는 하늘.
아니, 착각이었다.
하늘은 어두웠다. 여전히 달이 떠 있었고, 어두컴컴했으며,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야 했다.
한데…….
“보인다.”
“주군, 이제 다 끝난 겁니까? 무슨 서로 손을 잡은 채로 명상을 그리 오래 합니까? 난 그대로 잠든 줄 알았네.”
경계를 서고 있던 능허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보였다.
본래의 천무백도 어둠을 꿰뚫는 눈을 가졌지만, 그건 내공으로 안력을 돋궈야만 했다.
한데 지금 천무백은 내공을 단 한줌도 운용하지 않고서, 어둠을 꿰뚫었다.
단순히 꿰뚫은 게 아니다.
천무백의 감정에 따라 명암(明暗)이 뚜렷해지고 흐릿해졌다.
뿐만 아니다.
상대와의 거리, 가깝고 멈. 원근(遠近)이 눈을 통해 머릿속에 뚜렷해졌다. 그건 마치 창공을 나는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 입체적인 눈이었다.
단순한 원근이 아니라 천무백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의 모든 것들의 위치가 보이고,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보고 있던 것이냐.’
천무백은 잠든 소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 너머로 떠오른 초록 빛깔의 빛.
그리고 능허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강렬한 붉은 빛.
‘……편안함과 성급함의 차인가.’
보였다.
상대의 감정이.
상대가 품고 있는 심리가.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건 무엇이라 불러야 하지?”
주야 원근, 공간을 보는 눈은 천안(天眼)이요, 본질을 꿰뚫는 눈은 혜안(慧眼)이다.
하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눈은 무엇인가?
“선안(仙眼)이라 해야 하나.”
소용에게서 넘어온 선기는 이전의 오성물처럼 중단전에서 띠를 형성하지 않았다. 그저 천무백의 영에 물들었으며, 오로지 눈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곧 선안이었다.
“또 뭔 알 수 없는 얘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능허가 퉁명스레 말했다.
하나 이어 얼굴에 떠오르는 건 녹색의 빛.
조급함에서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답지 않게 걱정하고 있었냐?”
“걱정은 무슨. 내 주군 걱정했겠소. 애기 걱정했지. 다행히 편안해 보이니 내 마음도 편하구려.”
이건 놀라운 힘이다.
싸움은 곧 심리다. 단순한 무공으로 결판 나는 게 아니다. 무공이 부족하더라도,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 보면 전투의 흐름을 아는 법.
천무백은 남이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천무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이제 마중 나가자.”
“마중이요?”
“검후 그 늙은 할망구가 잡아먹을 기세로 오고 있구나.”
천무백이 웃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 지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