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90화>
190. 천라지망(天羅地網)
절강은 강호의 변두리였지만, 적지 않은 마인들이 암약했다.
절강무림을 상대하는 마인들만 해도 일백여.
독마의 신호탄으로 뒤늦게 모여든 마인의 수효도 오십.
현재 절강에서 동원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이었다.
사실상 절강에 있는 혈귀곡 전부라 봐도 무방했다.
독마는 모여든 마인들을 한번 훑어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종 놈들이 제법 세력을 잘 일궜군.’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가득 품은 이들이다.
치열한 수련을 반복했는지 눈에는 독기가 진득했다.
“쫓아야 할 놈은 살려 둘 필요가 없다. 잡을 수 있으면 생포하되, 아이를 뺏을 때 방해가 된다면 무조건 죽여라.”
독마는 음흉했고 효율을 중시했다.
어차피 비다라만 제대로 개선해내면, 정파의 조무래기들이야 뭐가 무섭겠는가.
‘흠. 제법 실력 괜찮은 놈일 테니, 그놈으로 비다라 실험을 하면 되겠군.’
그리 생각한 독마는 이내 산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법 넓은 산이다.
작심하고 모습을 숨기면, 산속에서 찾는 건 쉽지 않다.
놈도 그걸 알기에 우선 산으로 들어간 것이리라. 길게 뻗은 산맥을 타다보면 도주하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
허나 여기에 모인 마인들은 하나같이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운 고수.
어떤 심마니보다 산을 더 잘 타고, 어떤 짐승보다 감각적이며, 누구보다 집요하다.
독마는 선언했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쳐라!”
“존명!”
마인들이 순식간에 산속으로 파고들었다.
천라지망.
천라(天羅)는 하늘의 그물을 뜻하고 지망(地網)은 땅의 그물을 말한다.
하늘과 땅이 그물로 뒤덮인 형세.
상대가 난다 긴다 해도, 설령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고작 오십여 명으로 어찌 천라지망을 펼치겠는가 하겠지만, 지금은 독마가 포함되어 있다.
독마는 순순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직접 산속으로 뛰어들었다.
‘어쨌건 아이를 노리는 그 많은 잡것 중에 제일 조심해야 할 놈이다.’
독마는 매사에 직접 나서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 그의 취향이었다.
이번엔 적극적으로 나섰다. 상대가 범상치 않은 놈이니까.
‘상황을 유도하고 의도했다면 놈은 위험하지. 설령 그게 아니어도, 기가 막힌 판단력으로 애를 데리고 간 거니.’
수적들이 모였고 절강 무인들이 대거 쫓아왔고, 하물며 검후까지 왔다.
거기에 몰래 지켜보던 자신의 시선까지 피해 단숨에 애를 뺏어 도망쳤다.
그러니 독마는 직접 천라지망에 뛰어들었다.
“놈, 어디 한번 이 그물에서 벗어나 보거라!”
독마의 광소가 터졌다.
* * *
진곡은 눈을 빛냈다.
‘기회다!’
절강태생의 무인으로, 평생을 이류 언저리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혈귀곡에 입문했고, 마공을 익혔다.
그간 정체되어 평생 강호에서 이류로 살다 죽을 운명인 걸 알기에.
마인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연 마공이었다.
단숨에 이류를 넘어 일류가 됐고, 이젠 절정에 근접했다.
허나 꽃밭은 거기까지였다. 제아무리 극렬한 마공이라도, 절정부터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더 상승의 무공이 필요했다. 내공만 많다고 절정 고수가 되는 게 아니다.
단전의 확대와 내공의 증진은 충분했다. 쓰는 칼이 문제였다.
문제는 태생이었다. 애당초 마도에서 태어난 마인이 아니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그는 혈귀곡 내의 상승 무공을 익힐 자격이 되지 못했다.
내심 마인들 사이에서도 마류칠종 소속의 성혈이니, 그 외의 잡종이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진곡은 잡종이었다. 마류칠종에 속하지 못한. 그저 마도의 잡졸이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그렇다.
평생 이류무인으로 살 때는, 일류만 돼도 소원이 없으리라 여겼다.
막상 일류가 되고 절정에 가까워지니, 이상을 바랐다.
무인이라면,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탐욕.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다. 잡종에서 벗어나 성혈이 되기 위해.
하달되는 임무를 닥치는 대로 수행했다. 임무에는 차마 인륜을 저버리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아이를 죽이고, 애를 밴 만삭의 임산부도 죽이고, 평범한 가정을 몰살시키고, 작은 백도문파를 무너뜨리고.
그렇게 마인이 되어 갔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욕망은 거세게 타올랐다.
더 강한 무공을 탐냈다. 더 높은 자리를 탐냈다.
그런 진곡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독마가 함께한다!’
독마.
정마대전의 전설적인 대마인.
혈귀곡 소속이 아니면서도, 혈귀곡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마도의 거악(巨惡).
“내가 놈을 잡는다! 잡기만 한다면, 그분의 눈에 들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독마의 심복? 그런 건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여기서 공을 세운다면 충분한 보상이 뒤따르리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터.
상승의 무공하나만 익혀도, 단숨에 벽을 깨뜨리고 절정의 무인이 되리라.
‘그러면 마류칠종 중 어딘가에 들어갈 수 있겠지!’
잡종이 아니라 마도의 성혈이 되는 것이다. 하면 이런 변두리인 절강에서만 썩는 게 아니라, 마도의 중심으로 갈 수 있을 터.
진곡은 눈이 벌게진 채 추적을 개시했다.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빨리.
그 고도의 집중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찾았다!”
진곡의 눈이 번뜩였다.
흔적.
놈의 흔적이다.
“왼쪽!”
독마가 직접 천라지망을 펼칠 정도로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걸 감안하면 진곡은 흔적을 너무 빨리, 그리고 쉽게 발견했다.
허나 진곡은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흥. 실력이 좋은 거하고, 흔적을 모두 숨기고 도망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심지어 병색이 완연한 어린애를 품에 안고 도주하는 중이 아닌가.
흔적을 세심하게 지우며 도망칠 상황이 아니다.
진곡은 망설임도 없이 발견한 흔적을 따라 맹렬하게 추적했다.
흔적을 쫓아 도착한 곳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절벽이었다.
진곡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야말로 깎아 자른 듯한 절벽.
저 위로 흔적이 향했다. 진곡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멍청한.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절벽에 오르면 더 도망칠 곳이 없을 터. 진곡은 망설임 없이 호각을 불었다.
홀로 여기까지 적을 막다른 길에 몰아넣은 것으로 생각하니, 이 정도면 충분한 공이 아닌가.
삑! 삑! 삑!
호각을 불어 신호를 보낸 진곡은 잠시 고민했다.
‘기다려? 아니면 먼저 쳐?’
천라지망의 규칙을 생각하면 홀로 치는 건 안 된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포위망이 형성되면 그때 덮치는 것이 곧 그물이다.
하나 여기서 놈을 그대로 잡는다면, 더 큰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진곡의 머릿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진한 탐욕과 이성이 부딪쳤다.
헌데 다행히, 아니 애석하게도 진곡은 더 갈등할 필요가 없었다.
푸욱!
“……!”
입이 쩍 벌어졌다.
가슴에서 버틸 수 없는 격통이 작렬했다.
“하, 새끼. 바로바로 호각 불어야지. 이제야 부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건들거리는 목소리에 반응할 수도 없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머릿속이 아득했다. 가슴 부근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는 용암 같은 뜨거움.
진곡의 고개가 툭툭 끊기며 아래로 향했다.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칼끝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 내렸다.
그제야 상황 파악된 진곡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하, 함정…….”
“함정은 무슨.”
어느새 가면을 벗어던진 천무백의 새하얀 웃음에 진곡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일, 일부러…… 기다렸나?’
호각을 불 때까지? 일부러? 추적당한 게 아니라, 일부러 유인한 거라고? 너무 허술하다 싶을 정도로 추적이 쉽다더니…….
진곡의 눈에서 점차 생기가 사라졌다.
심장이 꿰뚫린 이상, 천마가 와도 재생하지 못한다.
진곡의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자…… 이제 하나 잡았고.”
점멸하는 의식 너머로 들려오는 아득한 목소리.
“호각 부니까 뛰어오는 놈이 세 놈이네. 그러면 이제 네 명이니까. 마흔 다섯 정도 남았으려나.”
부르르르!
죽어가는 와중에도 진곡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저 음성에 진곡은 두려움을 느꼈다. 죽음이란 공포보다, 저 말 한마디에.
어쩐지, 진곡은 죽어 가면서도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천라지망?’
벗어날 수 없는 그물이라고? 상대가 그물에 갇혔다고?
세상에, 어떤 짐승이 그물에 갇힌 채 사냥꾼을 잡아먹는단 말인가?
짐승이 사냥꾼을 잡기 위해 그물에 잡혀준단 말인가?
‘감당 못 할 상대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전곡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망막에 담긴 건,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달려온 마인 셋이 천무백의 칼날에 무참하게 썰리는 장면이었다.
* * *
“…….”
독마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의 시야에 시신이 들어왔다.
시신 네 구.
강호에 있어 독술과 의술은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있듯이, 독마는 시신에 남은 상처만 보고도 많은 걸 파악할 수 있었다.
“한 칼이다.”
이 시신도,
저 시신도.
시신 네 구 모두가 한칼에 당했다.
독마의 광대가 씰룩였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넷 모두 일류를 벗어나 절정을 바라보는 마인들이다.’
이내 그의 시선이 마인들의 허리춤에 향했다.
검이 검집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검을 뽑기도 전에 죽었군.”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차가울 정도의 냉철함이었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지독한 분노가 불을 토하고 있었다.
독마가 입을 비죽였다.
“그물에 잡힌 놈이 제법 매서운 맹수였구나.”
천라지망은 고작 몇이 죽는다고 와해가 되는 게 아니다.
아직 천라지망은 유지 중이었고, 놈은 벗어나지 못한 채 도망만 치고 있다.
그때였다.
삑삑!
귓가를 파고드는 호각.
독마의 신형이 쭉 늘어났다.
단숨에 땅을 박차 공간을 접어 내달리는 독마의 경신은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쾌속함의 극치.
단숨에 호각이 들려온 장소에 도착한 독마는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보란 듯이 바위 위에 놓여 있는 시신.
독마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분명 호각이 들리자마자 달려왔다. 시간으로 따지면 정말 극히 짧다.
“빨라. 검을 쓰는데 망설임이 없고, 솜씨마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작게나마 경탄이 깃들었다. 그만큼 독마 역시 놀라운 솜씨였다. 이전의 시신과 같았다. 검도 뽑지 못한 채 한칼에 당했다.
“검을 뽑기도 전에 죽일 수 있는 실력자가, 호각은 불게 내버려 뒀다?”
순간 머릿속을 파고드는 의문에 독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각을 부는 건 천라지망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서로 거리가 떨어진 추적대가 간격을 유지하며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니까.
한데 검을 뽑기도 전에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면, 순순히 호각을 불게 내버려두겠는가. 호각만 불지 못하게 하면 천라지망의 그물이 느슨해지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 아닌가.
“일부러 내버려 뒀다고?”
침착했던 독마의 얼굴에도 파문이 일었다.
삑! 삑! 삑!
이어 호각이 또 한 번 고요한 산을 울렸다.
독마가 곧장 내달렸지만, 표정은 더 굳을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시신으로 발견된 마인.
독마의 얼굴이 굳은 채 펴지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기색은 바로 의심이었다.
‘설마…….’
일부러 호각을 불게 내버려 뒀다.
자신을 계속 쫓아올 수 있게.
삑! 삑! 삑!
한시도 쉬지 않고, 사방팔방에서, 더 멀리, 더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호각.
독마의 낯빛이 변했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잡을 때 호각을 불며 짐승을 막다른 길로 몬다.
사냥감이 된 짐승에게 호각소리는 저승사자의 부름이나 다름 없다.
천라지망에서 호각이 의미하는 건, 단순히 그물을 만들어가는 신호체계가 아니다. 천라지망에 갇힌 상대에게 지독한 두려움을 안겨줘서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장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저 호각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천라지망.
적을 가두는 하늘과 땅의 그물.
독마는 자신이 사냥꾼이라 생각했다. 놈은 그물에 갇힌 짐승이라고 여겼다.
하나 아니었다.
호각은 더 산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깊이, 더 깊이.
마치 빠져나갈 수 없게 수렁에 빠지는 것처럼, 더 깊숙하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마치 그물에 갇힌 것처럼.
호각 소리가 나면, 여지없이 마인들이 하나씩 죽어간다.
저 소리에 이끌려, 불을 향한 부나방처럼 달려가 목숨을 내놓는다.
“천라지망…….”
독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랬다. 이건 천라지망이다.
사냥꾼들을 그물 속으로 유인해, 하나씩 잡아먹는 맹수.
독마의 동공이 크게 경련했다.
“놈은 혼자서 우리들을 상대로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다.”
천무백의 천라지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