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88화>
188. 나요, 나. 못 믿소?
사실 천무백의 초창기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추적대를 따돌리고 따로 종리홍과 마주치는 것.
‘능허가 추적대의 시선을 돌린 사이, 내가 종리홍과 결판을 지었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능허를 계속 밖으로 돌린 것이고.
‘수적들을 미리 대기 시켜 놓은 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거지.’
가령 추적대를 따돌리는 일에 실패해 주위의 시선 때문에 성물을 탈취하기 어려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차하면 수적들을 동원해 모든 상황을 뒤엎고 개판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여차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짠 판에서 벗어날 힘을 갖춘 놈이 끼어들었다.’
천무백의 감각이 맹렬하게 반응했다.
천무백이 본격적으로 추적대에 끼어들었을 때부터 한시도 떠나지 않던 시선.
시선은 집요했고 음침하기까지 했다.
중단전의 선기가 강화될수록, 천무백의 상단전은 잠재력을 모두 활용하기 시작했다.
덕택에 오감을 넘어선 초감각은 범인이라면 알아차릴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불가해한 감각을 그대로 천무백에게 전해 줬다.
그게 바로 정체불명의 시선이었다.
웬만해선 누군가 자신을 지켜볼 때, 위치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하나 이번엔 아니다.
‘무서울 정도로 기운을 숨기는 놈이야. 정체를 숨기고 기운을 갈무리하는 수준이 예사 수준이 아니야.’
천하의 천무백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시선이다.
현재의 천무백의 기감으로도 정확한 정체를 유추하기 어려운 존재.
‘절강성에 누가 있지?’
유검제는 같은 추적대에 있으니 아니다. 그렇다고 아직 도착도 하지 않은 보타문의 검후 역시 아니다.
마땅한 인물이 절강성에 없다.
아니, 딱 하나 있었다.
‘독마!’
음침한 시선의 주인이 독마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흑회의 인물로 천무백은 추적대에 끼어들었으니, 의뢰한 일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시선일 것이다.
사실을 깨달은 천무백은 고민했다.
‘독마를 치느냐, 아이를 데리고 가느냐.’
애당초 목표는 성물을 취하고, 독마를 잡아 족치는 일까지 두 가지다.
하나 성물이 물건이 아니라 이 어린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계획은 틀어졌다.
‘시간이 필요해.’
물건이 아닌 사람이니, 이전처럼 일이 단번에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어쩌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 또 흡수할 방법 역시 찾아봐야 하고.
최선은 빨리 성물, 아니 이 어린 아이에게 숨겨진 비밀을 밝히고, 깔끔하게 정리한 뒤 독마를 잡는 것.
하나 계획대로 순산하게 이뤄질 일은 아니다. 독마는 변수 자체니까. 집요하고도 음침한 놈이다. 천무백이 아이에게 숨겨진 비밀을 푸는 사이, 독마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래서 천무백은 발상을 뒤엎었다.
“동시에 처리해 버리면 되잖아?”
굳이 순서대로 할 필요가 있는가.
하여 천무백은 판을 개판으로 만들었다.
추적대, 종리홍, 거기에 수적들까지. 그야말로 개판이 되는 상황에서 독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건 수적이 나타나 아이를 차지하면 그만이니까.
허나 검후까지 나타났다.
‘검후가 나타났으니, 아이를 뺏길지도 모른다고 여기겠지.’
아이를 검후가 거둬 가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사안이 아니다.
강호에서 가장 폐쇄적인 문파 중 하나가 바로 보타문이다.
육지가 아니라 주산열도에 있기에 더더욱.
하물며 검후는 천하십대고수에서도 상위권의 지존(至尊)이 아닌가.
한번 아이가 보타문에게 거둬진다면, 독마로서는 보타문을 혈귀곡 병력으로 대대적으로 침공하지 않는 이상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
성물을 노리던 혈귀곡, 독마의 계획도 무너지리라.
‘이제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보시지?’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성물을 찾는 것보다 독마를 먼저 치는 게 어려웠던 것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천하의 천무백도 추적하기 요원했던 이유.
하나 이제 검후가 등장했고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독마 역시 가만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자신을 한시도 떠나지 않던 그 음침한 시선이 수없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으니까.
아니, 가까워지고 있었다.
“독마가 지금 아이를 노리고 오고 있소.”
“독마? 내가 아는 그 독마를 얘기하는 것이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종리홍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마대전 당시 수백, 수천의 정파 무인을 참살했던 그 독마 말이오.”
종리홍의 낯빛이 새하얘졌다. 웬만한 일로는 꿈쩍도 안하는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독마가 아이를 어째서?”
“모르셨소? 이 수적들도 독마의 짓이오.”
“……!”
“독마와 혈귀곡이 흑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이 수적들은 독마의 명에 따라 아이를 데리러 온 것이고!”
“흑도가 혈귀곡의 손아귀에?”
믿기 어려운 진실이 아닌가. 천무백의 단호한 음성에 종리홍의 눈빛이 흔들렸다.
“안 그러면 수적들이 왜 노리겠소? 혈귀곡이 무당을 공격한 이유? 다 신령부 때문이었지. 성물을 노리는 건 그대뿐 아니라, 혈귀곡, 마도 놈들도 마찬가지요.”
종리홍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무언가 불쑥 떠오르는 생각에 작게 감탄을 터뜨리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그대가 성물을 찾는 이유가?”
천무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귀곡이 빼앗기 전에, 내가 보호하는 거요.”
갑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능허가 입을 쩍 벌렸다.
‘미친놈.’
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네.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가 아닌가!
아니, 뻔뻔함을 넘어서 저 당연하다는 듯이 거짓말을 하는 태도에 능허는 차마 할 말을 잃었다. 지금껏 해 온 행동을 옆에서 봐 왔는데, 보호하는 거라고?
‘근데 왜 저 양반은 혹해?’
능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종리홍의 표정이 변한 것이다.
“난 도인도 아니고, 도를 닦지도 않았소. 성물의 영험함에 무언가 느낀 건 있지만, 내가 쓸 물건이 아닌 건 아오. 하나 이것들이 혈귀곡에게 넘어간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 될 거요.”
“혈귀곡이 왜 성물을 노린단 말인가?”
“비다라!”
“……!”
“비다라가 선기에 약한 건 증명된 사실. 놈들은 성물을 이용해 선기에 영향받지 않는 비다라의 개선을 노리는 것이오!”
달변이었다.
능허는 그리 생각했다. 모든 내용을 다 아는 자신도 없던 신뢰감이 솟구치는, 그야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능변이었다.
종리홍의 표정 역시 변하고 있지 않은가.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거짓을 말하려면 진실을 섞으라더니.’
예부터 내려온 고언이다. 천무백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 가령 자신이 성물에 관심 없고, 성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참으로 뻔뻔한 거짓말.
하나 거기에 혈귀곡이 비다라의 개선을 위해 성물을 노린다는 진실을 더했다.
둘이 합쳐지니, 천무백의 거짓은 사라지고 오로지 진실만 남는다.
종리홍의 표정이 변하며 갈등하는 걸 본 천무백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고 있소. 종남의 대장로가 어찌 아이를 납치하겠소?”
“……!”
“가만히 내버려 두면 혈귀곡이 아이를 납치해 가리라는 사실을 알고, 미리 먼저 아이를 빼돌린 거 아니요?”
“뭐라?”
종리홍은 생뚱맞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지금 막 혈귀곡이 노리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갑자기 저게 뭔 개소리란 말인가?
황당한 표정을 짓던 종리홍은 천무백의 목소리에 무언가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이거…… 날 회유하는 거구나!’
종리홍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랬다. 이건 자신을 회유하는 거다.
‘검후가 나타났으니 내 정체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다.’
검후의 검에 목이 잘리기 싫으면, 정체를 밝혀야 하니까.
하나 그리된다면 종남의 명성과 위신은 진창에 처박힐 것이다.
차기 장문인이 당연시되던 자신의 행보는 물거품이 되고.
한데 여기서 천무백이 저리 증언해 준다면?
“종남의 명성이 바닥에 처박힐 수 있는데도, 오로지 협과 의를 위해 마도를 막기 위해, 스스로 구정물에 손에 담근 뜻을 존중하오. 하나 지금은 나에게 맡기시오. 독마와 마도 놈들이 오고 있소. 내가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겠소.”
“…….”
종리홍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룡검협이다!’
그가 이룩해 낸 수많은 협객행.
홀로 정파를 통합하고 혈귀곡이란 암중 마도에 대항하는 이야기 속 영웅의 자세.
뭇 강호인들의 존중과 인정까지 뒤따르는 명성을 가진 그다.
그런 천룡검협이 저렇게 상황을 정리해 준다면?
종리홍은 고민하고 또 고심했다. 섣불리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아이가 가진 선기,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이 가져가야 했으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고민하던 그에게 천무백이 일격을 가했다.
“우선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내가 데리고 가고, 독마를 물리친 뒤에 돌려보내 주겠소.”
종리홍의 고개가 퍼뜩 들어 올려졌다.
그렇게 된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어차피 술법도, 선기를 가둘 큰 그릇도 없는 천룡검협이 아이의 선기를 빼낼 수나 있겠나?’
더구나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있다면, 과연 독마의 독공에서 지킬 수 있을까?
종리홍은 그만큼 아이를 꼭 구명해 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할아버지라고 따르는 영특한 소용에게 정이 많이 든 것이다.
종리홍이 결연한 얼굴로 소용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다시 내게 돌려보내시오. 이 아이는 오성물에 버금가는 선기를 몸에 보유하고 있어, 역설적으로 죽어가고 있소. 내가 아이를 종남으로 데리고 가 치료할 것이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오성물에 준하는, 아니 그에 맞는 선기를 지닌 아이라. 그래서 종리홍은 이 아이 몸속에 있는 선기를 빼낼 생각이었던 거였어.’
소용에 대한 비밀을 알았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생각됐던 일이 단숨에 풀렸다. 다음 일도 문제없다. 종리홍이 선기를 빼내려고 했다는 건, 곧 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천무백이 못할 것도 없다.
‘이제 독마만 처리하면 그만이군.’
확신을 얻은 천무백이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돌려보내리다.”
물론, 치료는 내가 하고.
종리홍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중에 아이를 조심스레 이끌었다.
하나 마지막 순간, 무언가 께름칙한 기분에 선뜻 아이의 손을 내밀어 주지 못하고 망설였다.
천무백의 눈빛.
무언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리홍이 멈칫하자 천무백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나요, 나. 못 믿소?”
종리홍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못 믿냐고?
화산에서 성물 뺏어가고, 소림면패 운운하면서 협박하고.
조금 전까지는 흑도인 척 아이를 데려가려 해놓고, 뭐 못 믿냐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렇지. 어찌 믿겠나? 가면을 쓰고 나타나놓곤…….
“거, 사람 참. 좀 믿음을 가지시오, 믿음을. 그렇게 매사를 의심하면 제 성에 못 이겨 일찍 죽소. 뭐, 오래 살긴 하셨네.”
“······.”
종리홍의 뒷목이 뻣뻣해졌다.
* * *
종리홍은 끝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급변했으니까.
왕전유가 검후의 칼날에 큰 상처를 입고 급히 물러났다.
거의 빈사상태가 된 왕전유를 부축하며 철면장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배를 돌려라! 후퇴한다!”
천하의 왕전유와 수적들도 검후와 유검제의 추적대를 이겨낼 수가 없던 것이다.
수적들이 배를 돌리자 검후는 의기양양하게 종리홍을 향해 달려왔다.
“소용을 내놓아라!”
변수는 그때 발생했다.
강폭이 극도로 좁아지는 협소한 물길. 실력있는 고수라면 한 번의 도약으로 배 위에 올라탈 만한 양 강변에 엄청난 숫자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흉흉한 기색.
갑자기 나타난 무인들의 모습에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지사.
단순한 무인이 아니다.
장강을 가득 메우는 사특한 마기.
“마인?”
“마, 마도다! 마도 놈들이다!”
수적들을 물리치고 환호를 터뜨리던 추적대 사이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했다.
검후가 이대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던 독마가 끝내 모습을 드러냈다.
“보타문의 늙은 중아! 욕심 부리지 말고 썩 꺼지거라!”
음울하나, 강 전체를 사이하게 울리는 목소리.
“독마!”
독마의 등장에 검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후가 독마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정마대전때 몇 번이고 부딪쳐 본 적이 있으니까.
때문에 검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끌끌끌, 그저 주산열도의 암자에 처박혀서 불공이나 외울 것이지. 말년에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강호에 나와서 목숨을 재촉하느냐?”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내, 네놈에게 죽어간 강호 동도들을 잊지 않았다!”
무려 과거의 독마가 마인들을 대동하고 나섰으니, 검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건 당연한 일.
유검제 역시 마인들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이 마인들이 내 딸아이를 노리다니!”
“끌끌끌. 모두 죽여라. 아이만 살려 두고.”
독마의 명령에 마인들이 매섭게 배 위로 뛰어올랐다. 물에 떠다니는 부서진 배의 잔해를 밟고 단숨에 뛰쳐나온 것이다.
“죽여라! 마인들을 죽여라!”
마인들의 공격에 유검제와 검후 역시 맞상대했다.
그리고 그사이.
모두의 시선이 싸움에 쏠릴 때.
“아이는 내가 잘 지키겠소.”
천무백이 소용을 데리고 훌쩍 배를 뛰어넘었다.
그의 등에 한창 싸움에 휘말린 독마의 시선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