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84화>
184. 집요한 추적자
“스승님, 조금 덜 익긴 했지만, 먹을 만합니다. 드시지요.”
종리홍은 불쑥 내밀어지는 설익은 과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의복이 여기저기 찢기고, 얼굴에도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젊은 청년.
입이 무겁고, 오로지 정해진 임무만 수행하는 태을당(太乙堂)의 검객이다.
속세와는 연을 끊고 검과 도에만 평생을 바치는 종남의 무력단체.
위에서 명이 내려오면, 철저하게 지시받는 대로만 움직이는 무인들. 세간에서 가장 경외하는 종남의 강력한 검이다.
데리고 온 태을검객 셋 모두 지저분한 모습을 보니, 종리홍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됐다. 저 아이에게나 주거라. 배가 고플 거다.”
“잠시 잠들었습니다.”
“잠이 들어? 허어…… 정말 신기한 아이로구나. 이런 분위기, 압박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니.”
종리홍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한 태을검객의 품에 암긴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여아.
원래 아이가 잠든 모습은 천사 같다지만, 종리홍은 지금만큼 옛말이 참으로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신기한 아이입니다. 울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그저 재밌어하더군요.”
“평범한 여아가 아니니…….”
“스승님.”
“왜 그러느냐?”
“차라리…… 유검제께 진실을 말씀드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부에서 지시한 일에 의문도 품지 않는 태을당의 규율을 생각하면, 청년의 조심스러운 건의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종리홍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라면, 금지옥엽 같은 딸을 삼분지 일의 확률로 치유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삼분지 일…… 당연히 치유하지 않겠습니까?”
“삼분지 이의 확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
“…….”
태을검객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언뜻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스쳐 가는 걸 똑똑히 봤다.
감정 없이 시킨 일만 하는 태을검객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도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전현이를 데리고 왔으면, 반발했겠지.’
아주 격렬하게 말이다.
하나 종리홍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
종리홍은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너무 성급했다.’
흥분해서일까. 일 처리가 너무 성급했다.
조금 더 침착하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오성물.’
세간에는 전진의 오성물이고, 비화를 자세히 아는 이들에겐 중원을 통틀어 다섯 성물이다.
그리고 더 진실한 사실에 근접한 이는 알고 있다.
‘네 개의 성물로 대대로 상제(上帝)께 제례를 올리는 신녀(神女).’
통틀어 다섯 성물이라 부른다.
그랬다.
애당초 목표는 납치 같은 중대범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지켜보다 유검제의 딸이 신녀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태생부터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선기를 쌓고 태어난 존재.
전진교가 맹위를 떨쳤을 때면, 아마도 신녀가 되어 제례를 주관했으리라.
하나 전진교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늘과 상제께 올리는 제례는 도문마다 제각각이고 신녀는 잊혔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다.”
종리홍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감돌았다.
신녀는 신녀로 존재해야만 살 수 있다.
태생부터 몸에 각인된 선기를 제례를 통해 꾸준히 소모해야만 산다.
“평범한 이에게 선기는 그야말로 독이다. 애초 선기는 영(靈)에 깃드는 법. 선기를 품은 영을 한낱 아이의 육체가 어찌 버티랴.”
종리홍은 이 아이를 억지로 신녀로 만들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어떤 소양을 닦아야 신녀가 되는지는 문헌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식을 떠올렸다.
종남에서 오성물 정돈 아니다만, 나름 성물 취급을 받는 물건을 가지고 왔다.
여아의 선기를 빼내서 성물에 담아, 이걸 오성물 중 하나로 만들고 여아는 천천히 회복시킬 생각.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종리홍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유검산장에 접근했다.
‘어찌 사람의 몸에 저만한 힘이 깃들까.’
종남에서 가지고 온 성물은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더 큰 그릇이 필요하다.’
하나 그만한 그릇이라면, 아무리 종리홍이라도 외부로 반출이 불가하다. 더구나 그것들을 관리하는 건 비교적 무(武)와는 거리가 먼 진짜 도인들이 아니던가.
종리홍은 차라리 여아를 종남으로 데리고 갈 생각을 비쳤다.
한데 유검제는 무언가 미심쩍은 기색을 보였다. 비슷한 경지인 유검제의 매서운 눈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웠다.
유검제는 더는 치료를 거절했다. 때마침 검후가 아이를 거두리라고 온다 하니, 종리홍으로서도 다급해졌다.
보타문의 검후.
지극히 폐쇄적인 보타문이다. 중원의 변두리 절강성, 절강성에서도 배를 타고 나가야만 닿을 수 있는 주산열도.
종리홍으로선 보타문이 아이를 거두면, 두 번 다시는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종남으로 데려가 아이를 치료하고, 다시 유검산장으로 보낸다.”
애당초 유검제에게 본인들을 소개할 땐 의원이라 했으니, 갑자기 종남파에서 왔다고 하면 그것도 의심을 살 노릇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종리홍은 불가피한 선택이라 자위하며 여아를 데리고 나왔다.
문제는 유검제가 절강성에서 가진 영향력과 패권이 상상 이상이라는 점.
태을검객이 씁쓸하게 말했다.
“흡사 무림공적이 된 기분입니다.”
“그들로선 공적이나 다름없겠지. 우리가 아이를 납치한 것이니까.”
종리홍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망막에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아이가 맺혔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깜찍한 모습이 떠올리자 종리홍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다섯이 되기도 전에 요절할 터이니.’
처음에는 그저 아이가 가진 선기를 빼낼 생각뿐이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새 종리홍은 진심으로 여아를 치료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때였다.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스승님. 추적대가 근방까지 도달했습니다.”
“뭐라? 벌써?”
종리홍의 눈이 부릅떠졌다. 제법 한숨 돌렸다고 여겼건만.
“곧장 움직인다. 산을 넘어 안휘성으로만 들어가면 추적을 따돌릴 수 있다. 그곳엔 우리의 속가문파들이 있으니까.”
절강성만 벗어나면 한숨 돌릴 수 있다.
벗어만 나면.
종리홍은 어느 순간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함을 억눌렀다.
* * *
용성악은 경악했다.
“이쪽에 흔적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발견되는 흔적.
지지부진하던 추적이 갑자기 급물살 타기 시작했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리에 익숙한 근방의 길잡이들도, 추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이들도 발견하지 못했던 흔적이 거짓말처럼 우수수 발견됐다.
유검제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샅샅이 훑어라! 근방에 더 있을 것이다!”
단숨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추적대들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용성악은 선발대에서 감도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곤 그저 감탄을 거듭했다.
“도대체 저 무사는 뭐지?”
떨리는 시선이 전방에 닿았다.
무사들 모집을 끝내고, 용성악도 개인의 무력이 절정인지라 곧장 선발대에 끼어들었다.
꽤 오랫동안 추적이 지지부진했다. 선발대는 며칠 동안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한데 지금은 다르다.
“저 청년 무사는 대체 누군데?”
“허어. 눈썰미가 좋은 건가, 감이 좋은 건가. 무공은 나이를 봐도 대단하긴 한데, 그렇다고 여기에 저만한 무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뭐가 문제야? 저 친구 덕분에 이제 길이 좀 보이는데. 어서 찾자고. 찾기만 하면 보상금이 얼마야?”
주위의 무사들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저 친구, 자네가 데리고 왔다고 했지?”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에 용성악은 허리가 빳빳해졌다.
다름 아닌 유검제였다.
“그, 그렇습니다. 장주님.”
“훌륭한 추적자를 데리고 왔도다. 덕택에 길이 보인다. 내 여아를 찾고, 악적을 죽인 뒤에 적절한 보상을 내리겠다.”
“감, 감사합니다.”
용성악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한 건 그냥 무사 모집에 들어온 천무백을 데리고 온 것뿐인데.
천하의 유검객에게 직접 치하를 받다니!
그럴 만도 했다.
천무백은 곳곳에서 흔적을 발견했고, 거침없이 산길을 돌파했다.
이대로 천무백이 나서는 대로만 움직인다면 곧 찾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
한데 그때였다.
“이쪽은 아닙니다!”
별안간 한 무사가 소리쳤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천무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던 추적대가 일순 멈춰 섰다.
“이쪽은 길이 아닙니다. 지금 악적은 안휘성으로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한데 이쪽으로 도망쳤다니요? 여긴 안휘성이 아니라 오지입니다! 안휘성으로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무사가 천무백을 제지하며 열변을 토했다. 사실 천무백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추적을 담당하던 근방 지리에 익숙한 무사였다.
워낙 목소리에 힘이 실렸던 터라, 사람들은 조용히 지켜봤다.
천무백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처음 발견한 흔적은 저도 충분히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이후 흔적들은 무언가 이상합니다. 뭔가 인위적이에요.”
“인위적?”
“그래요. 인위적입니다. 누군가 꾸민 것처럼요. 더구나 흔적의 방향이 이상해요. 앞서 말했다시피, 이건 도주 경로로 보기에 정상적이지가 않아요.”
그 말에 유검제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인위적이란 말뜻의 의미는.
“지금 저 공자가 일부러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단 의미요?”
무사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분위기가 웅성거렸다. 비록 최근 흔적을 못 찾았다지만, 여기까지 추적을 성공적으로 이끈 무사였으니까.
무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네놈! 아무리 봐도 네놈이 수상해! 사실 네놈은 악적과 같은 편이 아니더냐? 지금 우리를 수렁에 빠뜨리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 말에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장주님, 숫자를 나눠서 추적해야 합니다. 이 자식이 이끄는 대로만 추적하다간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전 아무리 봐도 이놈이 의심스럽습니다!”
무사의 눈이 벌게졌다. 누군가 침음을 흘렀다.
“제가 이쪽 방면으로 추적해 보겠습니다! 이 풋내기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리 말하는 무사는 잔뜩 흥분했다. 천무백이 나타나기 전까지, 추적대의 지휘는 사실상 그가 도맡아 했다. 이대로 잘만 된다면 어쩌면 유검제에게 무공을 사사받을 있다고, 꿈에 부풀지 않았나.
‘근데 저놈이 내 공까지 가로채고 있다!’
한데 모든 사람의 시선과 찬사가 천무백에게 집중되자, 추적대에서 그의 영향력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다.
‘더구나 저놈, 이상해. 내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던 흔적이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질투와 시기가 아닌 건 아니다. 맞다. 하나 단순한 시기였다면 무사는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무언가 이상했다.
“네놈, 뭔가 숨기고 있지?”
천무백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일 내 말이 맞다면?”
“네 말이 맞아? 날 너무 우습게 여기는구나. 난 여기서 태어나서 삼십년을 이곳에서 쏘다니면서 자랐다. 산짐승보다 산길을 내가 더 잘 알지! 네가 맞다면 나는 여기서 물러나겠다. 대신, 내가 이끄는 게 맞다면 네놈은 악적들과 함께 추포되고 죗값을 치러야 할 것!”
무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악적입니다! 악적이 저기 숨었습니다!”
별안간 전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바로 천무백이 지시하던 방향이었다.
그러자 당당하게 얘기했던 무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아니, 그럴, 그럴 수가…….”
“됐고. 그만 빠지시오.”
천무백은 냉정하게 그리 말하더니, 곧장 몸을 틀었다.
무사가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저쪽은, 절대로 도주로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닌…….”
“그만하게.”
“장, 장주님.”
유검객이 냉정한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그 냉막한 표정을 보고 무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틀렸구나!’
“그간 여기까지 추적대를 이끌어 준 공에 대해선 고마움을 표하오. 보수는 섭섭지 않게 지급하겠소.”
명백한 축객령에 무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단숨에 상황을 정리한 유검객은 몸을 틀어 악적이 발견됐다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천무백이 지시했던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용성악은 그저 감탄만 거듭했다.
‘대단하다. 저 무사도 여기까지 추적대를 이끌고 올 정도로 추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저런 사람도 알아내지 못한 바를 꿰뚫어 봤구나!’
이제는 그저 젊고 강한 무사라고만 볼 수도 없다. 용성악은 경외에 찬 시선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응? 근데 곁에 같이 있던 그 중늙은이는 어딨지?’
마치 호위무사처럼 곁에 착실히 붙어있던 능허가 보이지 않았다.
혹여 추적 중에 낙오된 건가 싶어 용성악은 천무백에게 다가가 묻기로 했다.
“저, 공자…….”
“……새끼, 눈썰미 엄청 좋네. 실력은 확실히 있는 놈이었네?”
“……공자?”
“아, 무슨 일이시오. 용무사.”
천무백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성악의 표정이 묘해졌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아, 그냥 혼잣말이었소. 신경 쓸 거 없소.”
“……알겠습니다. 곁에 같이 계시던 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여 낙오된 거라면 제가 찾아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아. 그것도 신경 쓸 거 없소. 먼저 가서 추적 중이니까.”
“먼저 가서요?”
“자, 우리도 움직입시다.”
천무백은 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듯이 일축하곤 몸을 돌렸다.
“…….”
용성악은 왠지 모르게, 저기 낙담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무사에게 시선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