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83화>
183. 음, 그냥 절정이라 칩시다.
절강성.
천목산(天目山)에 세워진 유검산장(柔劍山莊)은 옛부터 인망 높기로 유명한 백도문파였다.
중원의 변두리에 있어 정마대전의 겁화에서 한 발짝 비켜난 곳이 바로 절강이다. 그런데도 유검산장은 장주부터 하급무사까지 모두 정마대전에 투신해서 싸웠을 정도로 협과 의를 추구했다.
정마대전 이후에도 세력이 줄지 않고 강대함을 자랑했고, 규모만 크다면 구대문파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강맹한 세력을 자랑했다.
다만 소수정예라는 장점이자 약점이 구파일방으로 도약하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래도 절강의 패권을 쥐는 것엔 부족함이 없었다.
매사에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웠으며 함부로 검을 쓰지 않았다.
오죽하면 항주에 바글바글한 흑도들도 유검산장의 무사를 만나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조아리겠는가.
패권을 지녔으면서도 섣불리 강호에 나서지 않았고, 검을 쉬이 뽑지 않았다. 오로지 협과 의를 벗어날 때만 뽑았으니, 인망이 높은 것도 당연했다.
하나 그런 유검산장에 숨막힐 것 같은 침묵과 살벌한 기운이 흘렀다.
“놈은 찾았는가?”
유검산장의 장주,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다는 평을 받는 유검제(柔劍帝) 전흠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총관은 서늘함에 목덜미가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평생 장주의 곁을 지켰지만, 유검제가 저리도 분노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채, 흘러나오는 건 순수한 분노와 살의(殺意).
총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백방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행적이 묘연합니다. 그래도 아직 절강성을 벗어나지 못한 건 확실합니다.”
“절강성을 벗어나기 전에 놈을 잡아 죽여야 한다. 절강을 벗어나면 놈이 어디로 빠질지 몰라. 그리고 아이의 건강이 좋지 못하니, 객지의 찬바람을 맞아 병이 더 심해지면…….”
유검제는 말끝을 흐렸다. 오로지 분노와 살의만이 가득했던 그의 목소리에 진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어렸다.
총관은 그저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유검제의 금지옥엽이던 딸이 납치를 당했으니까.
그것도 태생부터 가진 병을 고칠 수 있다며 접근한 의원들이 말이다.
“이 간악한 놈들. 의원으로 분해 내 딸아이를 납치해?”
콰앙!
유검제의 앞에 놓여 있던 탁상이 박살 났다. 사천에서도 질 좋기로 소문난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 가루가 돼 버리는 모습에 총관은 입이 바싹 메말랐다.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흥! 놈들은 한낱 의원이 아니다. 의원이었다면, 우리 산장의 추적을 벗어날 수가 없다. 하물며, 소문을 듣고 추적에 동참한 절강의 문파와 무사들이 몇이더냐! 거의 천라지망에 이르는 수준을 놈은 벗어나고 있어.”
“현재 여러 정보망을 통해 정체를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감히 내 딸을 노리고 접근한 놈들이다. 철저하게 숨겼겠지.”
“왜 노렸을까요?”
“…….”
그 물음에 유검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납치했다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게 정상이다.
납치범들은 딸을 납치해 놓곤, 요구는커녕 무작정 도주만 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 목적이 딸에게 있었다는 것처럼.
“어쩌면 보타문의 검후가 목적일 수도 있지.”
“그렇군요. 보타문의 검후께서 거둬 주시기로 했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불명한 병을 앓은 아이다.”
아무래도 유검제로선 그리 여길 수밖에 없었다.
곧 보타문에 갈 딸아이를 납치한 것은, 어쩌면 유검산장이 아니라 보타문을 목적으로 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검후께선 주산 열도에서 언제 오신다는가?”
“곧 도착한다는 서찰이 왔습니다. 검후께서도 제자로 거둘 아이가 납치당했단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다. 검후께서 나셨다면야!”
유검제는 무릎을 쳤다. 자신은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다는 평을 듣지만, 검후는 자타공인 천하십대고수가 아니던가.
용의주도한 납치범이 어째 잘 피하고 있다만, 검후가 나선다면 그깟 놈도 잡힐 수밖에 없으리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유검제의 눈동자가 불길로 타올랐다.
* * *
천무백은 행장을 꾸려 곧장 절강성에 도착했다.
절강성에 오자마자 상황파악을 하려고 움직였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절강성 전체가 시끌벅적했으니까.
“어떤 미친놈이 유검산장의 여아를 납치했다면서?”
“유검제께서 분노해서 현상금까지 풀었다는구먼.”
“목격해서 신고만 해도 보상금이 나온다네.”
“도의로 은혜를 갚겠다며 나서는 백도문파도 많지만, 오로지 돈을 노리고 흑도방파들도 너나 할 거 없이 나섰네.”
“그러니 이 절강이 시끄럽구먼.”
한참을 달려 도착한 어느 이름 없는 객잔에서도 그런 얘기가 돌 정도이니.
천무백은 굳이 알려고 여기저기 움직이지 않아도 대략이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 물건이라면서요. 왜 여아를 납치했답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성물이 아니라 여자아이라고?’
듣자 하니 유검제의 여아는 고작 아홉 살.
아무리 봐도 성물과는 관련이 없다.
‘종리홍이 맞나?’
하오문이 알아낸 것도 천무백이 혈귀곡에 종리홍이란 정보를 전하지 않았다면, 추측조차 못 했으리라.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인원의 추적을 따돌리는 걸 보면, 평범한 무인은 아니다. 종리홍 정도 되는 고수라면…….’
차기 장문인이 유력한 만큼 천무백 역시 실력을 인정했다.
‘우선 하오문의 정보가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쫓아야 한다.’
우선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태생부터 불치의 병을 앓았고, 최근에 보타문의 검후께서 불법으로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다고 제자로 받아들인다고 했답니다.”
“보타문의 검후라…….”
“뭐, 재능도 있는가 보죠. 보타문의 괴물 같은 여승 중에도 제자가 없는데, 그 어린 여아를 제자로 삼는다는 게 비단 치료 때문이겠습니까.”
“뭔가 있긴 하구나.”
“예. 병을 앓았지만, 그 점이 더 애석하게도 영민하기 그지없었답니다. 뭔가 사람 같지 않고, 선녀 같다고 하던데요.”
“선녀?”
“어린 애에게 어울리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느낌이 그랬답니다. 눈망울이 워낙 순진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보고 있으면 그간 잘못을 다 말하고 참회하고 싶어진다고…….”
능허는 여기저기 오가면서 얻어 온 정보를 풀어 놓았다.
천무백은 우선 납치당한 여아가 범상치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괜히 검후가 나서서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아닐 거다.’
검후라면 그도 잘 안다.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별호다. 오로지 보타문의 절대고수에게만 대대로 물려주는 칭호가 아니던가.
‘이름을 물려준 게 아니라니까. 40년 전에 봤던 그 할망구가 지금은 대체 몇 살이야?’
천무백도 순수하게 감탄을 터뜨렸다. 무를 익힌다고 꼭 오래 사는 법도 아니니까.
‘그야말로 상수(上壽:100세)로구나.’
하늘이 병을 내려 주지 않아야만 살 수 있다는 나이는 족히 됐으리라.
‘그 할망구 성격상 이번 일에 불같이 화내면서 나설 테고.’
천무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거 어려운데요? 주군.”
천하의 능허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선 엮인 단체가 너무 많았다.
종남파, 흑회, 유검산장, 절강의 문파들, 거기에 보타문의 검후까지.
모두가 오로지 여아를 노린다.
문제는 천무백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
“후우. 일단, 차근차근 가 보자. 우선 종리홍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아야 하니까.”
“하오문도 아직 모른답니다.”
“그거 신출귀몰하군.”
하오문이 정보를 물어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느리다. 다른 이들이 먼저 찾을지도 모르니까.
천무백은 우선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처음부터 시작하려면 너무 멀리 돌아가니, 우선 다른 놈들을 이용하자.”
“근방 유성문이란 곳에서 무사들을 모집 중입니다.”
유성문은 제법 견실한 중견문파였는데, 이번에 유검산장의 도움 요청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문파의 모든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모자라 떠도는 낭인들까지 모집하고 있었다.
이미 추적의 최전선에 있는 만큼, 접근이 용이하리라.
천무백과 능허는 곧장 무사를 모집하는 유성문으로 향했다.
* * *
유성문의 절정무사인 용성악은 미간을 좁혔다.
“현상금 보고 온갖 잡놈들이 다 모이는구나.”
비단 현상금뿐이랴. 유성문에서도 적잖은 보상을 챙겨주니, 칼을 찬 온갖 잡배들이 모여들었다.
용성악은 그게 불만이었다.
“문주님이 한때 유검제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지만…….”
그렇다고 문파의 기둥까지 들어내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용성악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미 문파의 모든 가용인력이 총동원됐다. 그것도 모자라 무사들을 모집했다. 차라리 실력 있는 무사들이라면 모를까. 절강에 이미 실력 있는 무사는 다 사문이 있으니 모이는 건 하류잡배요, 오히려 흑도들도 끼어 있을 지경이었다.
하나 문주의 명이기에 용성악은 어쩔 수 없이 무사들을 모았다.
“그래도 실력 있는 놈 한둘만 와도, 추적하는 데 용이할 텐데…… 응?”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들어오는 무인들을 시원찮은 눈으로 보던 그때.
용성악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절강삼견?”
꽤 유명한 흑도인 세 명이 바로 절강삼견이다. 사실 흑도라고 보기에도 모호한 것이, 출신은 백도 문파의 제자였다. 더구나 제법 견실한 능력을 갖춘 일류 무사들이었다.
자기들끼리는 절강삼랑이라해서 늑대들이라고 하지만, 언행이 워낙 하류잡배인지라 삼견이라 불렸다.
“허, 저런 놈들이 여기에 기어들어 와?”
용성악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에 심지어 모집에 참여한 다른 무사들에게 시비를 거는 광경이 보였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문둥이에, 웬 곱상한 미공자가 여기에 납셨을까?”
“흐흐흐. 이보시게들. 이건 유람이 아니야. 응? 공적을 추적하는 일이야. 얼마나 위험하다고.”
“이 어린놈은 미색이 제법 곱상하니, 오히려 계집처럼 꾸미면 공적 놈이 헉헉거리면서 눈이 벌게질 수도 있겠는데? 미인계로 쓰면 알맞겠구나.”
저질의 대화에 용성악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보아하니 저 세 명이 시비를 거는 무사 두 명은, 한 명은 얼굴에 화상 자국이 가득한 중늙은이요, 하나는 막내아들일까 싶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는 잘생긴 미공자였다.
중늙은이는 몰라도 젊은 미공자는 제법 화려한 검을 찼지만 뭔가 무공에 능숙해 보이진 않았다.
‘그냥 치기 어린 마음에 나서는 어린애겠군.’
저런 사람이 이번 일에 참여하는 건 용성악도 반대다. 그렇다고 해도 절강삼견이 저토록 추잡한 말로 시비를 거는 꼴을 보니, 안 그래도 답답했던 마음이 확 터질 것 같았다.
용성악은 결국 검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뽑으려는 찰나.
“거 존나게 깝죽되네.”
“……!”
퍽! 콱! 꽝!
용성악은 검을 반쯤 뽑은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찢어질 듯 부릅떠진 두 눈이 귀찮은 기색을 한 미공자에게 닿았다.
‘어찌…….’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아니, 찰나.
눈을 끔뻑이지도 않았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봤다. 그런데도 못 봤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무언가 부러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절강삼견이 모두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나는 어깨가 부서졌고, 한 명은 얼굴이 함몰됐으며, 마지막 하나는 오줌을 지린 채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이 무슨…….’
용성악의 눈이 꿈틀거렸다.
넋이 나간 그의 시선이 미공자에게 닿았다.
마침 미공자가 다가왔다.
“무사 모집한다기에 왔소. 따로 시험 봐야하오?”
……아니, 볼 필요가 있겠는가.
용성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맹렬하게 끄덕였다.
“합격이시오.”
“그거 시원시원한 양반이시군. 마음에 드네.”
천무백이 말갛게 웃었다.
* * *
“그래도 정확한 무공 수위가 어떻게 되시오?”
서류에 작성해야 할 게 있어서, 용성악은 조심스레 물었다.
일단 절강삼견 셋을 단숨에 때려 눕혔으니, 최소한 일류에서도 최상급이리라.
물음에 천무백이 별생각 없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입신지경이오.”
“아, 입신지경이라. 알겠소. 입신지…… 예?”
“이런, 깜빡했네. 농담이오. 일류라고 칩시다.”
“일류라고 치자고요?”
용성악의 눈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절강삼견을 쓰러뜨린 걸 보니 일류 이상은 맞긴 하는데…….
‘저게 일류가 할 짓이라고?’
그렇다고 절정이라고 보기엔 상대의 얼굴이 너무 어리다.
정말 어리다.
이 정도의 무사라면 소문이 났을 터.
적어도 절강에 비슷한 소문을 들은 적이 없다.
그래도 본인이 일류라고 하니, 용성악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일단 새롭게 조직된 후발대에서 추적을 시작할 것이오.”
“후발대? 그럼 선발대도 있나?”
“그렇소. 문주님을 비롯해서 유성산장과 힘을 합쳐 남치범의 지근까지 쫓아간 이들이오. 허나 그것이 속임수일지도 모르니, 후발대가 다른 방향으로 차근차근 추적범위를 넓혀 가는 것이오.”
용성악은 답지 않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실 용성악으로서도, 이만한 무사가 모집되는 게 꽤 오랜만인지라 조금 들뜬 것도 있었다.
“어, 선발대로 넣어 주시오.”
“응? 거긴 안 되오. 위험하오. 납치범의 실력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추정되니, 일류가 가서 싸움에 휘말렸다간 죽을 거요.”
“일류는 안 된다는 거요?”
“그렇소.”
그러자 천무백은 팔짱을 끼곤 말했다.
“음, 그럼 절정이라 칩시다.”
“예?”
“절정이라 치자고.”
“아니 그 무슨…….”
사람 무공이 줄었다 늘었다 하나?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던 용성악의 얼굴이 이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순간 천무백에게서 터져 나오는 압도적 기세.
숨이 멎을 듯한 압박에 용성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