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82화 (182/318)

<검신재생 182화>

182. 창천이 가고 창천이 오고

독고패와 협상을 끝내고 당장이라도 행동할 듯했던 천무백은 잠시 상황을 지켜봤다.

‘정보의 신뢰성이 문제지.’

종리홍이 절강성에 있다는 건 혈귀곡을 통한 정보라는 점.

천무백으로선 함정일 만약의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종리홍이 절강까지 갔다면 강호에 소문이 분명 났을 터. 세간에는 그런 소문이 전혀 없었다.

하여 천무백은 신중하게 하오문의 정보를 기다렸다.

다름 아닌 곡지흠이 직접 움직였기에, 복건과 절강성의 모든 하오문도가 총동원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를 물어왔다.

“종리홍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절강에 있어. 그것도 철저하게 정체를 숨긴 채로.”

우선 혈귀곡의 함정 따위는 아니었다.

정확히 종리홍인지는 확신할 수는 없었다. 허나 종리홍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절강성에 있는 건 틀림 없는 사실.

“절강 무림들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니.”

절강성은 유검산장이란 백도문파가 패권을 차지했으나,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작은 규모의 문파다. 그래서 흑도와 백도가 뒤섞여 있는데, 서로의 비중은 말 그대로 비등한 편.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강무림 전체가 종리홍을 쫓을 순 없다.

어쨌거나 종리홍은 종남의 대장로요, 차기 장문인이였으니까.

아무리 절강이 강호의 변방이고 종남이 섬서성을 벗어나면 영향력이 약하다고 한들.

어디 무림공적 쫓는 것처럼 추적할 수 있는데 아니란 얘기다.

“정체를 숨겼어.”

“정체를 숨겨요? 아……. 도둑질하느라?”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절강으로 간 거야. 그래서 풍운검군이 움직였단 소문이 강호에 안 돌았던 것이지.”

“하긴, 도둑질하는 거면 정체를 숨길만 하죠.”

“그러다가 도둑질이 걸렸던 거고, 그 탓으로 절강무림에게 쫓기는 것인데…….”

“그 양반도 골치 아프겠네. 정체를 드러내면 추적을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러면 종남의 위신과 체면이 진창에 처박힐 테죠.”

능허가 혀를 쯧쯧 찼다. 당연한 얘기다. 구파일방의 대장로, 차기 장문인이 전혀 연관도 없는 지방에서 정체를 숨기고 물건을 훔쳤다.

“크. 기루든 어디든 여기저기서 떠들어댈 게 눈에 훤히 보이네요.”

“그런 소문이 붙으면 차기 장문인 자리도 물 건너가겠고.”

“차기 장문인이 문젭니까. 지금 절강성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에 부닥친 건 분명해.”

“무슨 물건을 훔쳤길래 절강무림 전체가 나서서 쫓는답니까? 장보도도 아니고…….”

“그러게나 말이다.”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래도 종리홍이 노릴 건 분명 성물이다. 혈귀곡 역시 노리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다. 아무래도 천리너머 복건에서 접하는 소식으로는 너무 늦다.”

“알겠습니다.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어, 곡지흠은 어떡합니까?”

“두고 가.”

“두고 가요? 쓸 만한데…….”

하나 어쩔 수 없었다.

‘혹여 종리홍을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르니까.’

종리홍이 가지고 있으리라 추정되는 성물을 자신이 회수하는 게 목적.

불가피하게 종리홍과 칼을 맞댈지도 모른다.

이 같은 행보를 곡지흠 같은 정보집단의 수장에게 보여 줄 수야 있겠는가.

“우선 곡지흠이 불러와. 걔는 여기다 내버려 둔다.”

“그리 결정하셨다면야 뭐……. 그럼 흑회에서 일은 어떡합니까?”

흑회는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왕전유는 회주가 됐다. 거력왕 역시 못마땅했지만, 독고패보단 낫다는 판단에 왕전유에게 협력했다.

그러나 흑회를 구성하는 여러 조직의 수장들은 아무래도 독고패의 입김을 강하게 받았다. 태룡방 소속, 또는 태룡방의 하위 조직들의 수장이 임명됐다.

당연히 회주인 왕전유는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없지만, 그때 독고패가 팔을 벌렸다.

“감찰당주 자리 말입니다. 그거 비우기에는 좀.”

바로 흑심방주에게 감찰당주의 자리를 내놓았다.

“어느 단체나 감찰당만큼 힘이 센 조직이 있습니까. 그걸 건네준 거면, 독고패 그 양반이 충분히 좋은 자리 마련해 줬으니 왕전유도 은근히 흡족했잖습니까. 어쨌건 주군을 왕전유 사람인걸로 알고 있으니.”

“호의는 무슨, 그깟 조직 하나 줬다고 독고패가 호의를 표한 것처럼 보여?”

“그 시커먼 속내는 아무도 모르죠.”

“당주 자리만 흑심방주에게 주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다 제 사람으로 채울 거다. 목줄을 채우는 거나 다름없지.”

“그렇다고 그거 내버리고 가기엔 아쉽지 않습니까? 무려 흑회의 감찰당입니다. 조직원들만 잘 장악하면, 흑회의 권력 중심축에 드는 거라구요.”

“좋겠다. 너 감찰당주되서. 시골 흑도방파의 간부가 이젠 흑회의 감찰당주가 됐네.”

“엑. 제가 부방주인 거 이미 사람들이 다 아는데요.”

“방주님, 부르셨습니까?”

때마침 곡지흠이 도착했다. 곡지흠의 인사에 천무백은 대충 손을 휘저어 보이곤, 능허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흑심방주는 너잖아. 내가 대가리 시켜 준 적이 언젠데. 이 가면 써.”

“체형이 틀린데요.”

“그건 곡지흠이한테 부탁해.”

순간 방에 들어와 조용히 시립 해있던 곡지흠이 움찔했다.

“에이. 그건 변장이 아니라 변신이죠. 체형까지 곡지흠이가 어떻게 합니까.”

“능허야.”

“네.”

“내가 못하는 거 시키는 거 봤니?”

“많던데요.”

“실제로 다 했잖아?”

“그거야 못하면 두들겨 패니까…….”

순간 옆에서 다시 한번 움찔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제대로 못 하면 암진혜검은 더 못 전해준다고 말하면, 죽을 둥 살둥 널 날처럼 꾸며줄 거다. 그건 걱정마라.”

이번엔 단순히 움찔거린 게 아니다.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몸을 떨었다.

그제야 천무백이 고개를 돌렸다.

“막내. 왜 그래?”

“네?”

“왜 땀을 흘려?”

“아……. 아닙니다. 좀 덥네요.”

“여하튼 잘 왔다.”

여전히 자신의 정체가 들키지 않았으리라 여겨 흑도인 척하는 곡지흠. 능허는 웃음을 꾹 참았다. 아니, 참기 힘들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저 고강한 무인이 말 한두 마디에 몸을 움찔 떠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가.

“네가 지금 여기서 서열 3위지?”

“……네. 그렇습니다.”

“나랑 능허랑 좀 어디 갔다 올 동안 네가 여기 우리 애들 맡아서 흑회에 있어라.”

“네?”

순간 곡지흠의 눈이 떨렸다. 천무백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제가 감찰당주를 맡고 있으란 말입니까?”

“맞다. 흑심방주와 부방주가 자리를 비웠으니, 3인자인 네가 대리로 있어라.”

곡지흠의 눈이 감겼다.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갔다.

‘기회다!’

무려 흑회의 감찰당주다. 흑회 내부에 잠입한 것만으로도, 곡지흠은 하오문으로선 모을 수 없는 수많은 정보를 얻었다.

흑도방파들간의 역학관계와 소속된 무인들의 수준까지.

단지 천무백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정보를 얻었다.

한데 감찰당주의 직위를 대리한다면?

그 순간, 곡지흠은 잔뜩 굳어진 눈으로 천무백의 눈을 정면으로 봤다.

“내가 누군지 알고 계시구려?”

순간 일변한 기세. 흑심방의 어수룩한 막내가 아니라, 하오문의 수장, 곡지흠으로 돌아왔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모를 줄 알았소? 문주?”

“어떻게 알았지?”

“그냥 사람의 감이라고 칩시다.”

사실 천무백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변장은 자연스러웠고 기가 막혔다. 내공의 수발마저 자유로워 전혀 눈치채지 못할 법하다. 그래서 곡지흠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처음부터 알았소?”

“그리 말하면 안타깝겠지만, 애석하게도.”

“잘 아시면서 날 아주 부려먹으셨구려.”

“열심히 변장한 수고가 있는데, 그 수고를 어찌 모른 척하겠소?”

뻔뻔한 대답에 곡지흠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막혔다. 새삼 이 사내가 두려워졌다. 자신은 결국 천무백의 손바닥 위에 있던 것이 아닌가?

곡지흠은 혀를 내둘렀다.

‘어린 나이에도 이 정도일진대, 완숙해진 지천명의 나이에는 강호가 이 자의 손아귀에 다 들어가겠구나.’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감찰당주의 대리 역할. 그걸 제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어떤 의미인지 알았으니까.

거절할 수 없는 탐스러운 열매. 다만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암진혜검의 전수는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든 천무백 곁에서 암진혜검의 구결을 완벽히 받아내야 한다.

암진혜검의 구결과 하오문의 미래를 위한 엄청난 정보.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곡지흠은 이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내 부탁 하나 들어주시오.”

“암진혜검의 구결을 달라는 거지? 합당한 대가니, 일부 구결을 전해 주겠소.”

“아니, 그럴 필요 없소.”

“……?”

곡지흠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고강한 절기더군. 그간 전해준 구결도 아직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소. 심오하고, 또 어렵더구려.”

“흠. 쉬운 무공은 아니지.”

괜히 한 문파의 최강절기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 더 구결을 전해 봤자, 오히려 심마가 심해질 것 같소.”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익히고, 받아들인 게 정확한지. 그대의 가르침을 청하고 싶소. 하면 그대의 뜻대로 착실하게 감찰당주의 자리를 대리하여 그대가 필요한 일을 해 주지.”

천무백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하오문주란건가. 눈치는 빨라.’

천무백이 원하는 건 단순히 자리만 차지하고 역할을 대신하는 게 아니다.

감찰당에 소속되는 조직원들은 대부분 독고패의 끄나풀일 터.

그 감찰당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흑회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천무백이 원하는 바.

‘내가 자리를 비웠어도, 나를 대신해 흑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

오히려 천무백은 독고패의 목에 목줄을 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엔 자신도, 능허도 아닌 곡지흠이 제격이었다.

이미 하오문을 이끄는 문주인 만큼 그의 장악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비교적 흑도와 하오문은 비슷한 구석이 많으니까.

천무백의 얼굴에 묘한 희열이 감돌았다.

‘뜻을 굳혔군.’

그랬다.

곡지흠은 여기서 고개를 조아렸다.

내 뜻대로, 행하겠다고.

천무백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곧 무엇이겠는가.

수하가 되겠다는 의미다,

곡지흠은 지금 자신의 수하처럼 시킨 일을 하겠다는 걸 말하는바.

천무백은 웃음을 거둬들였다. 명색의 하오문주를 수하로 거둬들이는 것이니, 가르침만큼은 진실 되게 내려 줘야 하리라.

“곡지흠.”

“……!”

흘러나오는 묵직한 목소리. 동시에 급변한 기세에 곡지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무슨…….’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볼이 씰룩였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천무백을 바라봤다.

무심(無心).

아무것도 없다. 천무백의 얼굴에 떠오른 건 무엇도 없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강렬했다. 형형한 안광을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태산이 짓누르는 듯 무거웠고, 벼락처럼 전신을 관통하는 충격을 줬다.

어째서일까.

곡지흠은 아주 오래전, 정말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 시절.

자신을 구하고 기녀들 사이에 맡겨 놓곤, 분노를 터뜨리며 적을 향해 걸어 나가던 사내의 눈빛이 떠올랐다.

‘창천검신…….’

이 순간, 곡지흠의 앞에 있는 사내는 창천검신이었다.

* * *

“…….”

천무백은 능허를 대동하고 흑회를 떠나 절강성으로 향했다.

곡지흠은 남아서 흑심방주를 대리해 감찰당주의 소임을 수행키로 했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다. 독고패의 끄나풀인 조직원들을 제압해 감찰당을 장악해야 하고, 천무백이 돌아오기 전까진 흑회 내부에서 영향력을 키워 독고패의 목줄을 채워야 한다.

주어진 일은 단순하지 않고, 적지도 않다.

하나 곡지흠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

푸른 하늘, 창천(蒼天).

‘하늘이었구나.’

그날.

천무백에게 가르침을 받던 날. 그의 검이 절반으로 쪼개지던 날.

곡지흠은 경악하고 전율했다.

눈앞의 사내는 과거 창천검신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곧, 그만한 무력을 갖출 거라고.

“허허허…….”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수십 년, 무를 갈고 닦은 그에게 그건 차마 인정하기도 어려운 압도적 재능.

하나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감했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곡지흠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과거의 창천이 사라지고, 새로운 창천이 왔구나.’

하늘은 푸르다. 혈귀곡의 마도처럼 검붉은 하늘도, 흑도들이 원하는 사특하고도 음울한 하늘도, 백도들이 원하는 깨끗한 하늘도 아닌.

그저 푸른 하늘. 창천이 왔다.

곡지흠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결국 하늘 아래 사람일 뿐이다.

곡지흠은 마음을 다잡았다.

천무백이 시킨 일.

모두 처리하려면 한시가 급하다.

“우선 이쪽부터 해 볼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곡지흠이 움직인 건, 새로 만들어진 의약당.

그곳 병상에 누워 있는 해이(海彲)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