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81화 (181/318)

<검신재생 181화>

181. 이것들이, 감히 누구 거를 노려?

섬서성과 절강성은 서로 멀다.

상인이나 표행이 아니면 두 성을 오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니, 표국이나 상단도 규모가 중원 전체를 통틀어 이름이 알려진 정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 이번 일은 다르다.

“풍운검군 종리홍이 종남의 일부 제자들을 이끌고 절강성에 있다.”

섬서의 대문파 종남파.

더구나 대장로 중에서도 수위요, 차기 장문인이 유력한 사내 종리홍.

그가 직접 절강까지 행차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혈귀곡이 종남을 치고 그걸 강탈해 달라 했다는 거지.”

사실 천무백으로선 종남파의 행보에 크게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다.

종리홍이 절강성에서 무얼 하던지. 종남파의 문제일 테니까.

다만 혈귀곡이 관여됐다면 다르다.

‘둘이 연관될 점이 무엇일까.’

정의맹?

‘전혀 아니야.’

새로 만들어지는 정의맹에 종남파도 함께하지만, 다른 문파를 생각하면 사실 이름만 올려놓고 체면만 차린 것에 불과했다.

‘정의맹을 노렸다면 무당이나 소림을 다시 공격했겠지.’

둘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물건.

종리홍이 찾기 위해 절강까지 간 물건. 그리고 혈귀곡이 흑회를 이용해 강탈하고자 하는 물건이라…….

무엇이겠는가?

서로 판이한 백도와 마도의 두 세력이 노리는 물품이?

“두 세력이 성물을 노리고 있어.”

천무백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두 개의 성물만으로도 천무백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천무백은 자신이 걷고자 하는 검의 끝에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달려들 생각이었다.

특히 선기는 천무백이 이번 생에서 찾은 새로운 답안이다.

천둔검법이란 새하얀 그릇에 선기와 경천혼공은 서로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어울렸으니까.

천무백은 독고패에게 혈귀곡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했다.

당연히 독고패는 거절했다.

독고패로선 흑회와 백도무림을 충돌시키려는 목적이라 생각했으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혈귀곡의 의도 중 하나이리라. 다만 진실한 목표는 성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당에서도 일이 틀어지자, 신령부만큼은 채 가려고 했지. 태극혜검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겼어.’

비다라는 소림을 공격할 정도로 혈귀곡에서 중히 여긴 자산임이 틀림없다.

수많은 연구 끝에 결실을 보았을 터.

한데 그것이 적어도 백도 무림에서는 견제 방법이 생기지 않았나.

무당의 도사들이나 각 도가문파의 은거한 도력 높은 도인들이 나서면, 적어도 제압은 가능하니까.

그러니 성물을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종리홍 역시 오성물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었지.’

그래서 화산과의 갈등을 빚을 정도였으니까.

두 단체의 욕망이 부합되는 물건.

그들에겐 애석한 일이다.

‘나 역시 필요하니까.’

천무백이 새하얗게 웃었다.

그의 욕망이 뻗쳤다.

* * *

우선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독고패를 설득하는 일이다.

회주는 왕전유가 공식적으로 올랐지만, 독고패의 입김이 사실상 흑회의 뜻이었으니까.

“혈귀곡이 원하는 게 나의 흑회와 너의 백도연맹인 정의맹과 싸우는 것이다! 모르겠느냐? 혈귀곡의 배만 불려 주는 일이다!”

맞는 말이다. 당연한 상식이다. 독고패가 답답하다는 듯이 호통치자, 천무백은 오히려 독고패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지 않소?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무슨 말이냐.”

“흑회의 회주는 왕전유요, 그 뒤에는 내가 있소. 정의맹의 맹주는 투신 곽용이요, 그리고 그 뒤에는 내가 있소.”

“······!”

독고패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순간 말을 잃어버린 독고패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흑회의 회주가 된 왕전유는 알게 모르게 천무백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회주가 된 건 전부 천무백의 공이니까.

천무백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왕전유 정도 되는 노괴라면, 천무백의 실력이 자신과 최소한 엇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으리라.

흑회에서 영향력을 확장해야 하는 왕전유로선 절대적으로 천무백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하니 저 말이 맞다.

왕전유의 뒤에 천무백이 있다는 말.

“정의맹이······ 정말 네놈 뜻대로 움직이나?”

“못할 것도 없지.”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한 태도는 담담함, 자체였다.

지켜보는 독고패는 천무백의 눈빛과 태도에 등 뒤에서 소름이 쫙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정의맹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구대문파중 수위를 다투는 문파들이 참여한 거대단체를?’

독고패가 흑회의 창설을 서두른 이유가 무엇이던가.

개인적 탐욕도 있지만, 정의맹의 형성이 그에게 큰 경각심을 줬다.

유명무실해질 무림맹이 아니라 새로운 백도 무림의 연합체.

필연적으로 백도무림은 흑도와 공존하기에는 어렵다.

특히 백도무림의 힘이 통합된다면, 그 역동하는 힘을 외부로 쏟기 마련.

물론 그 힘은 마도를 향할 것이다. 다만 마도가 없어지고 난 이후가 문제다. 마도가 무너지면, 언젠가는 그것이 흑도를 향해 칼날이 돌려질 것을 독고패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런 정의맹이 천무백의 손아귀에 있단다.

‘영향력이 강대하리라고는 여겼지만······.’

그간 강호의 행보를 보면 영향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 지금 천무백의 말뜻엔 추측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흑도가 대놓고 종남을 공격해도,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

한마디로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단 말이 아닌가.

“그러니 분쟁이 있을 수야 있겠나. 서로 짜고 치는 연극인데.”

“종남파도 백도 무림이다.”

“누가 죽인다고 했소?”

“······?”

“적당히 물건만 뺏을 거야. 혈귀곡에서 그것만 해도 된다 했잖소?”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오히려 그게 어려운 일 아닌가. 상대를 죽이지 않고 물건을 뺏는다고?

강도 살인이 왜 괜히 일어나겠는가. 훔치기 어려워서다. 대놓고 품에 있는 걸 뺏어가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하니 천무백의 당당한 태도에 독고패는 침음을 삼켰다.

사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천무백에 대해 미약한 두려움을 느꼈다.

‘흑회도 이 자식이 마음만 먹으면······.’

왕전유가 호락호락한 양반은 아니다만, 천무백은 더하다.

어떻게든 교묘한 수를 내서 마음만 먹으면 흑회를 절반으로 쪼갤 만한 음흉함이 있다.

그럴 능력도 있고, 영향력도 있다.

자신이 만들어 낸 흑회에 이 자식이 이만큼 들어온 것이다.

‘거기에 정의맹을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다고?’

암중에 숨은 혈귀곡을 제외하면 현 강호에서 모습을 드러낸 가장 큰 두 단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영향력은 엄청날 두 단체에 간접적,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내.

천하의 독고패도 태룡방을 일궈 내고 흑회를 창설하는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자식은 고작 몇 년 만에 그걸 이룩해 냈다.’

지독히도 위험한 사내.

단 홀로 마음만 먹으면 강호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사내.

‘너무나 위험한 놈이다.’

물론 그는 천무백이 흑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다.

하나 쳐 낼 수는 없었다. 탐욕스러웠기에.

천무백이 정의맹과 흑회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독고패는 대범한 자다. 큰 그릇을 갖췄기에 절대자가 됐다. 그의 눈에 아찔한 감정과 동시에 오히려 강력한 흥분이 차올랐다.

‘위험한 칼일수록, 적에게 더 큰 위협이 되지.’

천무백은 검이다.

적을 언제든지 찔러 피를 철철 흘리게 만드는 위험한 검.

독고패라고 위험한 칼이 자신의 안위에도 위협을 끼칠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나 역시도 칼이라면 수십 년을 잡았다.’

독고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미 수십 년간 수많은 칼을 쥐었다. 이제 와서 위험한 칼을 잡는다고 무엇이 두려우랴. 독고패는 그 칼을 다스릴 자신이 있었다.

“좋다. 그럼 자네가 직접 종남을 치게.”

“그렇게 하겠소. 아, 그리고 내 몫도 잘 남겨 두고.”

“몫?”

“혈귀곡이 설마 맨입으로 부탁하진 않았을 테고, 제시한 게 있을 것 아니요?”

“······.”

“에이, 설마. 아무것도 안 받고 혈귀곡이 시킨 일을 냅다 할까. 그 천하의 태룡방주가. 응? 호구도 아니고, 흑도의 왕은 무슨, 마도의 심부름꾼일 텐데.”

껄렁한 태도에 독고패는 말을 잃었다.

* * *

“주군.”

“왜.”

“흑도로 몇 달 사시더니, 마음까지 흑도가 되셨소?”

능허의 반응에 천무백은 실없이 웃었다.

그 웃음에 능허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그래도 주군 일관성은 가지셨잖소. 혈귀곡 놈들 끝까지 추적해서 두들겨 패는 거. 기어 나와서 두들겨 패는 거. 어? 그러려고 정의맹 만들고.”

“맞다.”

태연한 대답의 의미는 간단했다. 이번 일도 지금까지의 행보와 다르지 않다고.

하나 능허도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런데 같은 정의맹 편인 종남을 친다? 어?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그것도 혈귀곡의 부탁을 받고?”

“종남이 완전히 정의맹에 투신한 것도 아니잖냐.”

“아. 그래서 정의맹 소속이 아닌 애매한 정파는 정파도 아니다?”

천무백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 봐라. 네가 흑도냐 백도냐. 왜 백도 걱정을 해?”

“그야 혈귀곡 때문 아닙니까.”

“네가 나보다 혈귀곡을 더 싫어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허, 누구 때문인데. 한번 척졌으니, 어쩔 수 없잖소. 내가 항복한다고 그놈들이 내 목숨을 내버려 둘까.”

“걱정 마라. 이번 일도 잘만 꾸미면 될 터이니.”

능허는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이번 흑회 일도 어찌어찌 잘 풀렸구나.’

계획했던 바는 어느 정도 이뤘다. 왕전유를 회주로 세웠고, 독고패가 독단하는 흑회를 막았다. 뿐이랴. 태룡방과 혈귀곡의 연수를 포착했고, 천무백은 더 나아가 독고패로부터 오히려 혈귀곡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됐다.

‘사실상 독고패를 혈귀곡의 정보를 캐오는 첩자로 쓰는 셈 아닌가?’

생각을 달리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천하의 독고패를 그리 쓰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종남을 먼저 치고, 그다음에 독마를 잡는다는 거죠?”

“독고패가 알려 준 내용에도 독마가 절강성을 오고 갔다는 내용이 있고, 이 흑성단 속에 있는 고독도 절강에서나 볼 수 있는 독충이 모체(母體)다.”

고독이 언급되자 능허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무백이 복용하지 못하게 하자, 입을 삐죽였는데 그 안에 고독이 있다니.

“때마침 종리홍도 절강에 있고, 독마의 행적도 절강에서 추적할 수 있으니까.”

천무백의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에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계획을 다 세워놨군.’

제법 오랜 시간 천무백 곁에 있다 보니, 그의 감정이나 생각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데 수월해진 능허다.

조금은 편안한 기색이 된 능허는 곰곰이 생각했다.

‘뭐, 그리 어려운 일 아니겠지. 종리홍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물건만 그냥 살며시 가지고 오는 거니까. 주군이 혹시 알아? 몰래 도둑질해 올지. 독마를 추적하는 게 골치 아프겠지만, 그만한 놈은 주군이 싸울 테니까.’

좋을 대로 생각한 능허는 편안한 마음으로 표정을 폈다.

하나 애석하게도 이어 들려온 소식에 능허의 편안한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종리홍이 쫓기고 있답니다.”

“쫓겨? 누구한테?”

“절강성의 유력 문파들이 추적하고 있답니다. 자기네들 물건을 강탈했다면서······.”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표정변화를 보고 능허 역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일이 계획대로만 풀리겠냐.’

다른 세력이 중간에 꼬인다는 건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천무백의 머릿속에 세워진 계획도 분명 꼬였으리라.

‘저 봐. 독마를 잡는다고 할 때도 여유롭게 웃던 양반이, 계획이 어그러지니까 표정이 확 찡그려지네.’

과연 능허의 생각처럼, 천무백은 일그러진 얼굴로 한참 입을 다물었다.

‘쯧쯧. 계획이 엉킨 게 답답한가 보군.’

하나 이어 튀어나온 천무백의 호통은, 능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것들이, 감히 누구 걸 노려?”

“······.”

아니, 왜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거로 생각하는 건데.

능허는 입을 떡 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