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80화 (180/318)

<검신재생 180화>

180. 의뢰할 텐가?

이 순간. 천무백은 수를 던졌다.

‘지금부터는 내가 판을 짠다.’

지금껏 천무백이 순순히 독고패가 짜놓은 판에 휩쓸렸던 이유는 정보의 부재였다.

어째서 흑도가 통합하는지, 태룡방과 혈귀곡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밀접한지.

모든 게 안갯속 같은 정국이었으니까.

‘이제는 모든 게 맞아 떨어졌다.’

독고패와 혈귀곡의 관계, 그사이에 끼어든 독마. 독고패의 개인적인 욕망.

모든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정보의 유입은 곧 판단과 결정으로 이어졌다.

천무백의 날카로운 눈빛이 독고패에게 향했다.

독고패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돌처럼 굳어진 얼굴에 드러난 건 경악이었다. 천하의 독고패도 동요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충격받았다.

“천…… 룡검협.”

믿을 수 없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다. 근래 강호를 위명 하나로 진동시키는 신진고수, 아니 희대의 협객.

눈앞의 사내가 그라니. 의심할 수도 없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감당 못할 기세. 저 어린 얼굴에 이만한 기세를 내뿜을 수 있는 이가 강호에 천룡검협말고 누가 있던가.

솔직한 말로 독고패는 심각할 정도로 충격받았다.

지금껏 강호를 두발로 걸어왔고 두손으로 싸워왔다. 정마대전이란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강자를 보고 느꼈다.

겉보기엔 장년인으로 보이는 그의 나이도, 사실은 일흔이 훨씬 넘지 않는가.

독고패는 본인 스스로를 강호 그 자체로 여겼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누가 길러냈는가. 누가 만든 것인가?’

허나 자신만의 강호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 기세를 집어 삼킨다.’

흑도인으로서 뭇 강호인들이 인정하는 천하십대고수 독고패.

입신지경의 경지에 올라 오연하게 무인들을 내려다볼 절대고수.

그런 자신이 기세에서 집어 삼켜졌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입신지경……!’

그랬다. 상대는 입신지경이다. 수십 년 경험과 싸움, 수양으로 천하십대고수에 오른 독고패 본인과 같은 경지.

고작 약관이 된 눈앞의 청년이 그랬다.

독고패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의 기억에 이만한 게 가능했다는 건.

‘창천검신이 서른 살의 나이에 강호에 나왔을 때가 입신지경이었으니…….’

하면 눈앞의 인물이 그 정도 존재란 말인가.

독고패의 떨리는 시선에 천무백의 미소가 맺혔다.

“내 태룡방주께 인사드리오. 강호동도들이 천룡검협이라 부르는 천무백이라 하오.”

지금 정체를 밝히는 건 승부수를 던지는 것.

‘판이 보인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보의 부재는 해소됐다.

천무백은 수많은 경험과 관록이 쌓인 괴물이다. 지금의 강호 역사를 돌이켜 봐도, 천무백만 한 노괴(老怪)는 없을 것이다.

그런 천무백은 스스로 판을 짜 주도하기를 즐겼다.

그렇다고 모든 걸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확실해야지.’

모든 정보가 수면 위로 실체를 드러냈으니.

그걸 기반으로 머릿속에선 새로운 판이 짜였고, 천무백은 그 판에 수를 던졌다.

독고패.

‘네놈이 들어올 판이다.’

판에 사람을 끌어오는 방식은 간단하다.

충격을 줘 상대를 완전히 뒤흔든다.

지금 천무백이 꺼낸 건, 본인의 정체와 무(武).

적어도 강호를 주유하는 강호인이라면, 적으로 마주치는 상대에 대한 정보보다 본인에 대한 객관화가 완벽해야 한다.

자신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자신의 수준이 어떤지, 강호에서 어느 정도로 통할지.

그 모든 것들을 파악하고 잘 안다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아니, 쉽지 않다. 많은 고수도, 수많은 경험을 지닌 강호인도 그런 객관화를 잘못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다 무참하게 죽어 나가지 않던가.

그런 면에 있어서 천무백은 완벽했다.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냉철했고 비판적이었다.

자신이 가진 무(武)에 대해서.

그래서 천무백은 승부수를 던졌다. 상대를 이 판에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냉철한 판단으로.

“무슨 목적이더냐. 무슨 속셈으로 흑회 안에 들어왔고, 지금껏 잘 숨겨 온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냐.”

독고패는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경계를 보였다.

‘됐다.’

하나 천무백은 내심 실소했다.

자신이 원한 반응이었으니까. 경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상대는 충격을 받았고 이미 반쯤 천무백의 판에 발을 걸친 것이다.

천무백은 고삐를 쥔 채 서서히 당겼다.

반쯤 들어왔으니, 이제는 확실하게 끌어들여야 한다.

천무백의 눈이 빨아들일 것처럼 독고패의 눈을 응시했다.

“내 목적은 미리 말했잖소.”

“…….”

극도로 긴장한 독고패는 천무백이 가면을 벗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혈귀곡.”

“그래. 그게 내 목적이오.”

독고패의 표정이 묘해졌다.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아주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혈귀곡이 목적이다……?”

“지금껏 강호에 퍼진 내 행보를 보면 알 텐데.”

“…….”

독고패는 침묵하며 침음을 삼켰다.

흑도의 통합을 추구하는 위치인 만큼, 독고패는 강호의 정세에 민감했다.

특히 두드러지는 혈귀곡의 존재와 그를 맞상대하는 천무백의 행보를 어찌 모르겠는가.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혈귀곡에 대항하는 애송이.’

그것이 오늘 아침까지 독고패의 생각이었다.

그저 정파의 애송이가 가진, 알량한 정의심에 혈귀곡이란 거악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그게 아니었다. 확신이 있기에 싸운 것이고, 자신감이 있기에 싸운 것이다.’

그랬다.

혈귀곡이란 거악(巨惡)에 대항하는 거인이다. 강철과 같은 심장으로, 흔들리지 않는 거목 같은 다리로 오연히 서 있는 거인.

독고패의 날카로운 시선이 속을 샅샅이 헤집는 것처럼 천무백을 훑었다.

“난 혈귀곡의 행적을 쫓고 있지. 태룡방이 그와 연계된 것을 발견해서 끼어든 것이오.”

“……어쩔 생각이었나?”

“혈귀곡과 그대의 연수가 확실하다면, 무리해서라도 당신을 죽이려고 했지.”

“……!”

순간 독고패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감히 누가 자신에게 저런 망발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허나 이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그는 순간 눈빛이 바뀌었다.

“지금은?”

“그쪽도 혈귀곡과 완전한 동맹은 아니지 않소.”

“…….”

독고패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순간, 그는 무심한 듯 냉막한 천무백의 눈빛을 보고 감탄이 들었다.

‘어찌. 그 누구도 모르던. 삼괴이 녀석들도 모르던 내막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저리도 파악했을까.

순간 맥이 탁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날 섰던 경계심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서야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판에 끌어들이는 마지막 확실한 방법.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건 간단하다. 상대가 탐낼 만한 미끼를 판 위에 올려 두는 것.

무엇이겠는가.

“혈귀곡, 내가 싸워서 죽여 드릴 테니 그쪽은 정보나 주는 게 어떻겠소?”

“……!”

서로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 *

하루가 꼬박 지났다.

독고패는 그 자리에서 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위협을 가해왔다. 독고패의 수하들이 근방을 머무르며 감시하는 시선이 쏟아졌으니까.

“이런 썅, 독고패랑 뭔 대화했길래 이럽니까.”

“능허야, 내가 설마 독고패한테 욕이라도 했겠니?”

“욕만 하면 다행이죠. 여기 흑회에 독고패 직속 수하만 삼천인 거 아시죠? 그 외에 독고패를 지지하는 흑도방파 다 합치면 오천은 넘습니다.”

“오 산술 좀 하는데? 산술과를 봐서 산학관으로 조정에 출세하는 거 어떠냐?”

“아니, 주군. 농담하지 마시고. 독고패랑 분쟁 발생하면 여기서 다 죽습니다.”

“다?”

“……나랑 설봉이랑, 밑에 애들이랑.”

능허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새삼 배짱 두둑한 능허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느낄 정도로 주위 분위기가 매서웠으니까.

허나 천무백은 천하태평했다.

표정 변화가 하나도 없는 천무백을 본 능허는, 갑자기 별안간 픽 웃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뭐냐. 갑자기 왜 편안한 얼굴이야.”

“주군 얼굴 보니까, 뭔 다 생각이 있구나 싶어서요.”

“그렇다고 너무 편안한 거 아니니? 적당히 경계심도 가져야지.”

“예. 이미 곡지흠이에게 시켜놨습니다.”

“뭘?”

“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면, 당장 탈출할 수 있는 경로 확보해놓으라고 했습니다.”

능허의 일처리에 천무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능허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리고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처리를 한 것이니까.

“그래도 탈출 경로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아닙니까.”

“그 만약에도 없을 거다.”

천무백은 단호하게 말했다. 때마침 그때 바깥이 웅성거렸다.

밖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나 좀 보지.”

독고패가 직접 왔다.

천무백은 독고패와 단둘이 마주 앉으면서, 내심 미소 지었다.

독고패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사람이라면 응당 감정의 파편이 남기 마련이다.

천무백은 그 파편을 읽었다.

‘결심했군.’

하긴, 어쩔 수 없는 미끼였으리라.

‘스스로 왕이 되고자 탐욕을 가진 자. 유례없는 흑도의 통합에 이어 흑도의 왕이 될 사람이, 혈귀곡이란 외부세력의 간섭을 좋게 여기진 않겠지.’

필요해서 도움을 받았겠지만, 껄끄러운 존재.

그렇다고 서로 야합을 한 건 맞기에, 갑자기 칼을 거꾸로 돌려 싸울 수는 없는 노릇.

만일 싸운다면 독고패는 자신이 이룩한 권력에 금이 갈 거란 걸 잘 알았다.

한데 이런 와중에 천무백이 나타났다.

“네놈 목적은 혈귀곡, 단지 그것뿐인가?”

“흑도에 관해서 내 생각 없소. 원한다면 하왕이 당신에게 협조적으로 나설 수 있게끔 도와드리지.”

“흥. 하왕이 회주가 됐다 한들, 내 뜻을 거스를 것 같더냐?”

“거스르진 못 하겠지. 다만 적어도 당신의 권력에 어깃장을 놓을 만한 세력이 있고, 이젠 회주가 되면 명분까지 얻게 되니까.”

“…….”

독고패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천무백의 제안이 달콤했으니까. 자신에게 이로우면 이로운 것이지, 나쁜 게 아니다.

남의 칼로 혈귀곡을 쳐 낸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반면 상대는 흑도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일견 이해가 갔다.

‘모든 행적이 그랬다. 혈귀곡에 대항하고, 정작 얻는 건 없었지.’

물론 천무백이 그 속내를 들으면 폭소를 터뜨리겠지만, 강호 사람들에게 천무백은 얻는 것도 없이 그저 묵묵히 혈귀곡과 싸우는 협객으로 비쳤으니까.

“좋다. 그럼 이리하지. 네 뜻대로 내가 알고 있는 마도 잡놈들의 정보, 위치, 모든 걸 전해 주마. 하나 나는 계속해서 놈들과 협력할 것이야. 너와 같이 혈귀곡을 공격하진 않겠다.”

“흠, 남의 칼로 대신 적을 치겠다…….”

“네놈이 정녕 마도 놈들이 목적이라면 뭐가 문제겠냐? 나는 정보를 주고, 너는 칼이 된다. 간단한 이치다.”

애당초 천무백이 의도했던 것이기에 만족스러운 답이다.

허나 천무백은 남의 손에 쥐어지는 칼이 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칼 쓰는 값은 받아야지. 자객을 고용해도 값을 치르는데.”

“말이 다르군.”

독고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싫으면 말던가.”

“…….”

“어차피 내 눈엔, 당신도 혈귀곡과 같이 손잡은 놈이야. 그러면 마찬가지로 마도나 다름없지.”

“겁박하는가?”

“겁박처럼 보이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안 그렇소?”

천무백이 능글거리며 말하자 독고패는 침음을 삼켰다.

“좋다. 값은 무엇으로 치르면 되겠는가.”

천무백이 씩 웃었다.

“외상으로 달아 주겠소. 나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지.”

“……그게 될 것 같은가? 네놈이 어떤 소릴 하게 될 줄 알고?”

“뭐, 사기 싫으면 말던가.”

천무백의 태연자약한 반응에 독고패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 놈이 먼저 제안해 놓고, 수락하니까 또 값을 요구하는 이 당돌함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뻔뻔함의 극치에 독고패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거절할 수가 없다. 이 순간, 독고패는 이미 천무백의 판에 뛰어들었으니까.

“좋다. 거래는 체결됐다. 하면 내 먼저 그대에게 정보하나를 주지.”

“독마에 관한 것이나 내놓지.”

“미안하지만, 그 노인네는 흑회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모습을 드러냈을 뿐. 나 역시 그자가 어디에서 오고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아는 바는 모두 알려 주마. 나 역시 그놈이 껄끄러우니까.”

“좋소. 하면 지금 주겠다는 건 뭐지?”

“혈귀곡 놈들이 일 하나 해 달라고 하더군.”

“일? 왜 직접하지 않고?”

천무백의 반문에 독고패가 뚱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걸 몰라서 묻는가? 네놈 탓이다. 네놈이 하도 혈귀곡을 쑤시고 다니니, 놈들도 웬만해선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지. 그래서 이 흑회를 세우는 것에 지원한 것이고. 저들이 쓸 수 있는 칼이 되게끔.”

“무슨 일이오?”

“종남 놈들이 절강성에서 무언갈 들고 섬서로 간다는군.”

“종남?”

갑작스런 얘기에 천무백의 눈빛이 변했다.

“그래. 그들이 가지고 간 무언가를 뺏어달라고 하더군. 이왕이면 다 죽여 버려도 상관없다고.”

“…….”

“쉬운 일은 아니야. 풍운검군 종리홍, 그자가 있지. 내가 보기엔 그 물건은 빌미일 뿐이야. 이 마도잡놈들은 내가 종남을 공격해서, 백도무림과 전쟁이라도 일으키길 바랄 눈치지. 흥. 내가 그딴 부탁을 들어줄성 싶은가.”

“……하시오.”

“뭐라고?”

“그 일, 받아들이시오.”

“……!”

“아니, 내가 하지.”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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